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산상수훈 2 - 빛과 소금 (마 5:13-16)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갈릴리 호수가의 한 언덕에서 예수님께서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전해주신 설교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계승하시면서 동시에 그 참된 의미를 바로 잡아주셨습니다. 오늘 주제인 ‘빛과 소금’도 이 때 말씀하신 유명한 말씀입니다. 13절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이 땅의 소금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고, 음식이 부패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매우 적은 양의 소금으로도 이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바다물의 소금 함유량은 약 3% 라고 합니다. 음식의 적당한 염도는 1% 라고 합니다. 이렇게 적은 양으로도 소금은 충분히 그 역할을 수행합니다. 마찬가지로 적은 수의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만 있어도 세상은 부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때 사용된 소금의 상징적 의미 중에 ‘소금 언약’이 있습니다. 이는 소금이 변치 않으며 영원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민 18:19, 레 2:13) 또한, 신약시대에는 소금의 다른 의미로서 ‘지혜와 재치있는 말’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골 4:6) 이것을 종합해 본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소금이라고 선포하신 말씀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참 맛을 내는 소금이다. 이 세상이 더 이상 부패하지 않도록 하는 방부제다. 너희는 비록 적지만, 너희를 통해 세상은 하나님 나라로 회복될 것이다. 너희가 세상의 소금인 근거는 나의 변치 않는 언약이다. 내가 변치 않듯, 너희도 변치 말거라. 너희는 세상의 지혜자다. 너희를 통해 세상이 내 지혜를 알게 되리라.”, 다음으로, 14절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선포하십니다. 성경의 시작은 빛의 이야기입니다. 빛이 있기 전 상태는 어둠이 가득한 상황이었습니다. (창 1:2) 하나님은 다음 절에서 “빛이 있으라” 고 말하시며 빛을 창조하셨고, 4절에서는 그 빛이 좋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셨습니다. 예수님도 당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8:12) 이처럼 빛은 곧 하나님이며, 하나님 편에 속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빛과 어둠은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로 구분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에게는 죄, 악함, 무지 등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빛과 어둠의 다른 중요한 특성은, ‘빛이 있으면 어둠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빛과 어둠을 나누셨고, 만군의 하나님이 곧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빛은 어둠을 이기기 위해서 다른 특별한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자신의 빛을 비추면(shine) 됩니다. (마 5:16, 시 37:6) 또한, 빛은 안보이는 것을 보게 해주고, 모르던 것을 깨닫게 해주고, 나갈 방향을 인도해줍니다. 성령님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도록 도우시는 역할을 ‘성령의 조명하심 (The illumination of the Holy Spirit)’이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성령 하나님은 우리 영혼에 빛을 비춰 주시는 존재입니다. (고전 2:9-10) 또한, 빛은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시 119:105, 광야의 불기둥, 등대와 별빛) 따라서,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래와 같이 풀어 쓸 수 있습니다. “너희는 빛의 근원인 내게 속한 자이기에 너희 또한 빛이다. 너희는 어둠과는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존재들이다. 너희를 통해 어두운 세상을 비추게 하리라. 너희가 빛을 비추면 곧 어둠은 사라지리라. 세상은 너희의 빛을 보고 나를 깨닫고, 알아가며, 내게로 나아오리라.”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우리가 빛과 소금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지금부터 열심히 신앙생활해서 어느 경지에 오르면 그 때 빛과 소금이 된다는 말씀이 전혀 아닙니다. 지금 벌써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저는 ‘기능론적 정체성의 변화’라고 부르겠습니다. (cf,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존재론적 정체성의 변화) 왜 하나님은 아직 준비도 안 된 우리를 빛과 소금이라고 선포하실까요? 그 깊은 의미는, 빛과 소금의 능력이 내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예수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직 준비가 안되었지만 내 안에 오신 예수님은 이미 빛이요 소금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 하려면, 첫째,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의 모습이 나를 더더욱 지배해야 합니다. 내 안의 예수님을 더 잘 찾고, 그 분의 뜻을 더 잘 알고, 그 분과 더 많이 대화하고, 그 분을 좇아야 합니다. 성령충만할 때 주시는 마음과 목소리에 순종하고, 말씀묵상하며 기도할 때 주시는 세밀한 음성을 잘 캐치해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평강의 마음을 유지하고, 그러한 선택을 내 삶에서 해 나가야 합니다. 둘째, 나를 버려야 합니다. 나는 죄성을 갖고 있는 어둠의 속성이 강한 존재입니다. 이것을 자꾸 죽여가야 합니다. 소금은 맛을 내려면 다른 재료 속에 녹아들어가야 합니다. 즉, 내가 죽어야 소금의 맛이 납니다. 내 자아, 내 성격, 내 혈기, 내 자존심, 내 한계, ‘나는 이런 사람이야!’ 하는 모든 것을 내려놔야 합니다. 이 두가지 노력을 게을리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맛을 잃은 소금, 그릇에 덮인 등잔이 됩니다. 이들도 소금은 소금이요, 등잔은 등잔입니다. (존재론적 정체성) 그러나 그들은 제 역할은 전혀 하지 못하는 소금과 등잔일 뿐입니다. (기능론적 정체성)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선택권은 하나입니다. ‘내가 내 정체성에 맞게 소금의 맛을 내고 빛을 발하며 살 것인가, 아닌가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점점 더 커지고, 나는 점점 더 죽어갈 때, 우리는 진정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변화가 우리 공동체 가운데 힘차게 일어나길 축원합니다. 나눔을 위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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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팔복을 좇는 삶 (마 5:1-12)
