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복음 전파의 불길
본문: 행 14:1-3 우리는 사도바울의 1차 전도여행을 따라가며 어떻게 복음 전파가 진행되었었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주 말씀에서 바울 일행은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방인들이 복음을 영접하였습니다. 이에, 바울은 앞으로 복음 전파의 큰 물결이 이방인에게 갈 것임을 암시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 후 이들이 향한 곳이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입니다. 이고니온은 여전히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서 유대인 회당이 있었지만, 루스드라와 더베는 유대인들이 전혀 없는 이방 지역이었습니다. 먼저, 이고니온에서의 사역은 앞전의 안디옥과 비슷했습니다. 바울 일행은 이곳에서도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아마 그곳에서도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말할 기회를 얻어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성경은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었다고 기록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은 믿는 자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가 강한 곳에는 악한 영의 역사도 강하게 일어납니다. 곧,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나타나 이방인들 (헬라인)의 마음을 선동하여 “악감을 품게(poisoned their minds)” 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사탄이 하는 일은 우리 마음을 중독시키는 것입니다. 이렇듯 복음전파에 우호적이지 않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그 지역에 오래 머물며 전도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 비결이 3절에 나옵니다. 그들은 주님이 주시는 힘, 즉 성령 충만의 힘으로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전한 메시지는 그들의 메시지가 아니라, 주님이 그들에게 주신 주님의 은혜의 메시지였습니다. 더구나 그들을 통해 많은 표적과 기사가 일어남으로 복음 전파 사역에 힘을 더하여 주었습니다. 그 결과는 안디옥과 똑같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생겨났습니다. 그 중 믿지 않는 자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 하는 상황이 되자 바울과 바나바는 피신하여 루스드라로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낙심할만한 상황에서 낙심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루스드라에서는 한가지 해프닝이 일어납니다. 그 곳에서 바울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복음을 전하였는데 마침 거기에 태어나면서 걷지 못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울의 설교를 집중하여 듣고 있었는데, 바울이 그를 주목하여 볼 때,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본 후, 그에게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하자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왜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을까요? 사도행전에 보면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이 4장, 8장, 14장에 반복됩니다. 사실 이 기적은 ‘메시아가 오시면 일어날 기적’이라고 이미 성경에서 예언된 기적입니다. (마11:4-5) 이런 메시아의 기적이 마치 사도행전 1:8 말씀처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며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기적은 기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복음의 불길이 주님의 말씀대로 전파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루스드라 마을 사람들은 제우스 신당 제사장과 함께 와서 이들을 신으로 모시며 제사를 지내려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에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찟으며 그들을 겨우 말립니다. 놀랍게도 바울은 이 소동조차도 복음전파의 기회로 삼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가 이들에게 전한 복음은 회당에서 전한 복음과는 확연하게 다릅니다. 바울은 성경도, 이스라엘 역사도 모르는 청중을 고려하여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지 않고, 천지를 창조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15).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구약성경을 모르는 자들에게 이들도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자연현상 (비, 농사의 결실, 풍성함과 기쁨 등)을 소재로 하나님을 소개하며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의 복음은 철저하게 청중 맞춤형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유대인들이 지겹도록 따라와서 결국 바울을 돌로 치고, 죽은 줄 알고 그를 시외에 내버립니다. 너무나 가슴 아픈 장면입니다. 바울이 죽은 줄로 알았던 제자들이 혼이 나간 듯 둘러서서 그를 보고 있는데, 바울은 벌떡 일어나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툭툭 털고 다시금 루스드라 성으로 들어갑니다. 그가 복음 전파를 위해 사생결단의 각오를 했음을 확인하는 장면인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강인함은 물론 타고난 그의 성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본성 만으로는 다 설명이 안됩니다. 그는 그가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님으로 완전히 충만하였기 때문에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런 바울의 모습 앞에서 어떠한 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이제 바울은 더베를 거쳐, 지금껏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새로 믿게된 제자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이 말을 들은 이들은 얼마나 큰 힘과 위로를 받았을 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친히 먼저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바울은 교회의 리더십을 세우고 금식기도 할 것을 권한 후 그 곳을 떠나 안디옥으로 돌아갑니다. 이로서 1차 전도여행이 마무리됩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으로 충만한 사역자는 바울과 같이 훌륭한 사역자가 되고, 그런 훌륭한 사역자는 금식하는 훌륭한 리더들을 세우며, 그러한 훌륭한 리더들은 새로 믿은 자들을 훌륭히 세워갑니다. 이것이 바울 사역을 통해 그려지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입니다. 제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우리 Psalm 공동체가 이러한 공동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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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의 존재 목적을 이루려면
