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온 인류의 소망
본문: 마 1:16-17, 2:1-2 오늘은 성탄 주일입니다. 예수의 탄생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신이신 예수님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한 이 사건을 기준으로 역사가 BC와 AD로 나뉘었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History(His + Story) 라고도 부릅니다. 그 의미를 기억하는 것이 성탄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입니다. 마태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계보는 아브라함과 다윗에서 시작합니다. 유대인에게 메시야의 탄생을 소개하기 위해 그는 메시야 언약의 성취를 강조합니다. 먼저, 예수가 동정녀의 몸에서 잉태된 것입니다. 예수의 탄생 장소 베들레헴도 미가서 5장의 성취입니다. 동시에 다윗의 고향인 이 곳에서 예수가 다윗의 자손으로 나오리라는 사무엘하 7장의 언약도 성취됩니다. 누추한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것은 예수의 시선이 낮은 곳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가 탄생한 시점은 하나님의 때가 찬 시점입니다. 마태는 이를 열 네 대가 세 번 반복되는 비밀을 통해 그려냅니다. 그러나 그 특정 시점 자체가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는 이유는 메시야의 영원성 때문입니다. 즉, 특정 시대가 그 분을 독점적으로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가 그린 메시야의 탄생은 유대인의 혈통에서,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며, 이스라엘의 목자이자 유대인의 왕으로 예수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의 의도와는 달리 마태복음의 탄생 스토리는 ‘온 인류의 소망으로 오신 메시야’를 강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은 동방박사 이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Magi라는 단어는 원래 페르시아 제사장을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별을 해석하는 점성술사로도 이해됩니다. 즉, 이들은 메시아 복음과 가장 관련 없는 자들입니다. 구약의 언약을 알았을 리가 난무하며, 유대인의 왕의 탄생을 기뻐할 이유도 없고, 값비싼 보배합을 드리며 아기 예수를 경배할 이유가 전혀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신비한 별을 보고 예루살렘으로 찾아 왔습니다. 이미 그 때는 하나님의 아들이 베들레헴에 나신 상태입니다. 멀지 않은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적 어둠 가운데 있었습니다. 오히려 먼 동방에서 동방 박사들이 예수를 경배하러 왔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이방인만 경배하는 것 - 이것이 마태복음 탄생 스토리의 가장 큰 아이러니입니다. 그럼,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왜 예수 탄생을 깨닫지 못했을까요? 먼저, 헤롯왕입니다. 그는 에돔 출신으로 유대지역의 왕이 된 자입니다. 그는 정치적 술수가 뛰어났으며, 권력에 대한 집착이 대단해서 심지어 자기 아내와 자식들도 왕권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살해한 자입니다. 그의 문제는 ‘메시야를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는 ‘조용히’ 예수를 죽이려 모사를 꾸밉니다. 이처럼 권력과 소유가 우상이 된 사람은 메시야를 놓치게 됩니다. 그런 자에게 예수는 위협으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종교지도자들입니다. 헤롯이 그들을 불러 물었다는 뜻은 이미 메시야가 이 땅에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전혀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런 성경지식이 메시야에 대한 소망으로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기득권에 취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권력화된 유대교 시스템에서 권력을 누리던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메시야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들이란 선민 의식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이 모르는 메시야는 있을 수 없다는 영적 교만에 젖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자신들만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착각한 예루살렘은 예수 탄생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배척할 때 아기 예수를 진정으로 경배한 자들이 동방박사들입니다. 그들이 베들레헴으로 향하자 이전에 보던 그 별이 다시 나타나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합니다. 그들은 예수와 마리아를 보고 크게 기뻐하고 기뻐합니다. 마태복음 2장에서 기뻐하는 자들은 동방박사들 뿐입니다. 이어서, 그들은 예수께 보배합을 드리고, 정성껏 경배합니다.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에게 가장 값진 경배를 드린 귀한 예배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니라 동방박사들이 예수를 경배한 첫 예배자였다는 사실은 메시아 오심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이스라엘의 목자로 오셨지만, 그의 오심은 온 인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BC 4년경에 오셨지만 그의 오심은 창조에서 영원까지의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동정녀에게서 낳으시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며, 이집트에서 부름 받으시고, 갈릴리에서 자라심으로 율법의 계시를 다 이루셨지만, 오히려 율법의 저주인 사망을 깨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이 사명을 한 알의 밀알이 썩어지듯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수고와 희생으로 완성하셨고, 동방박사들도 베들레헴까지의 먼 길을 오는 수고와 희생, 보배합과 경배로 주께 화답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영적 경종을 울립니다. 