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인간의 만남 가운데 유일한 선물이며 최고의 굴레이다.
결혼은 육체적 결합으로 성립된다. 육체를 통하여 자신은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배운다. 아울러 이성을 서로 조율한다. 그리고 영혼을 서로 연주한다. 결혼의 처음은 감미롭고 달콤하다. 아직도 그러하다면 큰 은혜이다. 나중은 아프고 괴롭다. “이럴려고 내가 결혼하였나?”. 이 반문이 없다면 동물이거나 천사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결혼의 마지막에는 깊이와 멋과 향기가 있다. 이것이 결혼의 완주 코스이다. 왜 인간은 결혼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쾌락이나 번식만 위해서가 아니다. 성서는 절대자와 인간의 관계를 부부로 구체화한다. 성례와 혼례는 공통점이 있다. 서로의 신뢰와 사랑 그리고 끊임없는 바램이 있다. 그리고 예물과 예복을 입는다. 그래서 인간 제2의 출산으로 거듭난다. “결혼”은 욕구와 쾌락,편리와 문화를 이유로 그 상대가 인간이 아닌 것으로 바꾸어질 수 있을지 몰라도 그 핵심은 부인할 수도 없고 속일 수 없고 벗어날 수도 없다. 인간에게는 특수 인식 프로그램이 입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양심이다. 이것이 마비되거나 망가지면 무슨 짖이라도 다 할 수 있다. 부부의 침소는 어린 양 성소의 조명을 끊임없이 받는 곳이다. 이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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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만 문자라는 도구를 사용한다.
문자는 인간이 만든 최고의 작품이다. 문자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언어이다. 원시적 문자는 그림이였다. 그 속에는 위치, 방향, 비밀, 사랑, 꿈, 약속이 담겨있다. 문자는 예술과 문화,경제와 전쟁,통치와 종교의 활력소이다. “그 로고스”는 문자를 만나서 더 길고, 더 멀고, 더 깊은 영감을 담는다. 문자의 위력은 칼보다 강하다. 그 문자의 첨단이 글씨이다. 글씨는 그 사람의 뇌의 흔적이라고 한다. 글씨는 인간 내면이며 수양이기도하다. 글씨는 치료의 도구로도 쓰인다. 글씨 가운데 붓글씨는 예술과 신심의 표현이 된다. 먹을 가는 것에서 인내와 절제를 배우게 한다. 그것은 팔이나 손 힘으로 나오는 연필이나 타이핑과는 차원이 다르다. 종이와 손 사이의 압력 과정이 묘미이다. 인간은 몇 개의 씨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것은 글씨, 말씨, 맵씨, 솜씨이다. 씨는 가꾸어지고 인고(忍苦)의 아픔을 거처 전혀 다른 얼굴이된다. 글씨처럼 말씨와 맵씨, 그리고 솜씨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것이다. 이승태 요리는 인간만 만드는 행위이다.
바로 “호모 코쿠엔스”(Homo coquens )이다. 제사나 혼례, 토지 매매 때 요리는 음식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믿는다”, “멋있다”는 “먹는다”는 말과 함께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의식주는 성욕, 그리고 거룩과 함께 인간의 본능이다. 한국 말에는 먹는다는 독특한 표현들이 많다. 나이도 먹고 마음도 먹고 귀도 먹고 심지어 겁도 먹는다. 오죽하면 욕도 먹을까. 인간의 에덴 동산 추방은 바로 먹는 것에서 시작된다. 언약의 존재를 위한 전환의 현장에서 음식은 요리된다. 광야 훈련의 백미는 바로 만나를 먹는 것이다. 언약궤 곁에 차려진 음식은 먹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예수는 생애 마지막 날 밤에 그의 제자들과 음식을 나눈다. 심지어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위해 그는 조반을 요리하신다. 그 금단의 열매는 마침내 제공되면서 긴 여정은 끝을 맺는다. 요리는 칼과 불을 통과함으로 또 다른 진가를 드러낸다. 요리는 과학과 예술을 만나는 흔적이다. 깨달음을 통하여 철학과 신앙을 담는다. 요리는 곧 사랑과 행복, 꿈을 만드는 것이다 믿음은 시간과 공간,그리고 관계를 가지고 또 다른 불에서 요리된다. 은혜의 사람은 지혜와 용기, 생각과 성실, 그리고 아름다움과 향기를 요리하는 사람들이다. 이승태 인간만 유일하게 기계를 만든다.
