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목요일은 큰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의 가을학기 마지막 수업일 이었습니다. 지난 학기와 같이 어린 아이들의 귀여운 발표회가 학교 체육관에서 있었습니다. 물론 저희 부부도 초대를 받아 학교를 방문했지요. 조그마한 입술로 오물거리듯 수줍게 캐롤을 이어 부르는 1학년 아이들의 귀여운 합창을 보고 있으니 하나같이 어쩜 그렇게 예쁜지요. 마치 천사들의 합창 같았습니다. 즐겁게 기타 치며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시는 선생님과 달리 가사를 못 외워 우물쭈물하는 아이들도 제법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많은 노래의 가사를 다 외우기에는 벅찼었나 봅니다. 그런데 어떤 곡이 시작되자 갑자기 모든 아이들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가사를 모르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 노래는 다름 아닌 Jose Feliciano의 “Feliz Navidad”였습니다. 지어진 지 46년이나 된 이 캐롤을 어쩜 그렇게 잘 아는지 신기하기만 할 따름입니다. 사실 이 캐롤은 반드시 Jose Feliciano의 버전으로 들어야만 신이 나지요. 만약 다른 누군가가 다른 편곡으로 이 노래를 부른다면 기분이 이상할 것 같습니다.
캐롤이나 크리스마스때 자주 듣게 되는 노래들 중에는 반드시 원래 가수가 부른 버전으로 들어야만 기분이 나는 곡들이 제법 있습니다. 예를 들어 “Last Christmas”는 지금까지 여러 번 리메이크 되었지만 라디오에서는 여전히 George Michael이 Wham 시절에 녹음한 버전을 가장 많이 방송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캐롤 중에는 Andy Williams가 부른 “It’s the most wonderful time of the year”라는 노래가 그런 노래 중에 하나입니다. 다른 가수가 부른 버전도 있지만 이 노래는 꼭 Andy Williams의 버전이어야 제대로 기분이 납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사실 누가 부르든 가사는 다 똑같은데 왜 어떤 노래는 누가 불렀는지에 따라 선호도가 달라지는 걸까요? 생각해 보면 이런 경우는 꼭 노래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설교가 그렇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목사님이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에 일화입니다. 이 분이 어느 날 다른 교회를 방문해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그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은 많은 성도들이 예배 중에 주님께 헌신하는 감격스런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목사님도 큰 은혜를 받아 자기가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전해 주고 싶어서 같은 내용을 그대로 인용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의 설교를 들은 성도들은 감동은 커녕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감동을 주는 내용은 같았는데 누가 전했는지에 따라 듣는 사람의 반응은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사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들려줄 감동의 메시지를 다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이 전하는 복음은 듣는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그의 삶까지도 변해 새사람이 되게 하는 반면에 어떤 이들이 전하는 복음은 감동은 커녕 그저 허공에 메아리치는 공허한 소리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이런 차이가 나는 걸까요? 복음을 듣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의 마음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복음을 전할 때에는 영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나지만 그렇지 않으면 복음은 그저 믿을 수 없는 허황된 메시지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세상에 선포하셨을 때에, 그 분의 메시지는 결코 허황된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지극히 큰 사랑을 언제나 그 분 안에 품고서 복음을 전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눅 4:18-19>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메시지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나타났으며 말씀에 감동을 받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복음은 메시지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전하는 자의 마음도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제대로 복음을 전할 때에 세상은 복음을 다르게 듣기 시작할 것입니다. 슬픔과 아픔이 가득한 고통스런 삶의 현장의 한 복판일지라도 온전히 전해진 복음 때문에 누군가는 진정한 구원의 기쁨을 발견하게 되는 멋진 순간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복음이 온전히 전해지고 들려지는 때가 바로 “It’s the most wonderful time of the year!"라고 외칠 수 있는 때가 아닐까요? - 허창도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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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었던 한 달 반의 기간이었습니다. 절망과 좌절, 분노와 슬픔이 우리들의 온 맘에 멍을 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희망을 보았습니다. 영국의 런던타임스는 1952년,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열망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난 몇 주간, 수백만의 장미꽃이 피는 것을 보았습니다. 처참한 현실에서 기어이 꽃을 피우고야 마는 그들의 모습에 마음이 울컥하기도 했습니다.
플라톤은 ‘공적인 문제에 무관심한, 선량한 사람들이 치뤄야 하는 대가는 악인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남에게 해 안 끼치고 법 안 어기고 산다고 해서 착하게 사는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생명이 존중 받지 못하고, 정의가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되는 상황에서,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눈 감고 귀 닫고 입을 닫아 버리면, 그것이 곧 ‘악’을 돕는 일입니다. 이천년전 유대에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공회원이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아도 내심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시는 동안 공회원으로서 그는 아무런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아무 죄 없이 고난을 당하시고 잔인한 방법으로 죽으시는 것을 보고 그제서야 그는 각성했습니다. 더 이상은 잠자코 있을 수 없어서 용감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신성모독의 죄로 이제 막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한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동정심을 보이는 것은 그에게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있을지도 모를 불이익을 생각하면 그는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것이 나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시신이 밤새 매달려 있는 것을 못 본 척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신을 처리하느라 부정해지면 안식일 의식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예수의 시신을 받아 정성껏 장례를 치뤘습니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예수의 시신은 아무 공동 묘지에나 버려졌을 것입니다. 그는 선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에 참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지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준비하는 영광스런 직분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습니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살아 간다면, 나의 삶은 세상이 악해지도록 돕는 것 외에는 어떤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리 작고 사소한 일이라 할 지라도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며 적극적으로 선한 행동을 해야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 데에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악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정의가 실현되도록 이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깨어나야 할 때라 믿습니다. - 허창도 전도사 |
Author
김상범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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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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