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는 ‘어떤 관리’가 등장합니다. 마태는 그를 ‘청년’으로, 마가는 그를 ‘한사람’으로 소개하는 반면, 누가는 ‘관리’라는 좀 더 구체적인 신분을 알려줌으로서, 이 청년이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높은 지위가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이 청년 관리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묻기를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며 인생의 중대한 질문을 가지고 나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청년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을 향하여 ‘선한 선생님이여’ 하는 호칭을 사용함으로 예수님에 대한 호감은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그 청년은 이미 그의 생각 속에 무엇을 행하는 것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예수님께 나아 왔고, 어쩌면 벌써 그의 기준에서 선한 행위로 영생을 얻었다고 생각하여 예수님께 확인하러 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하여 스스로 선을 행하며 자신의 기준으로 스스로 의롭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겠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인간이 실천하는 어떤 행위로도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행위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생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온 청년에게, 소유의 문제로 답을 하시는 것은, 그 청년이 가지고 있는 소유의 의미, 소유의 가치 때문일 것입니다. 그 청년에게는 그가 가진 소유에 대한 생각, 그것의 가치를 버리지 않으면 그에게 영생이 절대 우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결코 ‘주님’이 되실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생은 우리의 어떤 행위로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하신 27절의 말씀은,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만이 베푸실 수 있는 은혜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 주신 예수님을 믿는 굳건한 믿음으로 감사하며 살아 가시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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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mber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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