가장 고급화 된 기계는 인공지능이다. 인간의 건강과 수명, 선택과 탐사,행복과 사랑에 자신보다 앞서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그것은 경쟁자를 넘어 지배자로 다가오고 있다. 고대 동양에서의 주자학은 운명론 같지만 사실은 통계학이다. 인공지능도 통계학적 기능을 하고 있다. 운명론도 개선될 수 있다는 것이 현실 아닌가. 인공지능도 인간처럼 정보 입력과 출력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둘은 모두 계속해서 배움을 반복하며 발전한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인간과 다르게 좌절이나 실수는 없다. 단지 “ 오류”가 있을 뿐 배신은 없다. 그러기에 입력된 상처를 출력은 하지만 그 자체에 상처는 없다. 이제 인공지능은 인간의 차원을 넘어 초인간적 경지에서 인간에게 화와 복으로 반응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인간됨은 다른 생물보다 힘이나 속도, 그리고 오감이 우월함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때로 어린이 발표회에서 부모님들의 렌즈의 각도를 본다. 그들 촛점은 누가 잘 생겼나, 누가 발표를 더 잘 하는가에 있지 않다. 당신의 피와 살이 이어지면 못난이일지다도 그들에게 눈을 떼지 못한다. 인간은 그 입력자의 공의와 긍휼의 대상이라는 사실이 가치이다. 이것은 인공지능에게 양보하거나 빼앗길 수 없는 관계이다. 만일 이 사실에 눈물이 없다면 이보다 더 불행한 사실이 어디 있으랴. 이승태 인간만큼 순서에 의미를 두는 동물은 없다.
인간은 서열을 만들고 서열에 적응하며 서열에 저항하여 마침내 서열의 꼭대기에 홀로 우뚝 설 수 있다. 서열은 성취와 안전을 위한 도구이며 또한 상처와 위험의 장치이다. 인간은 평등을 원하면서 또한 차별을 원한다. 서열을 위하여 가난과 아픔은 역전의 기회를 만든다.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이다. 서열이란 “갈래” 혹 “가지”의 뜻이 있다. 시간적 의미에서 공간적 의미로 발전된다. 그것은 관계성의 위치이다. 거기서 중요한 자세는 성실(誠實)이다. 성실의 원천은 “말씀”을 실행하는 결실이다. 성실을 시간과 공간과 인간성 없이 입증할 수 있을까?. 현대는 “대리(代理)”의 시대이지만 성실은 대리로는 불가능하다. 현대는 첨단 과학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성실이 그리운 시대이다. 성실이란 요령과 반대되는 태도이기도 하다. 성실은 느린 것 같지만 윤택한 서열을 오래 유지시켜준다. 히브리어 성실의 어근은 “아만”이며 “충성”, “신뢰”, “진리”와 같은 뿌리이다. 그것은 실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이승태 인간만 스포츠를 만든다.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이기 때문이리라.
그것은 육체와 의지, 과학과 예술, 산업과 경제, 정치와 종교의 합작품이다. 스포츠는 까다로운 규칙,혹독할 만큼의 훈련과 고도의 절제가 뒷바침된다. 스포츠는 땀과 눈물과 피흘린 만큼의 재능이 발휘되는 기회이다 긴 시간에 쌓은 모든 것은 정해진 곳에서 정해진 때에만 국한된다. 무엇보다 스포츠의 매력은 예측불가의 결과이다. 눈물과 환희, 실패와 승리, 탈락과 영광은 마지막까지 감추어져있다. 그리고 그 결과 다음에는 반드시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 스포츠에 대한 매력은 그 경기의 규칙을 배우는 것이 기본이다. 온 국민을 열광으로 뒤흔들어놓는 것도 스포츠가 아닌가. 삶과 행복과 신앙의 여정 역시 스포츠와 맥락을 같이한다. 인간관계 뿐 아니라 행복과 신앙에도 규칙과 시련이 있다. 그리고 예측 불가의 결과 뿐 아니라 반드시 보상도 있다.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리라”고 시인은 노래한다. “너희도 상을 받도록 달음질하라”고 사도는 격려한다 인생의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예수의 사람은 면류관을 확신한다. 그래서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 비록 지금은 외롭고 어둡고 험난하여 불확실해 보일지라도-. 이승태 인간만 길을 만든다.
