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주의 이름으로 구하라
본문: 요한복음 14:12-14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며 이 생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말씀을 하시자, 제자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려는 지 반문합니다. 그들 마음 속에는 예수께서 얼마 전 말씀하신 대로 정말 죽으시려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주님 없이는 아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느꼈기 때문에 주님이 떠나시려는 것이 더더욱 어렵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며 나를 본 자는 그 길을 따라올 수 있다고 답하십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이 보시는 제자들과 스스로가 보는 제자들의 모습이 달랐을까요? 그 비결은 내주하심 (indwelling)에 달려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시면 그들은 홀로 남겨질 것이라고 느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항상 함께 하실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비밀이 바로 내주하심에 있습니다. 내주하시는 예수님은 단순히 그들과 함께 하시는(accompanying) 주님이 아니시고, 그들 안에 거하시는(indwelling) 주님이십니다. 제자들은 다소 생소하게 들었지만, 사실 이 비밀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연합의 근거이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 가운데 계실 동안 하나님의 영이 예수님 안에 충만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아버지가 아들 안에, 아들이 아버지 안에 계시는 상호 내주하심의 삶을 평생 사셨던 것입니다. 내주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운 사람을 기억하는 정도의 의미를 뛰어넘어 훨씬 더 강력하게 그 안에 거주하시고, 동행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 우리는 마치 에덴의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과 함께 걷고, 함께 대화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그 성령님이 제자들에게 임했을 때부터 이미 그들 안에는 예수님이 내주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약속하신 대로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그들과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시대가 개막되면서 하나님이 피조물과 함께 거하는 놀라운 내주의 신비는 이미 현재 진행형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경험하신 하나님과의 상호 내주하심의 놀라운 비밀을 이제 제자들에게 약속해 주셨고, 그 약속대로 보혜사가 그들에게 임했던 것입니다. 이로써 그들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입고 계셨던 육체의 시공간적 제약을 초월하여 항상 그들 안에 예수님이 거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신 더 큰 유익인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의 내주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환상도 자기최면도 아닌 실제적이며 실재하는 것이며, 그 근거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원주로 고백했다면 이미 성령님이 내 안에 내주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만, 성령님이 내 안에서 얼마나 활성화 되어있는 가는 상태는 다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순종하려 하면 점점 더 성령님의 임재가 분명해지고, 살아서 역사하며, 그 영향력의 범주가 넓어지지만, 자꾸만 성령의 소욕을 거부하고, 영적으로 둔감해지면 성령님의 임재가 흐릿해지며, 잠잠해지고, 그 범주도 좁아집니다. 이 때조차 성령님은 여전히 내주하십니다. 다만, 그 활성화 정도가 낮아진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활성화되면 창조주 하나님이 내주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피조물의 관점과 한계를 벗어나 창조주의 시각과 마음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주하심의 놀라운 비밀입니다. 이 말씀을 마치신 후, 주께서 제자들에게 권면하신 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인데요, 바로 “내 이름으로 구하라!” 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주를 믿으면 주가 하신 일도 할 것이요, 그보다 큰 일도 할 것이라고 아주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보이신 기적들은 단순히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게 하기 위함뿐만 아니라,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일들을 믿음 안에서 할 수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한 목적도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를 주님은 두 가지로 설명해 주십니다. 첫째, 예수 이름으로 구하면 예수께서 직접 행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예수 이름으로 구한 간구에 대해 내가 직접 행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 이름으로 구한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이끄심 대로 구하는 것이 진정으로 예수 이름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과 욕망과 뜻을 내려 놓고, 내 안에 활성화되어 역사하시는 성령님이 주시는 생각과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예수 이름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런 간구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십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는 기도가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 응답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십니다. 왜냐면,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성품, 그 분의 살아 계심이 온 천하에 밝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우리 삶을 보고, “이는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삶이 하나님의 권능과 섭리를 드러내는 매개체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기도하면 주님이 그 기도를 반드시 응답하시고, 그 결과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예수님의 권면의 말씀을 함께 같이 읽겠습니다.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이 말씀이 우리 삶에 그대로 이뤄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 질문 1. 나는 예수님의 내주하심을 신뢰합니까? 그렇게 느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2. 가장 크게 기억나는 기도응답 받은 경우와 받지 못한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그것이 성령님의 인도하심대로 기도한 것인지,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셨는지 나눠보세요. 3. 이영표 선수와 같이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나눠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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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로 사랑하라
