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선지자는 11장 1절에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의 자손을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세워서 그 왕위를 영원토록 지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새의 줄기’라는 표현에서 ‘줄기’는 영어로 stump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루터기란 말입니다. 그루터기에서 올라오는 한 싹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루터기와 싹 사이에 오랜 시간적 단절이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다윗의 씨는 솔로몬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솔로몬은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솔로몬 이후 다윗의 씨는 남북으로 갈라졌고, 악한 왕들이 계속 나오면서 결국 그 씨는 주변 강대국에 의해 완전히 멸망해 버립니다. 이스라엘이란 큰 나무가 완전히 베어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완전히 망해 버린 것 같은 이스라엘의 그루터기에서 한 싹이 다시 나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참 묘하고 아름다운 계시가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2-5절까지는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 지를 설명합니다. 메시아는 여호와의 영이 충만한 자입니다. 그 영은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입니다. 그는 여호와를 공의와 정직으로 세상을 심판하시며, 그는 공의로 허리띠를 삼고, 성실로 몸의 띠를 삼는 분입니다. 허리띠는 한 사람의 정체성입니다. 챔피온은 챔피온 밸트를 하고, 왕은 옥대를 찹니다. 우리 예수님은 공의가 그 분의 허리띠 이십니다. 다른 한 띠는 성실인데, 이 원어적 뜻은 변치않음, 신실함입니다. 예수님의 언행과 가르침은 2천년 전부터 영원까지 변치 않으실 것입니다. 6절-8절은 이런 메시아가 이 땅에 임하시면 나타날 세상의 변화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사자나 독사 같은 들짐승이 어린양과 어린아이들과 평화롭게 지내는 곳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과 자연세계에, 우리 인간 세계에 더 이상 약육강식의 법칙이 완전히 사라지고, 아무도 다른 존재를 해하지도 않고, 상하지도 않는 완전한 평화의 상태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계시합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회복하실 하나님나라는 완전한 평화의 나라입니다. 이는 완전하신 왕, 메시아가 통치하시는 곳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메시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완전하게 이 땅 가운데 드러나기 때문에, 온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이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충만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완전한 평화는 아직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만, 우리 주님 재림하실 때는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저녁은 메시야 예수가 이 땅 가운데 오신 것을 기념하는 성탄 전야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신 공의와 진리의 왕이십니다. 그 분을 통해 이 세상의 공의와 정의가 바로 세워지고, 완전한 평화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오심은 우리에겐 기쁜 소식입니다. 이 의미를 아는 우리는 성탄을 맞아 기뻐해야 합당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께 성탄의 크신 은혜가 가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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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장에서 부터 시작된 욥기서의 반복되는 질문은 ‘욥의 고난과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친구들과의 여러차례의 논쟁이나 엘리후의 변론에서도 모두가 수긍할만한 뚜렷한 대답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람의 말로는 사람의 마음을 위로할 수 없었고, 하나님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의 지식도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도 계속해서 말씀하시지만, 욥이 그토록 목말라 했던 마음속의 질문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도리어 욥에게 집요하게 질문을 하시고 계십니다. ‘네가 어디에 있었느냐?’ ‘네가 아느냐?’ ‘네가 본 적이 있느냐?' ‘네가 감히 할 수 있느냐?’ 욥은 일일이 답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답은 ‘저는 모릅니다, 저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런 것들을 할 수 없습니다’ 였을 것입니다. 결국 욥은 하나님 앞에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사자, 까마귀, 산염소, 암사슴등 동물의 예를 들어 말씀하시는 것은 두가지의 의미로 이해됩니다. 첫째로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욥의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하나님이 욥이 전혀 알지 못하는 동물의 세계에도 섬세하게 관여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시라면, 이들보다 더 중요한 욥을 책임져 주시지 않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이 말씀은 욥이 진정으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상황에서 벗어나서 더 큰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하며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관여하시는 세상에서 하나님으로 인하여 살아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세상에 어느 한 부분이라도 하나님의 관여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음을 기억하며 고난중에서도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기후와 천체에도 창조주의 섭리가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은 눈과 우박을 예비하셔서 환난 때와 전쟁의 날에 사용하십니다. 광명과 동풍을 주관하시고, 홍수를 통제하시고 우레와 번개를 관리하십니다. 사람 없는 땅과 광야에도 비를 내리시고, 황무하고 황폐한 토지를 촉촉하게 하셔서 연한 새 싹이 돋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묻습니다. 욥의 지혜로 비와 이슬과 얼음과 서리의 기원을 알 수 있는지, 욥의 능력으로 천체를(묘성과 삼성, 별자리들과 북두성, 하늘의 궤도와 법칙) 다스리고 이끌고 주관할 수 있는지 물으십니다. 또 욥이 기후 현상(구름, 물, 번개)을 다룰 수 있는지 물으십니다. 동물에게 슬기를 준 자는 누구이고, 지혜로 구름의 수를 셀 수 있는 자는 누구이며, 하늘의 물 주머니를 기울일 수 있는 자가 누구인지 질문하심으로써, 하나님은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없음을 보이십니다.