본문: 마태복음 22:36-4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예수님은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십니다.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의 말이 이 두 계명을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핵심이라는 말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소요리문답의 1번과 2번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인데 이것은 신구약 성경에 기재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가능하다.”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인간의 존재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사제 프랑소아 페넬롱은 “단지 성경을 읽고 예배당에 가고 ‘큰’ 죄를 멀리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이란 말인가?”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매 주일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늘 행하는 종교 행위가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하나님 그분 자체를 사랑하고 있나요? 아니면 하나님 주시는 무언가를 사랑하고 있나요?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사랑하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만 관심과 사랑을 쏟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형식적인 그리스도인,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 관계를 위해 사역하셨고 앞으로 영원토록 그 사랑의 관계를 이어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죄로 인해 깨어졌던 관계를 회복시키기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인류의 모든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우리와의 깨어진 관계, 원수 되었던 관계를 회복시키셨습니다. 죄인이며 원수인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의 관계 회복을 위해 계획하시고 성취하신 분이 이런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번 분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신데 우리가 어찌 그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웃 사랑은 어떨까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말합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 21절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지적합니다. 보이는 이웃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웃도 사랑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사랑을 한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이요,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드러냅니다. 사랑은 내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요, 빛 가운데 사는 사람임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웃을 사랑할 때, 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들까지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지, 호감을 느끼라고 명령하지는 않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호감의 여부는 죄도 덕도 아닙니다. 다만 그 감정을 잘못 다스리면 죄가 될 수는 있겠죠. 호감이 가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은 그 단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까지도 품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C. S. 루이스는 내가 내 이웃을 사랑하나, 하지 않나를 고민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그냥 그를 사랑한다 치고 행동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감정을 억지로 만들어 내려고 애쓰지 말고 일단 하나님을 사랑한다 치고 행동하라고 말합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무엇을 할까?” 물어보고 떠오르는 일을 과감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든 이웃을 향한 사랑이든 기독교적 사랑은 의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정이 생기기를 기다렸다가 사랑하려고 하면 사랑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하나님도 그렇고 이웃도 그렇고 감정이 생기고 나서 사랑의 행동을 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평생 사랑하지 않겠다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감정의 문제는 뒤로 하고, 일단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행동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우리의 몸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감정이 아니라 의지적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절대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불가능할 것 같다고 핑계 대면서 안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사랑 없이는 우리가 주님을 믿는 사람임을 나타낼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히 주님을 즐거워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존재합니다. 이 존재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이룰 수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 삶에 동기가 되어야 하고 과정이 되어야 하고 결과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가장 큰 계명입니다. 이 위대한 명령 앞에 순종함으로 나가는 어스틴 한인장로교회 청년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각자의 존재 목적을 이루어 갈 때, 개인과 가정과 교회에 하나님과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득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흘러넘치는 어스틴 한인장로교회 청년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묵상 질문
제목: 바울이 전한 복음