본문: 요한복음 13:34-35 얼마전 유투브에서 짧은 영상을 보았는데 인간의 뇌가 죽음이 임박하면 특정 뇌파를 발생시켜서 과거의 삶의 기억을 되살리게 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음 앞에서는 누구든지 겸허하게 가장 본질적인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본인이 언제 죽음을 겪으실 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 마지막 순간을 제자들과 함께 보내시면서 주님은 그들에게 성찬과 세족을 베푸셨습니다. 이로써 그들이 하나로 연합된 공동체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어서 처음으로 당부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그렇다면 이 계명은 교회가 공동체성을 유지하는데 핵심적인 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을 기록한 요한은 훗날 기록한 서신서에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라고 그는 강조합니다. 이 말씀을 모르는 성도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의 어려움을 겪는 분들 중에는 성도님들에게서 받는 상처 때문에 괴로워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가 이를 직시할 때 비로서 예수님의 유언적 당부의 말씀을 더 잘 살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는데 큰 걸림돌이 되는 것들 중에는 ‘다름’과 ‘미성숙’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생각도, 기질도, 배경도, 삶의 우선순위도 모두 다릅니다. 그래도 요즘은 MBTI나 애니어그램과 같은 성격테스트가 보편화 되면서 나와 다른 부류의 사람을 인정하고 수용하기가 예전보다는 많이 수월해졌습니다. 성격의 다름 때문에 고민이 많으십니까? 이 말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름은 극복하면 복이 됩니다. 또 하나는 각자의 성숙의 정도가 다릅니다. 그래서 나와 다른 성격의 사람이 성숙도도 차이가 날 때 함께 관계하기가 꽤 힘들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성숙한 사람과 미성숙한 사람 간의 관계에 대한 성경의 원리는 먼저 성숙한 사람이 미성숙한 사람을 품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처받기도 하고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이 계명에 대해 스스로 타협의 마음을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일반적인 말씀으로만 받아들이고 그럴 수 없는 케이스들을 만들어서 스스로 타협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마음이 맞을 수도 있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계속 타협의 마음을 주장하는 한 우리 자신과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사랑의 공동체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신데 이미 마음 속에서 상대방을 배제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세보다는 겸손히 하나님께 내려놓고 지혜를 구하는 것이 더 옳은 태도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몇 가지 기준을 제시해 주고 계십니다. 그 첫번째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입니다. 사실, 이 원리만 우리가 진실되게 묵상하면 내 안의 타협의 목소리는 모두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는 우리가 말 안 해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할 수 있는 한 남을 사랑하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의 모습을 닮으려 애를 쓴다면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악인과 불의한 자에게도 해와 비를 동일하게 내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악한 자일지라도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서기 전까지는 기다려 주시고, 또 기회를 주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마음을 우리가 조금 더 알게 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대견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분은 그런 본을 보이셨기에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요구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원수는 아니더라도 나와 다른 사람, 나보다 조금 덜 성숙한 사람은 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예수님 따르는 제자의 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에 있는 남을 판단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어떻게 극복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둘째,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랑을 성령의 열매라로 말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내 의지나 결심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의지도 필요하지만 그것 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성령님이 내 안에 충만히 거하시고 내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 때만 우리의 죄성을 뛰어 넘어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에 겸손히 순복하고, 남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어려운 우리의 마음까지도 솔직히 꺼내 놓으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하기 원하시는지를 보여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수고입니다. 한국 기독교가 자랑하는 손양원 목사님은 한센병 환자들의 환부를 빨아 고름을 제거해 주었습니다. 그 분은 자기 아들 둘을 죽인 자를 회개시켜 양자로 삼으셨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사랑이 그 안에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뿌리가 이런 사랑의 기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비하면 우리가 고민하는 것들이 얼마나 작고 개인적인 것인지 돌아보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의 당부는 주님의 유언과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실제적으로 살아낼 때 비로서 사람들이 우리를 주님의 제자라고 부를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넘치는 Psalm 공동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 질문 1. 남이 나와 다름이 복이라고 느끼신 경험이 있으신가요? 함께 나눠 보세요. 2. ‘남을 내 마음에서 완전히 접어버린 경우’와 ‘한시적으로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는 경우’가 어떻게 다를까요? 3. 서로 사랑하는데 내가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통해 새롭게 결심한 부분이 있으신가요?
