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아들에게 위임된 권위 (마 21:33-44)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3년 가까운 공생애를 마무리하시고, 드디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지시는 시기가 가까워 올수록 유대인들과 첨예하게 갈등하셨습니다. 그 분은 마치 죽기 위해서 작정하신 분같이 그들과 대립하셨습니다. 때론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날이 서서, 마치 정치권에서 서로 싸우는 듯한 말들이 떠오를 정도입니다. 마태복음 21장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그 분은 초라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하며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렇게 들어오신 예수님이 처음으로 한 행동은, 그 곳 성전에서 장사하고 돈 바꿔 주는 사람들을 쫓아 내신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 지도자들이 승인해 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 행동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분노를 샀습니다. 다음 날 아침 예수께서 다시 성에 들어오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자, 그들이 예수께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들은 단순히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라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라고 되물으셨습니다. 그들이 “모르겠다.” 고 하자, 예수께서도 자신이 무슨 권세로 이 일들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의 말씀을 연속해서 해 주시고, 오늘 본문은 그 중 두 번째 비유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우회적 답변입니다. 이 비유는 특별히 예수님께서 유대 지도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신 것이 확실합니다. 그것은 이 비유의 곳곳에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성경 말씀을 포함하셨기 때문입니다. 먼저,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사 5:1-7) 근데, 한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그럼 과연 이 악한 소작인들이 누구냐 하는 문제입니다. 렘 35:15에 보면, 구약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돌이키시기 위해 자신의 예언자들을 끊임없이 보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잔혹하게 죽여왔습니다. 그 행동들이 악한 소작인들의 행동과 너무나 똑같습니다. (35절) 예수님은 그들이 이 악한 소작인들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직 이 비유를 해석하는 가장 큰 난관이 남아 있습니다. 바로, 그 주인의 ‘아들’이 누구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 아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그 아들은 이 포도밭에 대한 상속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38절) 아들은 이 주인의 전부였습니다. 주인은 이 포도밭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걸었습니다. 따라서, 이 아들은 주인의 화해의 마지막 수단이었습니다. 만약, 아들마저 그들이 죽인다면 그들에게는 화해의 마지막 기회가 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갖고 계신 성품이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영원히 참기만 하는 분은 아니십니다. (벧후 3:9-10) 둘째, 아들의 처음 모습과 나중 모습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처음 이 아들은 악한 소작인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조금은 무기력해 보이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나중 모습은 이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42b, 44절) 이 말씀은 구약 시편 118:22-23과 이사야 8:14-15, 다니엘 2:44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그 아들의 마지막은 그를 대적하는 모든 자들을 깨뜨리고 부숴 멸망시키는 공의의 심판자의 모습입니다. 이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어마 어마한 도전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수님이 진짜 권위자고, 그들은 그 권위를 훔치려는 거짓 권위자들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유대인들 마음 속에 예수님을 죽이려는 생각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께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이 될 것이라고 예수님이 강조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도 아직 회개로의 기회는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이 니고데모입니다. 예수님께서 책망의 말씀을 해 주고 계시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심판의 길을 선택합니다. 왜냐면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지위를 버릴 마음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메시아에 대한 해석도 재고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대접받기 좋아하고, 이중적이었고, 이스라엘에 대해 권위자 행세를 해 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내가 누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들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위탁받은 청지기들일 뿐입니다. 이 마음 간직하시는 겸손한 청지기의 사명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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