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바울의 회심
본문: 행9:1-7 여러분은 혹시 생일날 아무도 안 알아줘서 섭섭했다가 나중에 서프라이즈 축하받아서 눈물나게 고마운 적 있었나요? 우리는 왜 생일을 이렇게 소중하게 생각할까요?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나온 뜻깊은 날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영적 생일은 언제입니까?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 날이 바로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날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바울 개인에게뿐만 아니라 교회사적으로 봐도 큰 획을 긋는 기념비적인 사건이 됩니다. 사울(바울)은 다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최고의 교육 도시에서 지성을 키웠습니다. 후에 그의 부모님은 그를 예루살렘으로 데려가서 가말리엘이라는 당대 최고의 랍비 밑에서 율법을 배우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그는 유대교와 헬레니즘과 라틴문화에 정통하고,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라틴어에 능통한 유능한 젊은이로 자랐습니다. 이런 배경은 오히려 그가 기독교를 반대하고 예수를 적대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의 제한된 율법적 지식으로 볼 때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며, 기독교는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해치는 이단으로 오해되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 사건 이후 교인들이 핍박에 못 이겨 흩어졌는데, 오히려 이것을 계기로 더 넓은 곳에 기독교가 전파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울은 이것에 분노하여,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원하여 기독교인들을 체포하기로 결심하고 이를 위해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서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 떄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은 이미 완전한 하나님의 영광을 입으신 상태셨기 때문에, 태양빛보다도 더 밝은 빛과 함께 나타나셨습니다. 그 빛에 사울은 땅에 고꾸라졌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26장에 보면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는 저항할수록 자기만 고생스럽다는 뜻입니다. 이어 주님은 사울에게 다메섹의 직가라는 거리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거기서 그는 주님이 예비하신 아나니아를 만나게 됩니다. 아나니아는 다메섹의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한 자를 죽이러 오던 인물이 사울인데, 하나님은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안수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동시에 사울에게도 아나니아라는 자가 와서 안수하면 다시 보게 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일은 둘 다 기도하는 중에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신뢰하지 못하였지만, 주님이 그를 택한 그릇이라고 말씀하시자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순종합니다. 그래서 그는 사울에게 가서 안수와 세례를 베풀고 형제로서 그를 대합니다. 순종의 사람을 통해 사울은 새 사람이 됩니다. 다메섹 사건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세 가지 중요한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이 사건에서 바울이 한 역할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울을 찾아왔습니다. 아나니아를 준비시키신 것도 주님이셨습니다. 예수 믿는 자를 죽이려 가고 있는 사울을 주께서 찾아 오신 것은 “은혜”가 아니고서는 그 어떤 말로도 설명이 불가합니다. 이것을 너무 잘 알고 있던 바울은 ‘모든 것이 은혜’임을 반복해서 고백했던 것입니다. (엡3:8, 갈1:15, 고전15:10) 이처럼 바울은 다메섹 사건을 기억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깊이 깊이 침잠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둘째, 사도 바울은 이날을 계기로 완전한 변화를 받았고, 초지일관 변화된 삶을 살아냈다는 점입니다. 그날 이후 그는 180도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극적인 변화를 받을 수 있었던 건 다메섹 사건 자체가 워낙 센세이셔널한 것도 있지만, 그가 이 사건을 굉장히 겸손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그가 열린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평생의 신념과 철학을 바꾸도록 도전하셨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기적을 경험해도 평생의 신념은 잘 안바뀝니다. 하지만 사울은 겸손하게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평생의 신념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채 오직 하나님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그 때, 아나니아를 통해 주께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고, 앞으로 많은 고난을 받게 될 것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평생의 소명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태도가 그를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혁시켰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초지일관 그 마음과 태도를 평생 유지했다는 점입니다. 그에게 다메섹 사건은 영적 삶의 출발점(Ground Zero)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힘들고, 핍박받고, 흔들릴 때마다 바울은 다메섹 사건을 회상하며 다시금 영적인 중심을 잡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은 닻을 내린 배와 같이 파도에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셋째, 바울은 이 사건을 감격과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이 사건을 언급할 때마다 감격스러워했습니다. 그 날이 그의 ‘인생 사명 받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내 삶의 목적을 깨달은 자가 가장 행복한 자입니다. 인생 최대의 기쁨은 내 소명 끝까지 감당했을 때 느껴지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많은 고난 속에서도 다메섹을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진정한 기쁨이 있는 삶, 세상이 줄 수도 없는 진정한 소망이 있는 삶, 이런 진짜 승리자의 삶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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