제목: 예수의 시각으로 본 종려주일
요한복음 12:12-19 저는 어렸을 때부터 종려주일을 교회가 특별히 기념하는 것에 대해서 의구심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군중들의 바램 대로 예수께서 이 사건 후에 실제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는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또, 머지않아 이들은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가 종려주일의 의미를 군중들의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행위에서 찾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오늘은 같은 사건을 예수님과, 예수님의 관점을 이해한 제자들의 관점으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크게, 군중들, 유대 종교지도자들, 제자들이 있는데, 그 순서대로 각각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군중들은 누구입니까? 이들은 유월절 명절을 지키려 각지에서 모인 평범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역사 문헌에 의하면 그 수가 수 십만명에 달할 정도로 많은 인원들이 모였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얼마전 베다니 라는 마을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미 죽은 지 4일이 지난 나사로를 예수님이 살려 내신 이 사건은 가히 센세이셔널한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를 부정하는 자들조차 이 사건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민심은 이 사건 이후로 예수에게 온통 쏠리게 됩니다. 이렇게 오매불망 예수만 기다리고 있던 군중들에게 예수가 예루살렘에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이 소식에 온 예루살렘은 들썩거리기 시작합니다. 이 때, 군중들이 하나 둘 씩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와, 그것을 흔들며 예수를 맞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 땅에 깔고는 힘차게 소리치며 예수를 영접합니다. 종려나무는 힘과 승리를 상징합니다. 그들이 외친 ‘호산나’는 ‘우리를 구하소서’ 라는 뜻입니다. 즉, 죽음도 다스리시는 예수께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외침이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들을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어 달라는 소망도 함께 담긴 외침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대단히 불편해졌습니다. 사실 이들은 타고난 정략가요, 노련한 정치가들입니다. 이들의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 때문에 일반 백성들은 그들이 좋던 싫던 그들을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이런 그들에게 대단히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지혜로 가르치고 기적과 표적을 행하는 자였습니다. 그런 예수가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는 자들이 바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동안은 위협과 협박으로 막아 왔는데 얼마전 나사로 사건 이후로는 이들도 민심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이제 이런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정치적인 대결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론은 이미 예수에게로 완전히 돌아서 있었습니다. 군중들은 그를 왕으로 맞이합니다. 이들 소망대로 예수가 왕이 되면, 그들의 정치적 생명은 끝장 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의 힘을 빌려 예수를 죽이려 합니다. 그 계기가 된 사건이 바로 예루살렘 입성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바리새인의 마음도, 군중들의 마음도 예수님은 다 아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어떻게 반응하시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군중들의 환호에 으쓱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소 냉담하기까지 하셨습니다. 또한, 5일 후 이들이 자신에 대해서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칠 때도 예수님은 여전히 요동하지 않으시는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은 군중심리나 포퓰리즘에 흔들리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오히려 그 가운데서도 무리의 영적 필요를 보시고, 그것에 집중하신 분이십니다. 군중들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그가 나귀를 타신 것에 담겨 있습니다. 군중들의 종려나무와 호산나 외침에 대해, 예수님은 자신의 방법은 순종과 희생, 겸손과 언약의 성취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은 환호하는 군중 뒤에 있는 타락한 성 예루살렘에 집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호산나’ 외치는 소리 뒷편에 있는 군중들의 구원의 대한 필요에 집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자기를 왕이라고 소리치는 사람들 가운데서, 아버지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인 ‘십자가’에 집중하셨습니다. 자신이 영광 받으시기에 가장 유리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다른 영광을 이야기하시는데, 그것은 ‘자신의 죽음’이었습니다. (요 12:23-24)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는 행동으로 반응하셨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던 그 시각,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면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성전 체제’와 ‘종교 체제’는 완전히 끝나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예수님 이외의 중재자가 필요 없어진 상황에서 대제사장은 더 이상 백성 위에 군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실 예수가 영광 받을 때 오히려 자기들이 우쭐해하였습니다. (눅 19:37) 이런 그들의 태도에 대해 성경은 ‘그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라고 한 마디로 평가합니다. (요 12:16a)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제자들은 종려주일의 진정한 의미를 하나씩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스가랴 9:9절의 말씀이 예수님에 대한 말씀인지를 깨닫고 정말로 크게 감격하였습니다. 이어서 그들은 군중들이 환호했던 속 뜻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흔든 종려나무는 ‘사망 권세를 이기신 승리의 주님 예수’를 상징한 것입니다. 그들이 호산나라고 외친 것은, ‘하나님과 단절되어 죽을 수밖에 없던 군중들의 절규였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주께서 완성하신 것이었습니다. 결국 제자들만 예수님의 종려주일의 의미에 맞게 삶을 살았습니다. 이 사건을 예수님의 시각으로 보게 된 후에 그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어 예수님을 따라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어지므로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제자들이 경험한 깨달음의 은혜와 결단의 축복을 맛보는 저와 여러분, 그러한 종려주일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나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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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나님과의 동행