“누가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며 황무하고 황폐한 토지를 흡족하게 하여 연한 풀이 돋아나게 하였느냐” (26-27) “누가 지혜로 구름의 수를 세겠느냐 누가 하늘의 물주머니를 기울이겠느냐 티끌이 덩어리를 이루며 흙덩이가 서로 붙게 하겠느냐” (37-38)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일상에서 경험하는 기후와 천체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제 삶의 주관자이신 주님을 찬송합니다. 사람 없는 땅과 광야를 돌보시는 주님을 배워서, 저도 사람들의 관심과 돌봄이 미치지 않는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기 원합니다. 예수님을 닮는 성탄절 되게 하소서” 폭풍우 가운데서 하나님이 등장하셔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욥을 향해 질문하십니다. 무지한 말로 하나님의 계획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인지 묻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크고 깊은 계획을 다 알 수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땅의 기초를 놓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창조가 얼마나 질서정연한지 온전히 깨닫지만, 오히려 새벽 별들과 천상의 존재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보면서 기뻐 노래하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바다의 경계와 한계를 정하시고, 악인들을 심판하시며, 광명과 흑암을 지배하십니다. 욥은 고난 속에서 오직 자신에게 집중하고 하나님께 항변했는데(왜 나에게 재앙이 닥쳤습니까?), 하나님은 온 우주 가운데 있는 욥을 보게 하십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돌보지 않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부당함을 제기했는데(왜 의인이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욥에게 그 분이 다스리는 거대한 우주와 세계를 가늠해볼 수 있는지 묻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항변하고 의문을 제기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거대한 세상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3-4)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비록 고난의 시간 속에서도 나 중심적인 생각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온 우주와 세계를 통치하시는 광대하신 하나님을, 그 광대하심 속에서도 작고 연약한 나를 잊지 않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내가 다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 오히려 겸손하며 감사하게 하소서” 오늘 본문은 엘리후의 마지막 발언입니다. 욥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면서 말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여름 날씨를 소재로 가르침을 이어가고 있고, 욥을 향하여 자신의 말을 듣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깨우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욥의 문제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전혀 새롭지 않은 내용을 마치 새로운 지식인양 설명하고, 분명하지 않은 것을 분명한 지식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엘리후는 말을 바꾸어 우리는 아둔하여 아뢰지 못하겠다라고 말합니다. 엘리후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자였으나 결국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신의 무지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욥이 당하는 고통의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나
감정의 교감 없이 오직 자신의 것을 쏟아 붓는 모습으로 엘리후의 변론인 마무리 되어 집니다. 인간의 실존을 잘 아는 지혜자는 바로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는 자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된 지혜와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주신 예수님만이 진정한 우리의 주인이시고, 구원자이심을 고백하는 하루의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의기도 “하나님 아버지, 인간의 지혜가 얼마나 무지함을 알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을 의지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하고 오늘 하루도 은혜 가운데 승리하는 하루 되게 하여 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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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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