만약 우리가 내 삶, 내 성공, 내 업적의 성취와 유지에만 급급한다면 우리는 헤롯왕과 같은 사람입니다. 만약 우리가 교회를 또 다른 제도화, 권력화의 수단으로 타락시키고, “나는 리더입네” 한다면 우리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래도 교회는 다니니까 나는 구원받은 자’라는 영적 우월감과 착각에 사로 잡힌다면 우리는 예루살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마태는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온 인류의 소망으로 오셨고, 그의 오심은 전심으로 그를 바라고, 기다리며, 그를 경배하는 자들에게만 기쁨의 소식이 될 것이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의 대상은 온 인류이지만, 복음의 열매인 구원은 모두가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미국이 다원주의와 차별금지 사회 분위기로 기독교적 가치관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이신 예수는 사라지고, 행복한 휴일 (Happy Holiday)로 가볍게 보내는 이상한 나라가 되어갑니다. 지금 이런 모습이라면 예수가 우리 옆 동네에 와도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전혀 무관심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이번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아기 예수를 경배하려는 계획은 무엇입니까? 혹시 개인 여행 계획에 밀려 예수님 경배는 뒷전으로 가지는 않았는지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이번 성탄에는 우리가 동방 박사가 됩시다. 낮고 천한 곳으로 오신 예수를 만나려면 내 마음부터 낮고 천한 곳으로 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곳에서 우리 주님을 기뻐하며 경배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나눔 질문
0 Comments
![]()
3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이지방가나안족속의딸중에서내아들을위하여아내를택하지말고4내고향내 족속에게로가서내아들이삭을위하여아내를택하라5종이이르되여자가나를따라이땅으로 오려고 하지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이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6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 7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나를내아버지의집과내고향땅에서떠나게하시고내게말씀하시며내게맹세하여 이르시기를이땅을네씨에게주리라하셨으니그가그사자를너보다앞서보내실지라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
제목: 신앙의 기초_말씀과 기도
본문: 수 1:8, 살전 5:16-18 지난주 부터 신앙의 가장 기초가 되는 영역들을 하나씩 살펴보는 시리즈 설교를 갖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주일 성수에 대해서 함께 묵상했고, 오늘은 말씀과 기도 생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과 기도 생활의 전통은 구약시대 때부터 있어 왔습니다. 신명기 6장에 보면 유대인들은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것을 적어서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고,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고 했고, 이 명령을 지금까지도 잘 지키고 있습니다. 또한, 경건 생활을 지키는 자들은 수시로 기도하였던 것을 구약성경이 증거합니다. 예를 들어, 다니엘은 왕 이외의 신에게 기도하면 사자굴에 들어가게 된다는 조서를 인지한 상황에서도 동일하게 하던 대로 하루 세 번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런 전통은 신약 시대에도 이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을 꿰뚫어 알고 계시며, 바쁘신 사역 가운데서도 새벽에 기도하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초대교회에도 말씀과 기도에 전념했던 사례가 수 없이 많습니다. 이처럼 말씀과 기도 생활은 신앙인에게는 기본 중의 기본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말씀과 기도생활을 해야 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는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에덴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소통하고, 동역하며, 동행하였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단절된 것은 죄가 들어온 결과였으며, 이것을 영적 사망으로 부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은 끝도 없는 타락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창 5장).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은 인간이 창조목적에 맞게 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 됩니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에게 창조주 하나님 자신을 알게 하는 소통의 채널로서 우리에게 주신 책입니다. 