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12제자를 파송하십니다.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아픈 사람들을 치유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여행을 위해 아무 것도 가지지 말고,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떠나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는 마을을 떠날 때는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전도 여행이 오직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로 이루어지고, 제자들을 통해 복음이 분명히 증거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파송받은 제자들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칩니다. 이 소식을 들은 헤롯 왕은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이 살아난 줄 알고 몹시 당황합니다. 전도여행을 마친 제자들이 예수님께 돌아와 사역보고를 하고, 예수님은 이들과 함께 뱃새다로 이동합니다. 이것을 안 무리가 따라오고, 예수님은 이들을 영접하시고 하나님 나라 일을 말씀하시며 병자들을 고치십니다. 날이 저물어가고, 무리는 허기집니다. 무리를 보내어 마을과 촌에서 알아서 음식을 구하도록 하자는 제자들의 제안에, 주님은 너희가(12제자)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있는 오병이어(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축사하신 후 떼어 제자들을 통해 무리에게 나눠주십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둡니다.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6)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 (16-17)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저를 주님의 제자로 부르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의 삶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받게 하시고, 언제나 주님의 돌보심과 인도를 따르게 하소서. 배고픈 이웃을 긍휼히 여기게 하시고, 나의 작은 것(오병이어)을 주님의 손에 올려드릴 수 있는 믿음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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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두 가지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의 공통점은 여자라는 점, 죽음과 관련 있다는 점, 치료와 믿음이 관련 있다는 것, 둘 다 즉시 회복되었다는 점, 그리고 만지는 일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죽음이란 주제이고, 죽음을 극복하는 주제와 관련된 믿음의 역할을 말해 주시고 있습니다. 혈루병을 가진 여인을 치유하는 데는 예수님의 적극적인 활동과 상관 없이 여인의 확고한 믿음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여자의 확고한 믿음으로 인해 그녀는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후 예수님은 죽은 아이에게로 가서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를 일어나게 하시는 기적을 베푸십니다. 이 두 사건의 공통점은 믿음으로 인해서 치유와 구원을 얻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씨뿌리는 비유와 연관되어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말씀에 대한 믿음, 예수님의 대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기도 “하나님 아버지, 믿음을 통해 치유와 회복의 기적을 체험한 것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도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승리하는 하루되게 하여 주소서” 오늘 본문의 중심은 씨뿌리는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인내로 실천하는 것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뿌려진 씨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명시됩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을 받지 못하도록 공격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빼앗아 가기도 하고, 간접적으로는 시험으로 말씀이 뿌리 내리지 못하게 하기도 하며,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과 쾌락으로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사탄의 유혹을 벗어나 열매 맺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그냥 말씀만 듣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착하고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착하고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인내로 이를 굳게 잡고 지키는 자가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을 이기는 방법은 인내입니다. 이생의 염려, 재래와 생의 쾌락에 빠져 말씀의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을 막는 방법은 역시 인내입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유혹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말씀 위에 바로 서서, 그 말씀을 붙들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넘어 뜨리기 위해 여전히 시험과 유혹으로 다가오지만, 말씀 안에서 인내함으로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시험과 유혹에 넘어지지 않고, 착하고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인내로 열매를 이루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비슷한 내용이 상당히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 복음서를 공관복음이라고 부르는데 예수님의 생애를 공통적인 관점에서 기록한 복음서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누가복음에는 마태, 마가복음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는데, 오늘의 본문도 유사한 기록이 마태복음에 있지만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을 씻긴 여인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사건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의원이라는 존경받는 직업을 가졌던 누가가 그의 높은 위치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 있는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 특히 가난한 자, 목자, 여인, 과부, 병자, 죄인들 까지도 세심하게 돌아볼 수 있는, 겸손한 믿음을 가진 자였다는 것을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37절: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41-42절: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님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50절: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을 묵상해 보면, 결국 시몬이라는 이름의 바리새인과 죄를 지은 한 여인이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용서의 은혜를 아는 사람,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감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이 주님의 은혜에 한없이 부족한 죄인이라 고백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간구하게 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여인의 인생을 바꾸어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진실한 회개의 눈물로 주님 앞에 나아올 때, 예수님은 누구라도 받아 주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는 주님의 귀한 음성을 들으시는 모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투옥된 요한이 자기 제자 둘을 예수님께 보내어 묻습니다. “오실 메시아가 당신이십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맹인이 보고, 못 걷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치유받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 일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칭찬하십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보다 강직하고, 왕궁의 부드러운 옷 입은 자나 사치하는 자보다 훌륭합니다.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하시며,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클 것이라고 하십니다.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고 하는 반면,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는 요한의 세례를 거부한 채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립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의 사람(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을 비유하여, 결혼식 날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장례식 날 애곡해도 울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들은 금식하는 요한을 광인으로, 먹고 마시는 예수님(인자)을 술꾼으로(또한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방합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23)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28)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믿음 생활 중에 의심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 저를 붙드시고 다시 믿음의 자리로 이끄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의심이 들 때 오히려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 말씀에 귀기울이게 하소서. 