길은 다시 역사가 되고 문화가 된다. 그리고 전쟁이되고 종교가 된다. 길은 너와 나를 이어주는 관이며 줄이며 다리이다. 인간의 몸은 물길이며 손과 눈도 길이요 줄이다. 그리고 숨길이나 황혼길과 꿈길로 엮어진다. 길은 인간의 숱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길에서 만나고 헤어진다. 그리고 여기서 울고 웃는다. 길에서 떠나고 길로 돌아온다. 사랑도 미움도 길에서 일어난다. 길에서 시작하고 길에서 마친다. 길에서 기다리고 길에서 떠나 보낸다. 길의 성서적 어휘는 행위, 습관, 도리, 풍속 심지어 여인의 생리도 포함한다. 길은 본질이고 미덕이며 또한 명령이다. 에덴 동산에는 생명나무의 길이 있다. “여호와의 길”을 떠나는 사람도 있고 그 길을 지키는 사람도 있다. 예수님은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선언하신다. 이 셋의 공통점은 생략하거나 피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에게 길은 필수이며 길은 선택이다. 그리고 길은 인간의 운명을 좌우한다. 오늘도 인간은 길을 만든다. 또한 그 길을 만나서 살아간다. 그리고 돌아오지 못하는 그 길을 간다. 이승태 인간만 바퀴를 궁리하고 활용한다
바퀴는 마찰을 줄여주고 유동성과 순발력과 기동력이 뛰어나다. 인간은 이미 포스트 바퀴 시대에 살고 있다. 바퀴와 신앙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3 000 여 년 전 이미 제단 기구에까지 바퀴가 등장한다. 그리고 어느 날 포로가 된 한 선지자가 환상을 목격한다. 그룹들과 네 바퀴가 연결된 네 생물들의 모습이다. 그 바퀴 속에 바퀴가 있다. 그리고 그 바퀴 둘레에 눈이 가득하다. 그리고 생물의 영이 그 바퀴 속에서 조절한다. 그 생물들이 멈출 때나 날아갈 때나 분리되지 않고 행동을 같이한다. 그것은 절대자의 존재와 그의 위치, 그리고 그의 활동성을 말한다. 그것은 절망과 갈등의 상황에 새로운 희망의 메세지이다. 모든 새로운 것 속에는 기대와 불안, 그리고 비움과 용기도 함께 가지고 온다. 믿음의 사역은 각기 그 위치와 모양과 역활이 다르다. 그리고 그 역활의 시기와 상황, 내용도 바뀐다. 그러나 반드시 일치해야 하는 것이 있다. 모든 역활은 운전의 동력과 함께 실핏줄처럼 하나로 연결되어야 한다. 기회는 준비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회는 언제나 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똑 같은 기회는 없다. 이승태 인간이 찾아낸 가장 위대한 것 가운데 하나는 불이다.
다른 생물들은 불을 피할 뿐 아니라 두려워한다. 그러나 인간은 불로 어둠을 극복하고 양식을 요리하고 추위나 맹수로 부터 자신을 보호한다. 불로 태워 불순물을 없애고 순수함을 얻어낸다. 봉화로 상황을 알리고 불로 몸을 치료하기도 한다. 흙이 아름다운 자기(磁器)가 되는 것도 불을 통과한 탓이다. 옛날 화로는 추위를 극복하는 경제적 수단이였지만 가족의 화합과 세대간의 소통을 위한 꿈의 공간이기도 하였다. 인간에게 불은 심지어 숭배의 자리까지 차지한다. 그러나 인간은 불로 화병도 겪는다. 성경은 끊임없이 불의 이야기로 엮여져 있다. 에덴동산을 지키는 불칼에서 부터. 불기둥, 불뱀, 제단의 불, 불수레, 풀무 불, 불의 혀, 불 유리바다, 심지어 “여호와는 맹렬한 불”이다. 삶과 신앙에 불은 필수의 원동력이다. 냉기가 흐르는 만남, 사랑, 섬김은 죽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불은 여전히 위험한 도구이다. 통제를 벗어나서 위치를 이탈한 불은 재앙이다. 은혜의 도구와 파멸의 도구는 다른 것이 아니다. 이승태 화폐는 인간만 사용하는 독특한 수단이다.
인간이 돈을 만들었것만 돈이 인간을 만들기도 한다. 돈이란 인간의 꿈과 행복, 그리고 가치의 저장이기도 하다. 돈은 교환 수단이며 임무와 보상에 대한 약속이다. 돈이 인간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면 신앙과 돈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성경에는 돈 이야기가 의외로 많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도 돈 언급은 흔하게 나타난다. 특히 천국을 돈과 비유하며 가르치시지 않는가. “네 보물이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우리 현실을 해부하신다. 그러면서도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은 신앙과 돈의 우선 순위에 대한 경고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 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6:10)고 가르친다. 자기가 판 땅 값으로 성령을 속였다가 혼이 떠나간 부부가 등장한다. 돈은 아주 유효하고 편리하면서도 아주 위험한 도구이다. 돈은 내가 몸으로 갈 수 없는 곳에 대신 가기도 하고 내가 몸으로 할 수 없는 역활을 대신 하기도 한다. 화폐는 현찰에서 가상 화폐로까지 그 변화를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돈에 대한 용도 또한 변화해 갈 수 있겠다. 나는 어떻게 돈을 부리며 살아야하나? 가능하면 자신을 위한 특혜에는 느리게, 약하게 그리고 인색하게, 남을 위하여는 우선적으로 흔쾌히 후하게 살 수는 없을까. 자신에게 만족하면서 남에게도 넉넉하게 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승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