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소망 (시 39:5-12)
최근 제가 병원에서 임종이 가까운 사람들을 영적으로 케어하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여러 케이스들을 리뷰하는 중 제 마음을 터치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마흔 여덟의 한 농부였는데, 그는 미혼에 가족도 없이 홀로 큰 담배농장을 꾸리며 살아왔습니다. 땅땅한 체격에 터프한 외모를 가졌고 말 수가 적었습니다. 사실 글도 못 읽고 많이 못 배워서 자기 감정도 잘 표현할 줄 모르는 그가 악성 혈관 질환이 생겨서 큰 수술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은 아직 죽을 준비가 되지 않았고, 이렇게 병원에서 말고 자연스럽게 죽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집에 돌아가도 아무도 반겨줄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저 힘든 농장일만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체념 섞인 이야기를 합니다. 그를 상대한 원목은 20대의 젊은 신학교를 마친 분이셨는데, 안타깝게 그는 이 환자분과 어떠한 감정적,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합니다. 그는 그저 이 환자분은 별다른 영적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넘어 갑니다. 그런데, 안타깝게 그 환자분은 머지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 케이스를 보면서 소망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피부로 느꼈습니다. 소망이 없는 삶은 죽은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소망이 우리 인간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지 강조합니다. 그럼, 성경은 우리에게 소망이 회복되기 위해서 어떻게 하라고 말씀합니까? 두 단계로 나누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첫번째는 우리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소망을 하나님께 둔다면 큰 좌절과 실망 속에서도 소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께 근거한 소망은 모든 것을 이깁니다. (다니엘, 초대교인, Spafford 장로님)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를 세상은 결코 흔들 수 없습니다. (롬 8:35, 37) 시편 39편은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다윗은 실수가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다윗의 실패 경험이 그를 완전히 망하게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다윗은 이 시를 아마도 압살롬에게 쫓겨서 피난갔을 때 쓴 것으로 보입니다. (10-11절) 다윗은 이 경험을 통해 인생이 아닌 것을, 자기가 왕으로 든든히 섰을 때조차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특히, 자신을 왕으로 추대한 사람들, 부하들, 재물도 자신을 지킬 수 없는 것들임을 깨닫습니다. 이 때, 그는,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우리 주님밖엔 없습니다. 다윗이 담담이 징계를 받은 것도, 그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징계받는 모든 과정 중에 오로지 하나님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겸손히 주님께 “주의 징벌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라고 간구합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하나님께만 소망을 둔 다윗을 우리 주님은 다시 받아 주셨습니다. 소망의 다음 단계는 하나님이 직접 새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때 주시는 하나님의 소망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비전과 소망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 회복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는 것에도 관심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 땅 가운데서 정당한 대우를 받고, 일에서 보람을 찾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영이 회복되면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비전과 소망들을 부어 주십니다. 그런데, 한 번 자신의 소망을 하나님께 확실히 뿌리내린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상의 축복을 부어 주셔도 다시 흔들리지 않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징계의 때가 다 지나게 되자, 하나님은 그를 압살롬보다 더 강하게 하셨고, 다시금 그의 왕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축복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지을 모든 준비도 마치셨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자손에서 메시아가 나오는 언약도 성취해 주셨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에게 소망이 있으신가요? 우리 주님께 모든 소망을 두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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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십니다. (마 1:13-17)