성경만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 종합적이며 자세하게 계시해 준 선물이 없습니다. 2천년 전에 기록된 책이지만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서 지금도 살아있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충분합니다. 기도는 성경말씀보다도 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대화에 가까운 행동입니다. 모든 신앙의 선진들은 기도를 통해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쌍방향 기도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할 마음의 준비와 갈망함이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말씀하십니다. 말씀과 기도는 긴밀히 연결되어 함께 작용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받아 기도하기도 하고,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답하시기도 하십니다. 큐티는 말씀과 기도를 종합하여 하나님과 대화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입니다. 그럼 우리는 말씀과 기도 생활을 얼마나 자주 해야 할까요? 예수님과 제자들의 본을 볼 때 매일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 날의 삶의 환경이 다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지혜가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생명의 양식이요, 기도는 생명의 호흡입니다. 음식과 호흡 없이 단 하루도 살 수 없듯 말씀과 기도가 없으면 우리 영은 죽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은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될 수 있습니다. 저의 권면은 ‘어떠한 형태로든 하루 삶 동안 하나님과의 교제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영적 친밀감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친밀감이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준점이 되기 바랍니다. 또한, 일주일 삶을 하나의 영적 리듬으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매일 승리하기는 어려워도 일주일에 두 세번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통해 영적 힘을 얻는 것은 상당히 가능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씀과 기도 생활을 하는 데 가장 큰 방해요소는 무엇이 있을까요? 첫째, 바쁜 일상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은 바쁨을 관리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청년들의 직업선택의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워라벨 (work-life balance)입니다. Life는 생명입니다. 일과 생명의 밸런스를 맞출 수 있는 직업이 영적으로 건강한 근무 환경입니다. 만약 내 삶의 환경이 하나님을 찾기 어렵다면 주기적으로 하나님과 깊이 만나는 기회를 가져야만 합니다. 중세시대 때 세속화, 제도화된 교회에서 영적으로 지친 사람들은 영성을 회복하기 위해 스스로 수도원에 들어가 영성 훈련을 받았습니다. 현대에도 이런 훈련이 필요합니다. 또한, 바쁜 일상 가운데 말씀과 기도 생활을 하는 현실적인 방법들을 훈련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둘째, 회개하지 않은 죄입니다. 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피하도록 합니다. 내 마음에 죄를 품고 있으면 말씀과 기도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때는, 제자의 발을 닦아 주신 예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목욕한 사람 (세례)도 흙 길을 다니면 매일 발을 닦아야 합니다 (회개). 우리 주님은 이것을 너무 잘 아십니다. 우리가 매일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주께서 우리 발을 깨끗이 씻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죄에서 자유해져서 하나님께로 담대히 나아갑시다. 셋째, 말씀과 기도의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D형 큐티가 뭔지, 관찰 – 해석 – 적용이 뭔지 전혀 훈련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 훈련이 안되어 기도의 감동도 모르고, 10분 이상 기도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요. 예수님 조차 말씀과 기도를 매일 훈련하셨습니다. 우리의 영적 삶이 깊어지려면 우리는 말씀과 기도의 훈련을 기꺼이 받아야 합니다. 공동체가 함께 하는 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하시기를 권면합니다. 좋은 신앙서적들을 읽는 습관도 대단히 도움이 됩니다. 주일 저녁에 한 주 영적 삶의 포트폴리오를 짜시기 바랍니다. 한 주간 하나님과 깊이 있는 교제의 기회를 계획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단 번에 받았습니다. 그 다음은 부지런히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 가야만 합니다. 태어나서 성장이 없으면 부모가 근심하듯, 구원받고 영적 성숙이 없으면 하늘 아버지가 근심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말씀과 기도 생활을 통해서 건강한 영성으로 무럭 무럭 자라는 복된 공동체 되기를 축원합니다. 나눔 질문
|
"주일설교에 대한 질문을 작성해주세요."
주일 청년부 예배오후 2시 (1층 본당) Archives
February 2025
Categori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