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서로 사랑하라
본문: 요한복음 13:34-35 얼마전 유투브에서 짧은 영상을 보았는데 인간의 뇌가 죽음이 임박하면 특정 뇌파를 발생시켜서 과거의 삶의 기억을 되살리게 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음 앞에서는 누구든지 겸허하게 가장 본질적인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본인이 언제 죽음을 겪으실 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 마지막 순간을 제자들과 함께 보내시면서 주님은 그들에게 성찬과 세족을 베푸셨습니다. 이로써 그들이 하나로 연합된 공동체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어서 처음으로 당부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그렇다면 이 계명은 교회가 공동체성을 유지하는데 핵심적인 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을 기록한 요한은 훗날 기록한 서신서에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라고 그는 강조합니다. 이 말씀을 모르는 성도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의 어려움을 겪는 분들 중에는 성도님들에게서 받는 상처 때문에 괴로워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가 이를 직시할 때 비로서 예수님의 유언적 당부의 말씀을 더 잘 살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는데 큰 걸림돌이 되는 것들 중에는 ‘다름’과 ‘미성숙’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생각도, 기질도, 배경도, 삶의 우선순위도 모두 다릅니다. 그래도 요즘은 MBTI나 애니어그램과 같은 성격테스트가 보편화 되면서 나와 다른 부류의 사람을 인정하고 수용하기가 예전보다는 많이 수월해졌습니다. 성격의 다름 때문에 고민이 많으십니까? 이 말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름은 극복하면 복이 됩니다. 또 하나는 각자의 성숙의 정도가 다릅니다. 그래서 나와 다른 성격의 사람이 성숙도도 차이가 날 때 함께 관계하기가 꽤 힘들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성숙한 사람과 미성숙한 사람 간의 관계에 대한 성경의 원리는 먼저 성숙한 사람이 미성숙한 사람을 품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처받기도 하고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이 계명에 대해 스스로 타협의 마음을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일반적인 말씀으로만 받아들이고 그럴 수 없는 케이스들을 만들어서 스스로 타협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마음이 맞을 수도 있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계속 타협의 마음을 주장하는 한 우리 자신과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사랑의 공동체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신데 이미 마음 속에서 상대방을 배제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세보다는 겸손히 하나님께 내려놓고 지혜를 구하는 것이 더 옳은 태도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몇 가지 기준을 제시해 주고 계십니다. 그 첫번째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입니다. 사실, 이 원리만 우리가 진실되게 묵상하면 내 안의 타협의 목소리는 모두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는 우리가 말 안 해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할 수 있는 한 남을 사랑하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의 모습을 닮으려 애를 쓴다면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악인과 불의한 자에게도 해와 비를 동일하게 내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악한 자일지라도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서기 전까지는 기다려 주시고, 또 기회를 주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마음을 우리가 조금 더 알게 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대견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분은 그런 본을 보이셨기에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요구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원수는 아니더라도 나와 다른 사람, 나보다 조금 덜 성숙한 사람은 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예수님 따르는 제자의 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에 있는 남을 판단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어떻게 극복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둘째,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랑을 성령의 열매라로 말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내 의지나 결심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의지도 필요하지만 그것 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성령님이 내 안에 충만히 거하시고 내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 때만 우리의 죄성을 뛰어 넘어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에 겸손히 순복하고, 남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어려운 우리의 마음까지도 솔직히 꺼내 놓으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하기 원하시는지를 보여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수고입니다. 한국 기독교가 자랑하는 손양원 목사님은 한센병 환자들의 환부를 빨아 고름을 제거해 주었습니다. 그 분은 자기 아들 둘을 죽인 자를 회개시켜 양자로 삼으셨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사랑이 그 안에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뿌리가 이런 사랑의 기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비하면 우리가 고민하는 것들이 얼마나 작고 개인적인 것인지 돌아보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의 당부는 주님의 유언과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실제적으로 살아낼 때 비로서 사람들이 우리를 주님의 제자라고 부를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넘치는 Psalm 공동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 질문 1. 남이 나와 다름이 복이라고 느끼신 경험이 있으신가요? 함께 나눠 보세요. 2. ‘남을 내 마음에서 완전히 접어버린 경우’와 ‘한시적으로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는 경우’가 어떻게 다를까요? 3. 서로 사랑하는데 내가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통해 새롭게 결심한 부분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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