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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서신

사진과 인간

9/26/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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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인간을 제외하고 도대체 누가 사진을 만드는가?.
인간은 무엇인가 남기려는 본능으로 시간과 아름다움을  그려왔다.
연필과 렌즈는 드러내고 간직하게 한다.
 
사진은 찍는 자신의 발견이다.
사진은 자신의 선택이며 그 사실과 자신을 일치시킨다.
사진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작업이다.
자신의 꿈을 담는 행위이며   소리 없는 웅변을 만든다.
그것은 역사이며 또한 무기이다.
 
가난한 사진에는 행복이 담겨있다.
슬픈 사진에는 오히려 분노가 담긴다.
사진은 시간을 붙들어 놓은 순간이다.
그것은 현재가 과거와 나누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잃어버린 것을 그리워하는 동작이다.
 
인간이 남기고 싶은 것을 담아 놓은 그릇이 사진이다.
추억은 재산보다 무겁고 명예보다 빛날 수 있다
사진처럼 목소리나 연필로 추억을 찍을 때이다.
나중에 누군가 환호할 것이며 통곡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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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인간

9/19/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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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세상을 떠났다”.  “돌아가셨다”. 
그 이외에 죽음에 대한 표현은 
십 여가지가 넘는다.
 
그러나 이 엄연한 사실도
 자신의 죽음은 받아들이기도 어렵고
예측하기도 어렵다.
그것을 인식할 때는 인간은
두려움과 반대로 강한 소망을 붙들게 된다.
그림
동물도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 작별의 순간에 진지해지고  눈물을 흘린다.
 
성경은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워준다.
 전체에 약1720여 번이나 나타난다. 매 2장마다 약 3번씩 언급되는 셈이다.
그러나 그것을 끝으로 하지 않는다. 그 후에 반드시 아름다운 만남을 약속한다.
인간에게 영원한 만남이란 없다. 영원한 이별 또한 없어야 행복한 만남이다.
죽음이란 하나의 작별이며 그리고 다른 하나의 만남이다.
“어떻게 사느냐?”는 “어떻게 죽느냐?”와 같은 질문이다.
최고의 감동을 주는 작품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가장 정직하고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거룩하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게 하는 동기는 죽는다는 사실이다.
빼앗긴 병사의 죽음을 자기 고국으로  찾아오는 나라는 훌륭한 나라이다.
한 인간의 죽음의 가치는 누구를 위하여 희생하였나로 평가된다.
 
죽음은 허무와 영광을 구별한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흙은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인간 최고의 지혜가 여기있다.
그리고 돌아갈 집이 있고 낯설지 않게 만날 관계가 있음이 최고의 복이다.

이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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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과 인간

9/12/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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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최초로  주어진 작업은
바로 사물의 이름 짓기이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창조하거나 만드는 것과
다른 차원의 동작이다.
“집을 짓는다”.  “밥을 짓는다”는 말이
활동에 촛점이 맞춘 것이라면
이름을 짖는다는 것은 관계 형성을 뜻한다.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에서나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는
바로 너와 나의 관계를 사모하는 애절함이다.
그림
​성경에는 이름이 바꾸어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고 시몬이 베드로가 된다. 사울이 바울이 된다.
바울은 “작은 자”를 말하며 이전 이름과는 정반대 뜻이다.
이름은 그의 존재이며 가치이고 아울러 정체이며 특권도 담겨있다.
사람만이 아니라 머물렀던 자리까지 다른 이름으로 불려진다.
혼자서 밤을 보내던 그 들판은 “벧엘”(“하나님의 집”)이 된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역활에는 이름이 주어진다.
아울러 그 이름에 맞는 사고와 행동, 그리고 언어의 책임이 따른다.
한자의 “이름”은 “명”(名)으로 “저녁의 언어”라고 할까?.
저녁은 생체 리듬 상 활동이 아닌 생각하고 반추하는 시간이다.
 
코비드 19는 누구나 부르는 바이러스 질병 이름이다.
이 질병 속에는 나만이 불러줄 수 있는 이름이 숨겨져 있다.
다른 눈, 다른 귀, 다른 입으로 다가 갈 것이다.
그 때 엄청난 환희와 치유 그리고 자유가 치솟으리라.
내가 무엇이라 불러줄런지를 그것은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이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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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복과 인간

9/7/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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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인간을 제외하고 옷을 입는 존재가 또 있는가?.
인간이 세상과 만나는 그 순간에  처음으로 주어지는 것은 옷이다.
그리고 이세상과 마지막 작별할 때 역시 새로운 옷이 주어진다.
 
옷은 구체적으로 신체 보호하고 그리고 신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노출과 숨김의 얇은 경계를 통하여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것 역시 옷이다.
옷은 자신의 개성을 말하는 또 다른 언어이다.
옷은 그 사람의 사회적 역활과 신분을 말하기도 한다.
 “옷을 벗는다”는 것은 그 위치와 역활에서 물러난다는 표현이기도하다.
 
 “옷을 입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모방 또는 동일시하려는 심리이기도하다.
어린 아들이 어느 날 아버지의 옷을 걸치게 되는 것이나
어린 딸이 엄마의 구두를 끌거나 손가방을 걸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인간은 마음의 결단과 성장, 그리고 삶의 큰 전환의 시점에서 옷을 바꾸어 입는다.
 
인간이 최초로 옷을 걸치게 된 것은 부끄러움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그 극복을 위하여 자신이 감춘 것 대신에 새로운 옷이 주어진다.
그것은 다른 한 생명이 희생된 피의 옷이다.
 
성경은 줄곳 옷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옷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성경은 옛 습관을 벗어버리고  거룩한 새 사람을 입으라고 당부한다.
옷은 날개의 경지를 뛰어넘어 죽느냐? 사느냐를 구별하기도 한다.
옷은 인생에서 거룩한 운명을 만든다.
한 조각 한 조각 깨끗한  세마포 행실로  신부의 옷을 짜고있는 벗을 생각하면서-,
 
이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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