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4) 샬롬! 오늘은 ‘복음서를 통해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 시리즈의 마지막 시간으로, 요한복음을 통해 ‘그가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4복음서 중에서, 예수님의 성육신(the incarnation of Jesus Christ)을 보여주는 책이 ‘요한복음’입니다. 다시 말해,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분’으로 증거합니다. 요 1:1-3은 예수님을 태초부터 계신 말씀(로고스)로 표현하면서, 이 말씀은 하나님이시고 온 세상 만물의 창조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요 1:14은 이 말씀이 사람(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놀라움과 경이의 사건입니다. 우리의 이성과 상식을 뛰어 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의 성육신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은 이 땅을 밟고 거니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3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물과 피를 가진 사람이 되신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셨고, 그리하여 친히 우리를 위한 대속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히 9:22: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또한, 성육신은 진흙을 빚는 토기장이가 질그릇이 되신 겁니다. 만물의 창조자가 질그릇처럼 연약한 인간이 되신 겁니다. 그리하여 사람이 되신 하나님(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고,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가지고 언제든지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육신은 창조자가 피조물 가운데 한 존재가 되신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겸손입니다. 온 우주 만물의 창조자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낮춰 피조물과 같이 되신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성육신의 이유는 무엇인가요? 왜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나요? 그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하는 사다리’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하는 사다리가 되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과거 믿음의 조상 야곱이 벧엘에서 꿈에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를 보았는데, 이 사다리가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해 이뤄졌다는 말입니다. 사다리를 통해 땅의 야곱과 하늘의 하나님이 연결되었듯이, 이제는 예수님(사람이 되신 하나님)을 통해 우리(죄인인 인간)와 하나님(거룩하신 하나님)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친밀한 교제를 누릴 수 있게 된 겁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성육신으로 인해, 죄로 인해 고통하고 신음하는 세상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선한 창조의 모습으로 회복될 겁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유일한 사다리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영생의 길이신 예수님을 이웃에게 전하며,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모습으로 회복시켜가는 AKPC 공동체 되기를 소망합니다. Amen!
나눔 질문 요한복음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요? 이것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응답 찬양: 그가 오신 이유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순종의 눈물 온 세상 다시 빛나게 한 생명의 눈물 그가 이 땅에 오신 이유 죽어야 살게 되고 져야만 승리하는 놀랍고 영원한 신비 지으신 그대로 회복시킨 우리의 창조주 그리스도 십자가의 길로 아버지 뜻 이루셨네 그가 이 땅에 오신 이유 이제 우리에게 맡겨진 그 소망 그 사랑 그 생명 아름답고 눈부신 십자가의 길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갈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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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3) 샬롬! 오늘은 누가복음을 통해 ‘인사이더(insider)가 아웃사이더(outsider)가 되고, 아웃사이더가 인사이더가 되는 공동체’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눅 7:36-50은 한 바리새인과 한 죄인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집으로 식사 초대하고,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십니다. 그 때,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 오신 줄 알고는 예수님을 뵙기 위해 그 집에 들어갑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뒤에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예수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예수님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붓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바리새인이 속으로 말합니다. “예수님이 선지지라면 이 여자가 누구인지 알텐데.. 죄인인 여자가 이런 행동을 하도록 허용하지 않을텐데..”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은 죄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대 공동체는 아웃사이더를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아웃사이더는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야기의 결론부입니다. 이야기의 결말은 예수님과 여인을 주목합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죄사함과 구원을 선언하십니다. 이야기의 처음에 주목받지 못한 여인이 결론에서 주목받고, 바리새인에게 환영받지 못한 죄인 여자가 예수님에게 환영받습니다. 반면에, 이야기의 시작에서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하며 주목받은 바리새인은 이야기 결론에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는 조용히 사라집니다. 마치, 이야기에서 배제된 느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동체의 인사이더가 아웃사이더가 되고, 이웃사이더가 인사이더가 되는 일을 보게 됩니다. 유대 공동체의 인사이더인 바리새인은 아웃사이더가 되고, 아웃사이더인 죄인 여자는 인사이더가 된 겁니다. 이런 일이 누가복음 곳곳에서 나타나고, 아웃사이더가 인사이더가 된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님의 공동체를 이룹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왜 아웃사이더가 인사이더가 되고, 인사이더가 아웃사이더가 될까요? 그것은 ‘나의 의로움’과 관계됩니다. 나의 의로움은 나 자신에게(나 자신 안에) 있는가? 예수님께 있는가?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했지만, 그의 마음에 예수님은 손님일 뿐 자기 인생의 주인(구주)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고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자신은 의로운 겁니다. 하지만, 여인은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받지도 못했고,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느끼며 예수님께 나옵니다. 감히 예수님 앞에 서지도 못한 채, 예수님께 눈물로 나아가며 자기의 소중한 향유 옥합을 드립니다. 여인은 자기가 죄인임을 - 예수님의 죄 용서가 필요한 죄인임을 - 압니다. 여인은 자신의 의로움이 자기에게 있지 않고, 오직 예수님이 나의 의가 되심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의롭다 믿는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공동체(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에서 아웃사이더가 되고, 예수님을 나의 의로 인정하는 죄인 여자는 예수님의 공동체(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에서 인사이더가 됩니다. 이 진리를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마음을 낮춰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나의 마음을 낮춰야 합니다. 나를 낮추고 예수님만 높여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공동체 안에 들어오는 분들을 사랑과 포용으로 환영하고 환대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차별 없이 받아주시고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공동체 안의 새로운 형제들과 자매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포용하고 환영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 우리 목장, 우리 교회가 예수로만 충만한 공동체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는 없고, 오직 예수로만 충만한 공동체! 주님이 이 시대에 찾으시고 기뻐하시는 AKPC 공동체 되기를 축복합니다. Amen!
