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브람은 그의 가족(아내 사래, 조카 롯)과 소유와 함께 애굽을 떠나 네게브로 올라옵니다. 그리고 네게브에서 길을 떠나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을 쳤던 곳으로 옮깁니다. 이 곳은 아브람이 처음으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곳입니다. 그런데, 아브람과 롯의 가축이 많아지면서 그 땅에서 함께 동거할 수 없게됩니다. 서로의 목자들 간에 다툼이 일어납니다. 아브람은 롯과의 화평을 위해 장소 선택권을 양보합니다. 롯은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처럼 풍요로운 지역(도시)을 선택하고 그의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릅니다. 소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악하고 큰 죄인입니다. 롯이 떠난 후,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눈을 들어 동서남북의 땅을 바라보게 하시고 보이는 땅을 그의 후손에게 영원히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람의 후손을 땅의 티끌처럼 많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리하여 아브람은 헤브론의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해 제단을 쌓습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8-9)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17)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서로 간의 평화를 위해 양보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과 동행함이 참된 부요임을 깨닫고, 세상의 부요보다 하나님과 동행함을 추구하는 제자의 삶을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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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홍수 심판 이후 다시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새로운 재창조를 시작하십니다. '믿음으로 사는 백성'을 일으키시고, 이들을 통해 세상이 복을 얻게 하십니다. 이를 위해, 창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십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새로운 재창조, 곧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첫걸음이 된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쓰임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브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의 특별함을 보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택함받은 사람의 특별한 삶을 보게 됩니다. 먼저,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실까요? 하나님은 가능성이 없어보이는 자를 통해 큰 일을 이루십니다. 아브람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그의 이름을 크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달리 아브람의 현실은 희망적이지 않습니다. 그의 아내 사래는 불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능성 없어보이는 아브람을 부르시고, 약속하시고, 마침내 그 약속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능성을 통해서 일하시지 않고, 그 분의 약속(주권적 약속)과 그 분의 신실하심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백성은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살지않고 하나님의 약속과 신실하심을 믿고 살아갑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택함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람은 상황을 뛰어넘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나에게 익숙한 모든 것 - 나의 땅, 나의 친족, 나의 가족 - 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미지의 땅으로 나아갑니다. 둘째로, 내가 서있는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아브람이 도착한 가나안은 녹록하지 않은 환경이었습니다. 그는 세겜에서 벧엘 동쪽 산으로, 그리고 다시 남방(네게브, 광야)으로 옮겨야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어디서든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은 이 아브람을 통해, 아브람의 후손들을 통해, 모든 민족을 복주시기로 약속하셨고, 이 약속은 마침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성취되어 오늘 우리와 세상의 무수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아브람과 같은 복의 삶(a blessing)이 되기를 - 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나누는 복의 통로가 되기를 - 소망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1)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8)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참 부족하고 연약한 저를 부르셔서 세상의 복으로 삼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 내가 서있는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나를 넘어 이웃을 사랑으로 품게 하시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이들은 그 백성들의 족보에 따르면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그 땅의 백성들이 나뉘었더라” (32)
오는 본문 말씀은 홍수심판에서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노아의 후손들이 어떻게 온 세상에 퍼져 나갔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벳의 자손은 지금의 터키와 유럽, 흑해, 페르시아 지역으로 나뉘어 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 함의 자손은 바벨론과 아프리카 지역, 가나안과 팔레스타인 등 지중해 동쪽 지역 쪽으로 흩어져 나아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첫째 아들 셈의 자손은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아라비아 반도 쪽으로 나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노아의 자손들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각각의 언어, 종족, 나라와 지방별로 계속해서 나뉘며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로써, 창 9:1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온 인류는 한 뿌리에서 나왔고, 평화의 왕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다시금 하나로 연합될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사실은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편협한 인종주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다음으로, 본문말씀에서 인류의 구원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노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본문은 셈의 자손의 족보를 가장 마지막에 배치하고, 그 중 아르박삿의 자손들에게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4-29절까지가 모두 아르박삿의 후손에 관한 족보입니다. 이는 그의 후손에서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창 11:10) 아브라함은 구속사적 관점으로 볼 때, 또 하나의 노아입니다. 그리고, 그의 씨앗에서 구속사를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납니다. 이 과정에서 숱한 위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사적 열심은 이 모든 것을 이기고, 결국 예수가 그리스도 이심을 온 열방에 선포하도록 하셨습니다.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하심보다 더 크고 강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 구속사의 정점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 계십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 것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온 인류를 지면에 퍼져나가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금 하나로 완성하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우리에게 복음을 알게 하심에 감사하며, 주의 자녀답게 살게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의 아들들은 모든 민족의 기원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창조가 이루어졌던 에덴동산과 같지는 않지만 인간의 악한 모든 죄를 이 땅에서 씻어내어 주시고 새롭게 그들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절 말씀에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하고 기록된 것처럼 노아의 세 아들, 셈 함 야벳을 통하여서 창세기에 이르신 하나님의 말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라’ 하신 축복의 말씀을 이루어 주실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에 불과하이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땅을 창조의 질서 안에서 다스리고 관리하며 선하게 일구어 나가는 큰 사명을 다시 한번 노아의 자손들에게 주신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창세기 6장에도 보면 노아는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았던 사람이고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홍수의 무서운 심판에서 건짐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일군 포도농사로 인해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게 되면서, 결국은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체로 자는 것을 아들들이 목격하게 됩니다. 아마도 성경에 다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유추해 보면 이전에 경험하였던 하나님의 홍수의 심판이 잊혀지면서 어쩌면 무질서한 삶을 살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술에 취하면 실수하게 됩니다. 실수하면 수치를 경험할 확률이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망각하고 가는 길은 수치와 부끄러움을 겪는 길이 됩니다. 인간은 벌이 있다고 해서 심판이 있다고 해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는 존재임을 압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매순간 하나님께 붙들려 있는 삶을 살아야만 실수를 피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의 아버지로 불리는 함은 아버지의 허물을 떠들며 비웃었습니다. 아버지의 수치를 불쌍히 여기며 덮어 주었던 셈과 야벳만이 노아의 축복을 허락받습니다. 서로에 대해 연민을 품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없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의 삶에서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만이 이 세상에서 선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 가는 믿음의 공동체로 세워져 가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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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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