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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앙의 기초 “5” 성령을 좇는 삶
본문: 살전 1:2-7 그리스도인이 되면 믿지 않을 때와 가장 차이가 나는 것은 인생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세상은인생을 자기 주도적으로 살라고 가르치지만, 성경은 사람의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주의 자녀들의 삶이 열매 맺으시도록 동행하시고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이처럼 진정한 신앙인이 되면 자기 인생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내려놓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살게 됩니다. 여기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개념을 구분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세례는 성령님이 내 안에 내주하셔서 예수님이 믿어지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반면, 성령충만은 내 안에 성령님이 차고 넘쳐서 특정한 사역을 감당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보통 성령세례를 받으면 자연스럽게 성령충만으로 연결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삶에 찌들어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말씀과 기도생활을 중단하면 영적으로 곤고해지게 됩니다. 결국, 성령을 좇는 삶이란 성령 충만을 좇는 삶입니다. 성령충만한 상태는 성령의 음성이 내 생각, 사탄의 속임수, 세상의 유혹보다 크게 들리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삶을 결정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핵심적인데, 하나는 성령으로 충만히 채우는 것이요, 둘째는 채운 성령을 쏟아내지 않는 것입니다. 첫째, 채우라 – “말씀과 기도에 헌신하라.” 초대교회가 성령 충만을 유지한 비결은 그들이 말씀과 기도에 전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도들의 ‘생생한’ 말씀을 듣고, 오로지 기도에 전념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충만한 영적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공동체에서 성령충만을 경험하라.” 동시에 초대교회는 공동체가 함께 성령충만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들은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떡을 떼었으며, 한 마음으로 모여 하나님을 찬미하였고,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습니다. 성도 간에는 진정한 권면과 순종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너나 할 것없이 모두가 성령충만을 함께 누렸습니다. 그랬기에 혹독한 로마의 박해 속에서도 오히려 왕성히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공동체에는 다양한 은혜를 나누기 때문에 성령의 은혜가 배가되며, 하나님의 역사가 선명하여 모두에게 영적 갈망이 생겨납니다. 힘든 일을 만나면 위로와 힘을 주고, 잘못된 길로 가는 지체를 권면하여 세워줍니다. 좁은 문을 가야 하는 신앙인들이 동행의 기쁨을 누리며 그 길을 완주할 수 있기 위해서는 좋은 공동체가 필수입니다. 사도바울이 세운 데살로니가 교회는 성령충만하고 흠이 없어 칭찬들은 대표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끊이지 않는 공동체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주변의 핍박을 이겨내고 주변에 신앙의 귀한 본이 되었습니다. 둘째, 지키라 – “포도밭의 여우를 잡으라.” 아가서가 말하는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와 삶의 열매를 허무는 존재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무너뜨리는 작은 여우들이 있습니다. 먼저,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이 오면 아무런 이유 없이 한 순간 땅이 흔들리고 풍랑이 나를 쥐어 흔들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고난이 오면 죄책감에 눌리거나 섭섭함에 빠지기 쉽습니다. 둘 다 영적으로 우리를 마비시켜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 만듭니다. 이 때, 기억할 것은 고난이 반드시 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생에게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을 주시고 스스로 해석이 안 되는 상황 속에 던져 놓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의지하던 세상의 것들을 완전히 포기하면 거기서부터 조금씩 하나님의 해석을 주십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신뢰해야 견딜 수 있습니다. 고난을 통과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우리가 쥐고 있었던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다 놓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삶의 새로운 우선순위를 주십니다. 고난의 끝에는 많은 영적 유익과 성숙이 있습니다. 낙심은 강한 용사로 겁쟁이로 만드는 무서운 병입니다. 갈멜산의 엘리야는 850명의 거짓 선지자와 대결한 영적 거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낙심하여 도망쳐간 호렙산의 엘리야는 ‘나를 죽여달라’고 외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 급격한 변화는 그가 낙심하였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낙심은 사탄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낙심되면 사탄의 거짓말에 속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그때부터 회복이 시작됩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우리가 낙심에 빠지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은 돌아온 우리를 깊이 위로하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가 새로운 용기를 내도록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섭섭함은 하나님께 분을 내게 하며, 심지어 사람도 죽이기도 하는 무서운 마음의 병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을 때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결국, 그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아벨을 죽이는 인류의 첫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가인이 믿음 없는 제물, 선하지 않은 제물을 드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히11:4, 창4:7) 섭섭함은 비교의식과 자기연민과 함께 옵니다. 하나님은 편애하시지 않으시나, 각 그릇의 크기와 용도는 차별하십니다. 인간은 그것을 하나님의 편애로 오해합니다. 따라서 비교의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안에서 각자가 가장 귀한 존재임을 믿고, 각자에게 주신 길을 뚜벅 뚜벅 가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연민은 자신의 죄를 망각하게 만듭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믿음의 제물을 드리지 않은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이 편애하신 하나님의 문제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주께서 자기 제사를 함부로 대하셨으니 자기도 하나님께 함부로 대하기로 잘못 결정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내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회복의 시작입니다. 우리 내면에 이러한 여우를 발견하면 우리는 최대한 빨리 하나님과 깊은 대화의 장소로 나아가야 합니다. 거기서 내 마음이 왜 무너졌는지 하나님께 완전히 털어놓아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을 잡고 다시금 일어서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충만을 지키는 비결입니다. 이처럼 성령을 충만히 채우고, 채워진 성령을 잘 관리함으로 성령님이 우리 삶을 친히 인도하시는 복된 인생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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