참 하나님의 사람으로… (창 40:20~41:1)
하나님께서 우리 청년들에게 주신 은혜중 큰 것이 바로 열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열정의 근원과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면 이 열정은 바르지 않은 방향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조상 중 큰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요셉의 인생을 통해서, 이 열정보다 중요한 열정의 근원을 확인함으로 이 열정의 바른 방향을 확인하기를 소망합니다. 요셉은 꿈의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린시절은 사실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 야곱에게 편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특별히 자기애가 큰 사람으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많은 형들과 가족들과 함께 지내야 했으나, 잘 어울리지 못하며 자기밖에 모르는 사회성이 조금 떨어진 아이였습니다. 그러니, 요셉이 모든 형들의 미움과 시기와 질투를 독차지 하는 것은 사실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두번이나 꾸게된 자신이 모든 가족들 앞에서 높아지는 꿈을 통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꿈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견디며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으려 나름대로 노력했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형들의 큰 미움을 받아 종으로 팔려가게 되고, 이집트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의 종이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 앞에서 성실한 열정으로 살아갔기에 그는 온 집의 모든 사람들과 업무를 관리하는 자로 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모함으로 인해 성범죄 미수범이라는 죄명으로 감옥에 갖혀 죄수의 신분으로 살아가게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하고 성실한 열정으로 인해 결국 요셉은 감옥에서도 감옥의 모든 행정일과 감옥의 모든 열쇠를 관리할 정도로 큰 신임을 얻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왕을 보좌했던 두 관원이 감옥에 갖히게 되었고, 요셉을 신임했던 그들은 요셉에게 자신들의 꿈 이야기를 해주었고, 요셉은 그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창 40:12~14) 그러나, 그 때에 요셉은 꿈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자신의 능력인듯 그 관원에게 꿈해석의 조건을 걸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말씀에 기록되어 있듯이, 요셉의 해석대로 복직된 관원은 요셉이라는 존재와 요셉의 요구를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때에, 요셉은 그의 인생 중 가장 큰 시련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에게 가장 큰 시련은 외부에서 오는 고통스러운 환경보다, 그의 마음에 그의 꿈이 사라지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험한 인생에서 가장 큰 기대가 사라졌을 그 때에, 그는 지금까지 붙잡았던 꿈과 희망까지 모두 사라진 고통을 맛보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그 기간이 명확히 2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으나, 그것을 알리없던 요셉은 스스로 큰 고통과 절망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과 희망과 비젼도 무너진 그 시간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기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처절하고 가치없는 현실의 자신의 모습을 깨달았을 때에, 하나님의 크신 영광앞에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 자였는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요셉에게는 큰 고통의 터널과 같은 시간이었을지 모르나, 그는 그 시간 속에서 비로소 이기적이며 자기자신의 빛난 꿈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아닌 자기자신을 처절하게 깨닫게 된 하나님의 눈과 마음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결국 그는 그 비참한 미래가 없어 보이는 그 시간 속에서 그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가는 참 겸손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나님의 이름뒤에 감추이고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도 바로 그 아름다운 것을 요셉의 중심에 만들어 내시기 위해서, 요셉과 함께 아프셨지만 침묵하시며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비로소 참 하나님의 사람의 마음의 눈을 가지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비로소 이집트왕 바로에게 꿈을 꾸게 하십니다. (창 41:1) 그리고, 꿈 해석을 위해 바로왕 앞에 섰던 요셉의 태도는 이전과는 분명히 달랐습니다. 그는 세상 권세를 쥐고 있던 애굽 왕 앞에서 요셉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능력을 가졌는지 어필함을 통해 자신이 이익을 가지려는 기회로 삼지 않고, 그는 자신을 감추이고 오직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참된 겸손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창 41:16) 이후,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당시의 강대국 애굽의 총리로 세우셨고, 또한 가나안에 살던 아버지와 형제들 모두를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분명 자신에게 끔찍한 유년시절을 선물했던 형들에게 끔찍한 복수를 할 수 있는 이유와 힘을 가지고 있던 요셉이었으나, 그는 그의 형들 앞에서도 당신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빚으셨고 준비시키셨다는 믿음의 선포를 함을 통해, 우리는 그가 분명히 참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청년들에게 주신 열정은 참 좋은 것이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열정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다면, 그리고 열정의 목표가 자신을 감추이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돌려야 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그 열정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열정이라는 은혜를 주신, 모든것의 근원이시며 목적이시며 내용이신 하나님만 높이고, 찬양하는 참 하나님의 사람이된 여러분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전 인생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고, 나의 모든 것과 나의 열정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 뒤로 감추는 참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예배하고, 찬양하고, 일하고, 살아내고 숨쉼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여러분 모두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나눔질문 - 하나님의 은혜만을 높이고 나를 감추인다는 의미에 대해 깨달은대로 나누어 주세요. - 나의 삶속에 새겨진 생각과 가치관과 태도들 속에서 혹 나 자신을 드러내기를 기뻐하는 모습이나 성향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지 나누어 주세요.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겸손이라는 것이 무엇일지에 대해 당신의 생각을 나누어 주세요. - 그러한 참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교회와 지역과 세상에 넘쳐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기대하며 당신의 생각을 나누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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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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