나눔 질문 내가 처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공동체에 들어왔을 때, 그 때의 감격과 기쁨을 나눠보세요. 나는 예수님의 공동체의 새로운 형제와 자매들을 어떻게 사랑으로 환영할 지 나눠봅시다. 응답 찬양: 충만 무명이어도 공허하지 않은 것은 예수 안에 난 만족함이라 가난하여도 부족하지 않은 것은 예수 안에 오직 나는 부요함이라 고난중에도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주의 계획 믿기 때문이라 실패하여도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예수 안에 오직 나는 승리함이라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내 몸이 약해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예수 안에 난 완전함이라 화려한 세상 부럽지 않은 것은 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함이라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세상 모든 것들도 부럽지 않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세상 모든 풍파도 두렵지 않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복음서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2) 샬롬! 오늘은 마가복음을 통해 ‘반전의 예수를 따르는 역설의 삶’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반전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역설적 삶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1:1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시작이라”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메시아 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은 1장부터 8장까지에서 왕이신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왕이심을 보여주는 절정의 사건이 8장의 ‘7병 2어 기적’ 다음에 등장하는데, 그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왕으로 고백합니다. (이것은 막 1:1의 선언과 같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 반전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당할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왕으로 인정받은 그 절정의 순간에,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막 9장부터 왕이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십자가로 가는 길)을 걸으십니다. 반전의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심지어 제자들에게도 충격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반전의 길을 걸으실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해방을 주기 위함이고(상황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자기 자신(죄)으로부터의 해방), 또한 우리에게 참된 삶의 모범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십자가를 지는 것에서 얻는 참된 기쁨). 반전의 예수님은 그 분을 따르는 제자들 안에 역설적 삶을 일으킵니다. 더 이상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일시적 쾌락을 따라 살지 않고,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며 영원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제자의 역설적 삶을 깨닫지 못합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직전에, 예수님은 한 맹인을 치유하십니다. 그는 한 번에 시력을 온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두단계에 걸친 예수님의 치유로 온전히 시력을 회복합니다(막 8:22-25 참고). 이 사건은 상징적인 사건일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은 마가복음 8장까지 예수님을 따랐지만 - 예수님이 왕이신 것을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지만 - 이들의 영적 시력은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온전한 회복을 위해 맹인에게 한 번 더 주님의 치유가 필요했듯이, 온전한 영적 회복을 위해 제자들에게는 마가복음의 후반부(막 9-16장, 왕으로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는예수님)이 필요한 겁니다. 반전의 예수님을 따르는 역설적 제자의 삶을 잘 보여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맹인 거지 바디매오입니다(막 10:46-52). 그는 길에서 예수님 이야기를 듣고 소리칩니다. 예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칩니다. 그리고 걸음을 멈춰선 예수님의 긍휼을 입고 치유 받습니다. 그런데, 치유 받은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걷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예수님이 걸으시는 길을 따라 걷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반전의 왕 예수님을 따라 역설적 제자의 삶을 사는 겁니다. 역설적 제자의 삶을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이 삶을 환영하지 않고 조롱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삶이 생명의 삶인 줄 알기에 이 삶을 기꺼이, 기쁨과 자원함으로, 살아갑니다. 반전의 왕 예수를 따르는 역설적 제자의 삶, 이것이 은혜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삶입니다. 오늘도 역설적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님들을 주님께서 위로하시고 힘주시를 소망합니다. 왕이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세상을 향해 역설적 제자의 삶을 살아내는 AKPC 공동체 되기를 축복합니다. Amen!
