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ephant in the Room” 이라는 영어 표현이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명백한 문제를 어느 누구도 언급하려 하지 않을 때 쓰는 말입니다. 곧, ‘불편한 진실’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2차 산헤드린 공회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71명의 공회원들 중 사두개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버젓이 일어나 자신들 앞에 서 있는 이 ‘표적’이 이들에게 눈에 가시가 된 것입니다. 이 표적은 예수님의 부활하심, 곧 복음을 가리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 또한 보고 들은 바 된 부인할 수 없는 복음의 메세지 인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얼마 전 예수를 잡아 십자가에 처형 할 때만 해도 “학문 없는 범인”(13절)이었던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함 받은 자, 진짜 구원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믿음은 설득이 아니라 선포입니다. 복음을 삶으로 선포할 때 나타나는 권능입니다. 비난할 말이 없어진 공회원들은 또 모여서 회의를 합니다. 논의 결과 자신들도 부인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16절) 이제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17-18절) 며 베드로와 요한을 위협합니다.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표적만 가리기에 급급하여 그 표적이 가리는 메세지 즉, 복음/말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19절) 선포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문제는,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과 같이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20절) 말하는 그들과 달리, 도리어 사두개인들과 똑같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여전히 믿지 않는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진짜 ‘불편한 진실’입니다. 베드로는 이 불편한 진실을 오늘 자신이 복음을 선포한 바로 이 자리에서 불과 얼마전 (1차 산헤드린 공회) 주님을 세 번 부인할 때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닭이 울고 주님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주님의 말씀을 (예수님 따른 후 지난 3년간 처음으로) 기억해 냅니다. 이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들은 베드로는 이제 두려움이 사라져 버립니다. 두려움의 반대말은 믿음입니다. 믿음의 근거는 끝까지 포기치 않으시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랑입니다 (요일 4:18). 그 사랑을 말하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사두개인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 ‘불편한 진실’을 깨달으셨다면 오늘 말씀 가운데 닭 울음 소리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잠자는 교회를 흔들어 깨우시는 경종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예수님을 모릅니다’ 부인하며, 침묵하며 살던 나를 돌아보시는 주님의 눈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지금도 역사하시는 성령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복음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믿음으로 담대히 선포하는 증인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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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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