본문: 행 13:13-16, 38-39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구브로 섬을 떠나 갈라디아 내륙 (지금의 터키)으로 인도하셨고, 그들은 버가항구를 거쳐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했습니다. 그 곳에도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살면서 회당을 중심으로 유대인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안식일에 그들이 모이는 회당을 방문합니다. 그 곳에서 그들은 회중에게 말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방문자인 그들이 전체 회중 앞에서 말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은 유대인들의 예배 관습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예배 형태를 복음 전도를 위한 기회의 창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 때, 바울이 일어나 회중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위치적으로 볼 때 바나바가 전하는 것이 맞으나, 성령님은 바울을 조명하셨고 이것을 바나바는 너그럽게 수용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전문이 17절부터 27절까지 나옵니다. 바울의 복음전파에서 우리는 세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청중에 맞도록 복음을 전파하라! 당시 회당에 모인 청중은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문한 그리스인들인데 이들의 공통점은 구약성경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구약의 역사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복음전파자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같은 이해, 같은 공감을 하고 있는 것은 복음전파에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점은 바울이 구약성경에 정통한 바리새파 출신이었다는 점입니다. 성령님은 바울이 미리 알고 있는 성경 역사를 활용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을 십분 활용해서 전도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의 “증인”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전파하라! 바울은 구약의 역사를 풀어가다가 다윗의 부분에서 예수님 이야기로 중심 주제를 전환합니다. 따라서, 구약의 역사는 청중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동시에, 바울은 구약의 모든 언약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임을 확실하게 전파합니다. 구약성경 전체를 “예수가 메시아로 오셨다”는 한 문장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구약은 잘 알았지만, 예수가 메시아인 것은 몰랐던 유대인들에게 복음의 핵심을 전한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메시아다(Jesus is the Messiah; Jesus is Christ)” 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심판과 멸망당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이십니다. 이처럼 전체 성경을 예수님의 관점으로 읽는 것을 “구속사적 관점” 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반드시 구속사적 관점으로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성경을 통해 어떻게 구원받는 지를 알려주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구속사적 관점을 잃으면 성경을 아무리 통으로 외워도 헛수고입니다. 유대인들은 토라를 외우지만 예언된 메시아가 예수가 아니라고 부인합니다. 무슬림은 예수님이 선지자 중 한 명이지만 메시아는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느냐는 인류 역사 최대의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예수가 메시아임을 나타내십니다. 모든 악한 영들은 어떻게든 사람들이 이것을 받지 않도록 할 수 있는 한 미혹합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메시아 (구원자)로 받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메시아인데, 우리가 성경도 모르고 예수도 몰라서 그를 죽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죽임당할 것조차 이미 성경에 예언된 바다” 라고 전합니다. 이제, 주님의 부활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예수를 다시 살리시고 일으키시고, 영광으로 덧입히셨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다시 살아나신 것도 이미 성경에 예언된 바다” 라고 바울은 증거합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예수를 전파할 대답을 준비한다면 다음 세 가지를 포함하시기 바랍니다: 1. 예수가 메시아요; 2. 그가 죽임당하셨고; 3. 그가 다시 사셨다. 이 내용을 어떻게(how) 전할 것인가는 개인적, 경험적일수록 좋습니다. 셋째, 비둘기같이 순결하게, 뱀같이 지혜롭게 전파하라! 바울의 복음은 이렇게 결론 짓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을 받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이 의로움은 모세 율법으로는 절대 얻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바울만큼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킨 사람도 드뭅니다. 그런 그가 증거한 복음은 굉장한 영향력을 미쳤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이 복음을 멸시하는 자들은 멸망당하리라는 경고의 말씀까지도 전파합니다. 바울은 듣는 이의 귀에 다소 불편할지라도 성경의 내용을 가감없이 전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둘기 같이 순전한 복음 전파” 입니다. 반면, 바울은 접근법 측면에서는 대단히 지혜로웠습니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 바리새인 출신, 구약의 율법을 너무 잘 아는 사람임을 백분 활용했습니다. 또한, 그는 경고를 할 때 저주하듯 한 것이 아니라 듣는 이를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으로 전합니다. 복음은 복된 소식입니다. 복된 소식을 전하는 데 자칫 경고가 너무 지나쳐서 저주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바울 일행이 복음을 전파한 결과로 회중이 완전히 둘로 나뉘어집니다. 즉,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하고, 헬라인들은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방인에게로 발걸음을 돌립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철저하게 씨뿌리는 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것입니다. 열매맺는 것은 아버지께 달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거두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다 거두십니다. 이것이 복음 전파자의 옳은 자세요, 사명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삶의 현장과 선교 현장에서 그리스도를 밝히 드러내는 진정한 복음의 일꾼 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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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mber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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