창 5:21-24 한동안 한국에서 꽤 유명하게 방영되었던 다큐 프로그램 중에 “동행”이란 프로가 있었습니다. 정말로 어렵게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의 삶을 소박하면서 진솔하게 나눴던 좋은 프로그램이었는데요, 그 방송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건 누군가의 지지와 격려임을 깨닫게 됩니다. 즉, 함께 가는 것, 동행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느끼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동행 이야말로 하나님이 정말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강조합니다. 근데, 동행은 뭔가 큰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시시콜콜한 일상을 함께 하는 것이 진정한 동행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이런 동행을 원하십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앞으로 나와 동행 하시겠다는 선포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는 “동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 길은 꽃 길만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길이 생명의 길, 축복의 길, 형통한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며, 내 삶의 운전대를 그 분께 내어 드리는 헌신의 과정입니다. 에녹 (Enoch)은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65세에 므두셀라 (Methuselah)를 낳은 후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사실 그가 이 땅에서 한 일은 하나님과 동행한 일이 전부입니다. 그가 이처럼 동행만 하였는데, 그 결과 그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를 그냥 데려가셨습니다. 아담이 죄로 인해 죽은 지 57년만에 에녹은 죽음을 겪지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열심의 증거입니다. 에녹은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였을까요? 짧은 본문 속에 힌트가 있습니다. 첫째, 기억하라! 입니다. 에녹은 아들의 이름(므두셀라)을 특별하게 짓습니다. 그 문자적 뜻은 ‘창 던지는 사람’이란 뜻인데, 그 속 뜻은 ‘네가 죽으면 심판이 임한다’는 뜻입니다. 그 아들이 죽었을 때 실제로 홍수 심판이 일어납니다. 에녹이 아들을 낳을 때 그는 하나님의 큰 심판계획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들의 이름을 그렇게 짓고 하루에도 몇 십번씩 하나님의 심판과 주권과 구원을 기억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며,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우리가 제대로 묵상한다면, 우리의 일상은 지금과는 굉장히 달라질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매일 매일 했던 사람이 에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기억하는 것이 그가 동행했던 첫 번째 방법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던 두번째 방법은 훈련이었습니다. 둘째, 훈련하라! 에녹이란 이름의 뜻은 헌신하다, 순종하다, 훈련받다입니다. 그는 하루 하루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 훈련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헌신된 삶은 단순합니다. 그 결과 그는 평생동안 “동행”만 했을 정도로 단순하게 하나님만 향했습니다. 훈련은 힘들고, 반복되고, 하기 싫지만 그 열매는 생명을 살립니다. 우리의 영혼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에녹은 그 이름대로 훈련된 자였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에녹의 동행 비결은, 동행 자체를 즐기는 것입니다. 셋째, 즐겨라! 에녹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건이 훈련만 했다면 그는 결코 300년 동안이나 하나님과 동행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 시간은 인간의 의지로만 가능한 시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보다, 에녹은 하나님과의 동행을 기뻐했고, 이를 즐겼기에 오랜 시간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라는 말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오랫동안 동행하려면 동행 자체를 즐겨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내게 여러 루트로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그 분은 내 마음의 생각을 다 듣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시 139:1-4) 내가 하는 말을 다 들으시고, 내 마음의 생각을 다 감찰하셔서 내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쁨을 맛보면 더욱 그 기쁨을 누리고 싶어집니다. 또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얻는 큰 기쁨 중 하나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개인적인 사랑’을 깊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은 변치 않는 명제지만, 오직 동행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개인적인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시는 분이십니다. (신 32:10, 시17:8, 신26:18, 시135:4, 사62:5, 고후11:1-15) 이런 하나님의 사랑 표현을 우리가 개별적으로 들으면 정말로 날아갈 듯이 기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 세상과 사람이 두렵지 않고, 오히려 시시하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그 생명이 코의 호흡에 달려있는 인생이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듭니다. 때론, 동행하는 인생에도 폭풍우와 모진 풍파가 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믿는 구석이 있습니다. 태풍의 눈 속에서 평강과 희락을 맛보기도 합니다. 그러면 정말 세상이 별것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동행의 유익이자 기쁨입니다. 나는 젊었을 때, 하나님과의 동행이 내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동행은 젊은 내게는 목표를 향해 가는 방식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고 보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인생의 굴곡을 겪은 지금, 나는 하나님과의 동행이 인생 최고의 목표라고 감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에는 쉼이 있습니다. 휴식이 있습니다. 기쁨도 있습니다. 때론 힘겨워도 주님의 보호하심을 깊이 경험합니다. 삶의 성과는 오히려 동행을 즐길 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것이 내가 애써서 얻은 결과보다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하나님과 떠나는 인생 여행입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동행에 여러분들 모두를 초청합니다. 나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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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청년부 예배오후 2시 (청년부 예배실) Archives
April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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