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시 39:1) 교회에서 사역자로 섬기다 보니 원래 말이 없던 사람도 말을 많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늘 말에 관하여 조심합니다. 사역자라면 마땅히 은혜로운 말, 덕을 세우는 말을 해야 하지만 말을 많이 하는 만큼 의도치 않은 말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말실수 때문에 나 한 사람 부끄러운 것 뿐이면 별 문제 없지만, 그 말실수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생기면 안되기 때문에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 말조심을 하려면 하고 싶은 말을 다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안하는게 좋을 것 같은 말은 아예 꺼내지 않는게 좋습니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해도 되는 말인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지난 한 주간 누군가에게 보여 줄 글과 해야 할 말들을 준비하면서 몇가지 말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하지 않은 말들이 몇 개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반드시 필요한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제가 굳이 할 필요가 없거나 안하는 게 좋은 말들을 하려고 할 때면 하나님께서 미리 신호를 주실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신호에 민감할 때는 말을 조심하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여지 없이 실수를 합니다. 저도 아직은 말에 있어서 많이 미숙한 사람입니다. 제가 언제 말 실수를 하나 돌이켜 보니 몇 가지 중에 두 가지가 먼저 생각이 납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을 웃기려고 할 때입니다. 특히 설교자가 설교시간에 무리하게 웃기려고 하면 실수할 가능성이 매우 높지요. 그래서 아내가 이런 말을 해 준 적이 있습니다. "웃기려고 하지 마세요. 당신은 웃긴 사람 아니에요." (네 저도 잘 압니다. ^^;) 친한 사람끼리 서로 놀리다가 실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농담이라도 남을 깍아 내리는 말은 삼가해야 하고 이왕이면 칭찬하고 추켜세우는 농담을 하는게 낫겠지요. (제가 장난으로 놀린 몇몇 청년들 미안해요.^^;) 두 번째는 제가 옳다고 여기는 말을 할 때입니다. 특히 불의에 대항하여 정의로운 말을 하고 싶을 때 실수하기가 가장 쉽습니다. 옳은 말을 할 때에도 적당한 때에 지혜롭게 해야 하며 그 안에 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옳은 말로 주는 상처가 가장 깊기 마련입니다. 불의에 관하여 둔감해지란 뜻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적어도 하나님 보시기에 무엇이 옳은 일인지 분별할 수는 있어야 합니다. 다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심판자가 아닌 중보자가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사랑과 희생이라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해야 할 사명이 있는 존재들입니다. 우리 고국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참 아픕니다. 수많은 갈등과 상처, 아픔이 느껴집니다. 불의를 행하면서도 오히려 자신들이 의로운 것처럼 뻔뻔스럽게 구는 이들을 바라보며 분노를 느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내 안에 분노로 세상을 대하지 않는 존재여야 함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로움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워 오직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세상을 대하여야 하는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이야 말로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허창도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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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박 3일의 청년 수련회가 하루처럼 지나간 것 같습니다. 수련회 기간동안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뛰놀았으며, 기쁨을 나누고 서로를 위로했으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찬양했습니다. 수련회 동안 누렸던 이 은혜는 성도들이 언젠가 천국에서 누리게 될 기쁨을 미리 조금 맛 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맛을 본 것뿐인데도 이렇게 즐거우니, 진짜 천국의 기쁨은 얼마나 크고 아름다울까요?
이제 우리는 이 기쁨을 가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수련회 기간 동안 주신 은혜의 말씀들을 믿음으로 꼭 붙잡은 채, 수련회 전과는 달라진 마음으로 학업의 현장으로, 직장의 현장으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은 수련회 전이나 후나 변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을 요구합니다. 이런 상황이니 아무리 수련회에서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 해도 삶의 현장에서까지 이 은혜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한 동안은 받은 은혜를 써먹으며 잘 버티는 것 같다가도 오래지 않아 다가오는 시험과, 논문의 마감일, 마무리 해야할 회사의 프로젝트, 풀리지 않는 관계의 문제, 아직 보이지 않는 나의 진로로 인한 염려 등으로 다시금 삶의 무게에 짓눌리곤 합니다. 삶의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의 능력은 현실에 영향 받지 않고 우리 안에서 지속적으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삶의 현장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바꿈으로 가능해 집니다. 그동안 우리는 나의 삶의 현장은 영적으로 너무나 척박해서 은혜를 얻으려면 삶의 현장으로부터 벗어나 영적으로 구별된, 주일 예배나 수련회 혹은 부흥회 같은 특별한 시간과 장소가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물론 영적으로 구별된 시간과 장소는 매우 필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특별한 시간과 장소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의 삶의 현장이 바로 우리가 영적인 열매를 거두는 은혜의 장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밭은 생존을 위한 노동이 요구되는 삶의 현장입니다. 그런데 천국이 바로 이 삶의 현장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이 너무나 정확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삶의 현장과 동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깨어졌던 관계가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던 바로 그 현장에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나의 인생길을 하나님께서 열어 주시던 바로 그 현장에서, 결코 고칠 수 없을 것만 같던 육신과 마음의 질병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함을 받은 바로 그 현장에서, 죄로 인해 고통받던 나의 심령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용서받고 회복되던 바로 그 현장에서 바로 우리가 천국의 기쁨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우리의 삶의 현장 안에 천국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지금껏 너무나 척박해서 영적인 것이라고 전혀 기대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바로 그 곳이 사실은 천국이 감추어진 영적 밭인 것입니다. 학업과 업무의 스트레스 가운데서, 친구 혹은 직장 상사와의 불편한 관계 가운데서, 내 마음의 염려와 근심 가운데서 천국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현실이 어떠하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이 바로 천국임을 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천국의 기쁨과 소망을 소유할 놀라운 특권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 허창도 전도사 |
Author
김상범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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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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