제 안에 믿음의 감정이 메마르지 않도록 항상 은혜 안에 거하게 하시고, 주님을 바르게 알아가고 고백하는 믿음으로 저를 성장시켜 주소서. 주님 사랑합니다.”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신 예수님은 나인 성으로 가십니다. 제자와 많은 무리가 예수님과 동행합니다. 성문 가까이에서 예수님은 장례 행렬을 마주칩니다. 죽은 자는 한 어머니의 독자이고, 그의 어머니는 과부입니다. 주님은 과부를 보시고 마음에 깊은 동정(긍휼의 마음)을 느끼십니다. 여인에게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셔서 관에 손을 대십니다. 그리고는 죽은 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그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죽은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합니다. 예수님은 살아난 청년을 그의 어머니에게 돌려주십니다. 사건을 목격한 모든 사람은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는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유대인)을 돌보셨다고 말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이스라엘 땅 전역에 퍼지게 됩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3-14)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16-17)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저를 향한 주님의 긍휼의 마음이 저를 살리고 회복하셨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제 안에도 주님의 긍휼의 마음 부으셔서 연약한 사람, 소망을 잃은 사람을 품고 섬기게 하소서.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의지하여 오늘도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소서.” 오늘 본문은 백부장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부장은 유대인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 유대인으로부터 인정 받은 사람입니다. 이것으로 볼 때 백부장은 이방인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백부장의 종이 병이 들었을 때, 그는 유대인의 장로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종을 고쳐 주실 것을 청합니다. 그 청을 들은 예수님은 백부장의 집을 향해 갑니다. 그 때, 백부장은 예수님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면서 말씀만 하소서라고 자신의 뜻을 전달합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권세를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멀리서도 말씀으로 종을 고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믿음에 놀라셨습니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 만한 믿음은 만나 보지 못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이라고 해서 유대인들보다 못하지 않다, 오히려 더 나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주님의 권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정치적 입장 등의 모든 차이를 다 뛰어 넘어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의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향한 믿음으로 종을 치료한 백부장의 믿음을 닮게 하여 주소서. 어떻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만 바라보는 신실한 믿음이 사람이 되게 하여 주소서” 오늘 본문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열 둘을 사도로 택하신 부분이고, 둘째는 평지설교로 불리는 것으로 복과 저주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밤이 새도록 기도하신 후에 내려오셔서 12명의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을 사도로 칭하셨습니다. 12명을 부르신 것은 단순하게 예수님을 대표하여 그를 계속해서 증거할 증인들을 선택한 사건일 뿐만 아니라 구속사적으로 하나님의 새 백성의 기초가 되는 근간을 세우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다양한 직업과 출신,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평지에서 많은 무리를 향하여 복과 저주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외적인 조건 때문에 사람들에게 멸시와 무시를 당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증거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예수님이 제시하는 구원의 축제에 기쁨으로 참여했습니다. 반대로 부자들, 배부른 자들, 지금 웃는 자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자들에게는 저주가 임할 것을 선포하십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복이 아니고 세상 사람들이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복이라는 가치관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있는 자들은 그들이 누리는 좋은 여건 때문에 하나님도, 구원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불행한 자들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복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참된 복을 누리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오늘의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겸손함을 닮게 하시고, 세상의 가치관이 말하는 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을 누리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좁은 길을 가는 성도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사역은 바리새인들의 주목을 끌게 합니다. 예수님의 등장이 못마땅한 바리새인들인데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이적을 행하시니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정할 수 밖에 없는 이유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안식일은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적으로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모든 계명들 가운데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은, 그들의 신앙의 행위가 특히 더 드러나는 일이다 보니, 자신의 의가 드러나는 안식일에 대한 율법은 더욱 더 철저하게 지키는 바리새인들의 삶이 되었습니다.
2절: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5절: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9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바리새인들의 믿음은 헌신된 믿음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헌신을 칭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의 행동을 책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열심과 헌신이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 관계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결여된 열심과 헌신은 오히려 그 사람을 더욱 완악하게 합니다. 사랑이 결여된 신앙은 오직 자신의 의와 명분을 위하여 계명을 지키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신앙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도 바리새인과 같은 모습이 있지 않나 돌아 봅니다. 우리도 우리 마음의 중심을 살펴 보고, 우리의 마음을 말씀으로 조명하면서 겸손히 매순간을 살아 가는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예수님은 나가서 레위(마태)를 제자로 삼으십니다. 레위는 세리이고, 세관에 앉아있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예수님을 따릅니다. 레위가 예수님을 위해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열었는데, 그 자리에 세리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참석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합니다. 어떻게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실 수 있느냐며 불평합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의사는 건강한 자가 아닌 병든 자에게 필요하듯이, 예수님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 요한(세례 요한)의 제자와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고 마신다고 지적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 필요가 없지만, 그 날에는(예수님이 죽으실 날에는)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고 금식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새 옷 한 조각 비유와 새 포도주 비유를 통해, 메시아의 새 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전통(유대인의 금식 전통)을 고집하지 말 것을 보이십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7-38)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죄인인 저를 부르시고 회개하게 하시고 제자로 삼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누군가를 대할 때, 주님의 사랑과 은혜의 마음으로 대하게 하소서. 예수님을 빠뜨린 채 과거의 전통에 매이지 않게 하시고, 항상 예수님과 함께 새 시대의 은혜와 기쁨을 누리고 나누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