나눔 질문 반전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은 역설적 삶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왕)로 고백만 하며 살았는지, 그 분을 따르는 진정한 제자의 길을 걸었는지 나의 삶을 점검해 봅시다. 응답 찬양: 예수의 길 &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후렴) 안개 속에서 주님을 보네 아무도 없을 것 같던 그 곳에서 손 내미셔서 나를 붙드네 길 잃고 쓰러져가던 그 곳에서 주 말씀하시네 내 손 잡으라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 생명이니 나 그 길을 보네 주 예비하신 곳 다른 길로 돌아서지 않으리 예수의 길 그 좁은 길 나는 걷네 주 손 잡고 그 무엇도 두렵지 않네 주님 주신 약속 내게 있으니 세상의 길 그 험한 길 승리하네 성령으로 그 무엇도 바라지 않네 저 하늘에 내 소망 있으니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복음서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1) 샬롬! 오늘부터 8월 한 달 동안은 ‘복음서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주제로 말씀을 나눕니다. 오늘은 첫 시간으로 마태복음을 통해 ‘우리의 본성을 거스리는 은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마 20:1-16은 ‘포도원 품꾼 비유’입니다.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에 나가서 품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하고 포도원으로 들여보냅니다. 그리고 제삼시(오전 9시), 제육시(낮 12시), 제구시(오후 3시), 그리고 제십일시(오후 5시)에도 나가서 품꾼들을 찾아 포도원으로 들여보냅니다. 그리고 해가 저물 때가 되자 주인은 청지기를 불러 일꾼들에게 품삯을 지급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온 자도 한 데나리온을 받고 먼저 온 자도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이에 먼저 온 자들이 주인을 원망합니다. 나중에 온 자와 먼저 온 자를 동일하게 대우하는 주인의 처사가 불공평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주인은 원망하는 자에게 “나는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온 자에게도 먼저 온 자와 같이 주는 것이 주인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은혜의 본질(은혜란 무엇인가)을 보여줍니다. 먼저, 주인은 자신이 직접 일꾼들을 찾아 나섭니다. 일꾼 찾는 일을 자신의 십장에게 맡겨도 되지만, 주인은 직접 일꾼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하루에 다섯 번이나 반복합니다. 다음으로, 주인이 일꾼들을 찾아 나선 것은 주인에게 지금 일꾼들이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일꾼들에게 일(일자리)를 제공해주기 위해서입니다. 오후 늦게 고용된 일꾼들이, 심지어 오후 5시에 고용된 일꾼들이, 주인에게 과연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6-7절 참고). 또한 아침에 와서 일을 시작한 사람에게도(주인을 향해 원망하는 사람에게도) 주인이 약속한 한 데나리온은 사실 비숙련 노동자의 일당 치고는 굉장히 많은 액수입니다. 그러면, 주인은 왜 이토록 특별한 호의(은혜)를 일꾼들에게 베푸는 걸까요? 그것은 주인의 마음 안에 있는 긍휼(compassion)입니다. 주인은 가난한 일꾼들이 하루의 품삯을 얻지 못하면, 그리고 한 시간만 일한 일꾼들이 그 시간에 대한 삯만 받는다면, 그들은 가족들의 저녁 식사를 준비할 돈이 없을 거란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일꾼들이 원하는 것을 풍성히 주는 겁니다. 일꾼들의 자격, 일꾼들의 노력 이상으로 풍성히 베푸는 겁니다. 하지만, 원망하는 사람은 주인 안의 긍휼을 몰랐고, 그리하여 그가 받은 은혜를 망각했던 겁니다. 원망하는 우리의 본성은 은혜를 거스릅니다. 그리고 은혜는 우리의 본성을 거스릅니다. 긍휼이 풍성한 은혜의 포도원 주인, 그 분은 누구일까요? 우리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그 분 자신을(그의 가장 소중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기꺼이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은혜의 하나님을 알아가고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매일 삶 가운데 은혜로 우리 본성을 이기고, 은혜로 형제와 자매를 대하며, 은혜로 이웃과 세상을 품는 AKPC 공동체 되기를 소망합니다. Amen!
나눔 질문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때로는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여전히 죄된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된 본성을 이기고 은혜 안에 살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응답 찬양: 은혜 1.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 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2.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 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후렴)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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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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