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그종의주인이불쌍히여겨놓아보내며그빚을탕감하여주었더니28그종이나가서 자기에게백데나리온빚진동료한사람을만나붙들어목을잡고이르되빚을갚으라하매29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그가빚을갚도록옥에가두거늘31그동료들이그것을보고몹시딱하게여겨주인에게 가서그일을다알리니32이에주인이그를불러다가말하되악한종아네가빌기에내가네빚을 전부탕감하여주었거늘33내가너를불쌍히여김과같이너도네동료를불쌍히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오늘 말씀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쉽지 않은 주제인데 이 시간을 통해서 우리가 형제를 어떻게 용서해야 할지 솔직하게 돌아보는 은혜의 시간 되시길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인 가버나움에 가셔서 몇 가지 비유의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주께서 형제가 죄를 범하면 교회가 치리해야 함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형제가 자신에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지 여쭙니다. 베드로는 당시 유대교의 용서의 기준인 세 번보다 많은 일곱 번 용서하면 되는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뿐 아니라 듣는 우리에게는 굉장한 도전이 됩니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무자비한 종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만 달란트의 60만분의 1)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았던 비유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인은 하늘 아버지이시고, 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은 죄사함을 받은 우리들이며, 백 데나리온 빚진 자는 우리에게 소소하게 잘못한 형제들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 아버지는 우리를 악한 종과 같이 여기실 것이라는 굉장히 직설적이고 무서운 말씀입니다. 주님은 주기도문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죄사함을 받는 전제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의 죄사함의 권리도 포기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내 죄는 이미 처리되었다는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알겠지만 우리 마음이 편치 않은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 말씀처럼 용서할 자신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이 종은 왜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에게 이렇게 반응했을까요? 오늘 말씀 27-28절을 읽어보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이 종이 큰 빛을 탕감 받은 후에 그 은혜에 감격하거나 감사하는 모습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도 사람이기에 탕감 받았을 당시는 크게 감격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는 이 은혜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감사 표현도 없이 바로 그 자리를 뜹니다. 바로 그 타이밍에 그는 자신에게 빚진 동료를 만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종이 차갑게 돌변한 것과 그가 감사하지 않은 것 사이에는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것입니다. 저희 첫째는 굉장히 빠른 아이입니다. 얘가 3학년때 가족이 제주도 여행을 갔습니다. 저와 아내는 애들에게 좋은 경험을 해주고 싶어서 여러 곳을 데리고 갔는데, 첫째아이는 그곳을 즐기기보다는 그 다음에 어디 갈지가 더 중요해 보였습니다. 계속해서 제게, “아빠, 우리 다음에 어디가?”를 물었습니다. 이것이 반복되자 점점 제 마음이 지쳐갔습니다. “왜 우리 딸은 지금 좋은 것을 주었는데도, 다음 것 생각하느라 좋은 것을 즐기지 못할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깨닫게 된 사실은 제게도 그런 모습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오랜 시간 기도한 문제를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는데, 그 은혜에 깊이 머물기보단 그 다음 스텝으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이러면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머물기 힘듭니다. 우리는 받은 은혜를 깊이 묵상하지 않습니다. 마치 오래전부터 갖고 있는 것처럼 당연히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를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이 종도 그랬지 않았을까요? 탕감 받은 것은 기쁘지만 끝난 일이고, 다음으로 나아가려니까 자신에게 진 빚을 받아야 겠다는 마음으로 변한 것 아닐까요? 우리 기독교인이 은혜를 잊으면 이런 모습이 됩니다. 여기서 용서의 비밀이 드러납니다. 용서는 율법이나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는 예수님 수준에 절대로 도달 못합니다. 용서는 주님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한 질문은 세 번이든 일곱 번이든 여전히 용서가 율법과 의지 영역에 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횟수를 초월하는 말씀입니다. 이는 용서가 율법이 아니라 은혜의 영역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야. 용서는 은혜로만 할 수 있단다.” “너는 받은 은혜 가운데 깊이 머물고 있느냐?”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 처음 믿고 받은 구원의 은혜를 평생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까? 그것이 우리가 받은 가장 큰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죄된 속성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 말씀조차,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나를 용서하지 않으실거야. 그러니 나는 용서해야만 해” 라고 율법적으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용서는 그렇게 해서 되지도 않을뿐더러, 이런 해석에는 우리 아버지가 너무 무섭기만 한 분이십니다. 우리아버지어떤분이십니까?만달란트나되는빚을,그저그자가불쌍해서,아무조건 없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용서해 주신 분이십니다! 이게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신 바로 그 마음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반복해서, 우리가 알아 들을때까지 말씀하십니다. “내가 독생자를 너희에게 내어 준 것은, 죄로 인해 죽어가는 너희를 모른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용서한 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너희를 향한 나의 마음이다.” 그래서 용서는 사랑입니다. 용서는 긍휼이고, 용서는 인내입니다. 용서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걸 어떻게 우리가 의지로 따라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은혜 가운데 있어야만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형제 용서하시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다시금 십자가의 은혜 가운데로 들어갑시다. 그 가운데 침잠합시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조차 용서의 진정한 본을 보이셨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를 예수님 닮은 용서의 사람으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아멘!
0 Comments
Leave a Reply. |
"주일설교에 대한 질문을 작성해주세요."
주일 청년부 예배오후 2시 (청년부 예배실) Archives
September 2024
Categori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