2022년 새 해가 밝았습니다. 청년 형제 자매님들 모두 풍성한 은혜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우리 사람들은 절기가 되면 지난 날을 돌아보며 감사하고, 다시금 앞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나님도 절기를 중시 여기심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근데 올 해의 시작은 그렇게 밝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Covid 19가 끊임없이 우리 삶을 부담스럽게 합니다. 이는 교회 공동체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피부로 실감하는 건 이상 기후입니다. 어제까지 어스틴은 70-80도의 유래없이 따뜻한 겨울이었다고오늘 기온이 20도 대로 떨어졌습니다. 불과 하루 사이에 50-60도가 떨어진 겁니다. 홍수, 가뭄, 산불, 수퍼 토네이도 같은 이상 기후에 우리 이웃들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세계가 힘을 합쳐야 하는데, 정치권을 보면 그런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일처럼 느껴집니다. 경제적 양극화도 큰 문제입니다. 우리가 사는 어스틴도 집값이 천정부지로 올라서, 이제는 집을 사지 못하거나 렌트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홈리스로 몰리게 되어 있습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이 가운데 계시는가?”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정말 세계가 이 모양이 되어가는 걸 왜 방치하시는가?” 저 역시 이 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오늘은 이런 제게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그 첫번째는, “흑암이 짖을수록 새벽은 가까와졌다.” 입니다. (행군 이야기) 오늘 본문말씀은 가장 어두웠던 시대를 살았던 다윗의 후손이요 예수님의 조상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 바빌론으로 끌려간 이후부터 다윗 가문은 더 이상 왕족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마1:12에 보면 여고냐라고도 불린 여호야긴 왕과 그 2대 자손까지 언급되었습니다. 그나마 이 들까지는 구약성경에 언급이 있습니다. 근데 13-15절에 나온 사람들은 성경에 한 번도 언급이 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그들은 바빌론에서 70년간 종살이를 고스란히 경험했을 것이고, 고레스 칙령 때 해방의 기쁨을 안고 고향에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향에서의 삶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이미 오래전부터 예언된 메시아도 보이지 않고, 반대로 그리스와 로마라는 강대국에 의해서 다시금 식민통치를 받는 상황에 몰렸습니다. 게다가 이 때는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도 없었고, 아무런 하나님의 말씀도 없는 영적 암흑기였습니다. 이들은 마치 새벽 4-5시쯤 자포자기한 상태로 무거운 군화발을 내딛는 군인들과 같이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 때, 예수 그리스도가 이들에게 오셨습니다. 그 예수는 예언과 같이 예루살렘뿐 아니라 전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왕으로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암흑과 같은 시간 동안에도 하나님은 성실하게 일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과 신학자들은 기독교 복음이 빠르게 전 세계에 전파된 배경에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그리스 언어와 철학입니다. 둘째는 로마의 발달된 도로와 교통수단입니다. 셋째는 유대인 디아스포라입니다. 하나님은 이 암흑기 동안에 복음 전파를 위한 최적의 조건들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두번째 주신 마음은, “너와 나는 공동 운명체다.” 입니다. 마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가르치신 후, 제자들에게 건너편 거라사 쪽으로 호수를 건너 가자고 하십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밤 4경= 새벽 3-6시) 가장 칠흙 같은 어둠의 시간에 큰 광풍이 불어 닥쳐 배가 크게 요동치고 파도는 이들을 삼킬 것같이 뱃머리를 칩니다. 성경은 그 물이 이미 배에 가득했다고 말합니다. 배가 침수되기 일보 직전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배의 뒤쪽편에서 베개를 베고 쿨쿨 주무십니다. 드디어 제자들이 예수를 흔들어 깨우고 자기들이 죽게 됐는데 모른 척만 하시냐고 소리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파도에게 고요하라! 잠잠하라! 고 명령하십니다. 호수가 곧 잔잔해 졌습니다. 이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게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제자들은 예수님도 한 배를 타고 계시다는 점을 놓쳤습니다. 예수님도 그 배에 함께 타고 계시기 때문에 배가 침몰하면 예수님도 함께 죽으십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공동 운명체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교회가, 이 지구환경이 이토록 문제가 심각해진다면 우린 어떻게 하는게 맞겠습니까? 예수님을 깨워서 도와 달라고 하든지, 예수님 곁에서 베게 베고 잠을 자든지 하면 됩니다. 중요한 건 예수님이 우리와 공동운명체라는 믿음을 갖고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분은 우리와 한 배를 타신 공동 운명체이십니다. 그 분은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아니하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 분은 절대로 우리를 버려 두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우리 소망의 근거입니다. 삶에 소망이 안보이십니까? 풍랑이 너무 거세어 정신을 못 차리시겠습니까? 예수님 붙잡으세요. 그러면 삽니다. 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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