예수께서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을 시작하시자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랐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마4장) 그들을 갈릴리호수 북쪽의 한 작은 언덕에 앉히시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을 산상수훈(The Sermon on the Mountain)이라고 부릅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를 호기심에 따랐던 ‘무리’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 함께 섞여 있었습니다.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5장에서 7장 사이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팔복 (Beatitudes)”의 말씀은 그 중 첫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가르침의 시작을 무리가 가장 관심이 있는 ‘복’이란 주제로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팔복은 단순히 우리가 세상에서 복받는 비결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진짜 복이 무엇인지 바로잡아주는 말씀이자, 더 나아가 기독교인의 세계관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럼, 8복의 내용을 하나씩 간략히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복되도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것은 내 영(프뉴마)이 철저하게 겸손한 상태를 뜻합니다. ‘가난하다’는 마치 거지와 같이 누군가가 주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나는 영적으로 아무것도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난 살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둘째, ‘복되도다! 슬퍼하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위로가 있을 것이다.’ ‘슬퍼한다’는 원어는 영어로 mourn, grieve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이는 단순히 슬퍼하는 감정보다는, 전심으로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이에 해당되는 대표적인 경우는 회개할 때와 사별할 때입니다. 이들에게 약속된 축복은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입니다. 셋째, ‘복되도다! 온유한 사람들은, 그들은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 온유함은 인간관계에 적용되는 말로서, 다른 사람을 친절하게, 겸손으로, 사려깊게 대하는 성품이며, 남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땅을 유업(기업)으로 받는 축복이 약속되었습니다. 직업(분깃)은 우리가 ‘일과 영성’ 에서도 배운 것처럼, 현실적인 축복이자 동시에 영적인 축복입니다. 내 삶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나와 함께 일하심으로 세상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나의 일을 통해 흘러갑니다. 그 매개체가 땅의 유업입니다. 넷째, ‘복되도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그들은 배부를 것이다.’ 이 말씀은 죄악된 세상에 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를 기대하고 소망할 수 있는 좋은 근거의 말씀이 됩니다. 비록 세상은 선과 악이 혼재되어 있고, 때론 악이 더 강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정의가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약속하는 말씀입니다. 다섯째, ‘복되도다! 자비로운 사람들은, 그들은 자비를 받을 것이다.’ 이 또한 사람들과의 관계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비로운 마음, 특히, 섬김이 필요한 자들과 약자들, 소외받은 자들을 긍휼히 대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 42:3, 출 22:21-24) 이렇게 자비로운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가 임할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여섯째, ‘복되도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그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다.’ 이 또한 영적인 복입니다. 즉, 하나님을 보는 가치를 알 때만이 이것이 큰 복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먼저, 위선 되지 않은 마음, 두 마음 품지 않는 마음, 즉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순전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셔서 정결해진 마음, 즉, 성령 충만한 마음도 함께 의미합니다. 일곱째, ‘복되도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릴 것이다.’ 이 또한 사람의 관계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여러 관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자를 주님은 복되다 하십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겸손하고, 관계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길 수 있는 분들입니다. 여덟째, ‘복되도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사람들은,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것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과 긴밀히 연계된 부분입니다. 그 정도가 목마름을 넘어, 이제는 의를 위해 부당한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보다 확연해지는 것은,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예수 믿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위 말씀에 근거해 본다면 결국 어떤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들인가요? 여러분, 복받고 싶으십니까? 네. 하나님께는 겸손히 자기 죄를 자백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때론 그것을 위해 박해를 받기도 하는 자입니다. 사람에게는 친절하고, 용서하고, 슬픔 가운데 있는 자들과 함께 슬퍼하고, 약한 자를 긍휼한 마음으로 보호하고, 갈등 관계를 평화롭게 해결하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이걸 한마디로 정의하면 결국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신 6:4-5, 레 19:18) 우리 주님은 팔복 설교를 통해서 구약 율법의 핵심을 이렇게 멋지게 새롭게 정의해 주신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어떤 복이 주어집니까? ‘하나님’ 그 분 자체가 복입니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위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을 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움) 또한, 세상에서는 자기 분깃을 받을 것을 약속 받습니다. 이는 꼭 과하게 부하지는 않더라도 우리의 필요는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챙기시겠다는 신실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그 분 자체를 간절히 사모하고 바라며, 삶에서는 주어진 분깃 가운데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신앙생활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팔복에서 복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평범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깊은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복은 무엇인가요?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아주 평범한 일상의 신앙생활 잘 해나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더 잘 알아가려고 노력하고, 악한 세상에서 신앙인답게 살려고 노력하고, 관계 가운데 너그럽고, 양보하고, 화평케 하는 것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복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팔복의 메시지가 과하지 않고 현실적이어서 너무 사랑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예수님이 말하신 복있는 삶 끝까지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나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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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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