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양의 피로 새롭게 시작하라! 샬롬! 세상을 살다보면 내 삶을 리셋(reset; 초기화)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인생 리셋을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내 삶을 새롭게 다시 출발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진정한 인생 리셋의 길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인생 리셋을 위해 붙들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어린 양의 보혈입니다. 어린 양 예수님의 보혈로, 십자가의 은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유월절 사건은 하나님 백성의 리셋 사건입니다. 자유민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자유를 빼앗기고 탄식과 고통 속에 살아갈 때, 그리고 바로의 억압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고 소망 없이 살아갈 때,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백성을 다시 하나님 백성의 자리에 되돌리고, 하나님 백성이 다시 새로운 목적과 방향을 향해 인생 리셋을 하게 하십니다. 이 때, 하나님이 그 분의 백성을 위해 예비하신 길이 ‘어린 양의 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각자 자신의 집에 어린 양의 피를 뿌림으로 죽음에서 생명을 얻고 지금까지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 새롭게 인생 리셋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도 인생 길에서 피곤하고 지칠 때, 사탄의 공격으로 넘어지고 쓰러질 때, 예기치 못한 인생의 실패와 좌절을 경험할 때 어린 양 예수님의 피를 붙들 수 있습니다. 어린 양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살리고 일으키고 우리 삶을 다시 새롭게 리셋하게 하십니다. 어린 양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새로운 출발이고, 우리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어린 양의 보혈은 그 효력이 한 번에 그치지 않습니다. 출애굽의 첫 유월절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매년 유월절을 지킵니다. 유월절을 지키면서 이스라엘 공동체를 리셋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기념하면서 하나님의 리셋의 은혜에 반복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린 양 예수님의 보혈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우리를 새롭게 리셋하십니다. 참 기쁨과 소망을 향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 삶을 리셋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서 인생 리셋을 체험하고, 우리 인생을 리셋시키는 어린 양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를 이웃과 세상에 전하는 AKPC 성도님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Amen! Family Talk (영유아부/유치부: 마 26:6~16, 유년부/Youth: 요 12:1~8) (영유아부)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 드렸던 향유처럼 나도 예수님께 드리고 싶은 소중한 것은 무엇이있나요? (유치부) 마리아는 왜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나요? (CM) 마리아는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했기에 가지고 있는 귀한 향유를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았을까요? (Youth)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요? (장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감으로, 어린 양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함으로 인생 리셋을 체험한 적이 있으면 나눠봅시다. 응답 찬양: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나의 삶의 문이 열렸네 저 어둠의 권세는 힘이 없네 주 보혈의 능력으로 원수가 날 정죄할 때도 난 의롭게 설 수 있네 난 더 이상 정죄함 없네 난 주 보혈 아래 있네 난 주 보혈 아래 있네 그 피로 내 죄 사했네 하나님의 긍휼 날 거룩케 하시었네 난 주 보혈 아래 있네 난 원수의 어떠한 공격에도 더 이상 넘어 지지 않네 난 주 보혈 아래 있네
0 Comments
평범한 일상 속에 숨겨진 특별한 하루 샬롬!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특별한 ‘하루’ 보다 일상의 평범함 속에 살아가는 더 많은 ‘하루’를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너무 지루하고 평범하다고 생각하며 성경에 나오는 많은 믿음의 선조들과 같은 뭔가 특별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리브가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삭의 아내가 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천만인의 어머니가 되는 특별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의 선조들에 대한 성경의 내용이 대부분 뭔가 특별한 일만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보냈던 더 많은 평범한 ‘하루’를 생각해 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특별한 사명을 받고 그 일을 하기까지 그들이 보냈던 평범한 ‘하루’와 부르심 이후에도 계속되어진 너무나 평범한 ‘하루’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평범한 하루를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인생에 찾아온 주님이 동행하시고 함께 하시는 하루는 이미 그들에게는 특별한 하루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너무나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찬양하고, 일상에서 매일 같이 사용하고 누리는 아주 작은 것에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앞으로 하실 일들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결코 그들이 평범한 하루를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평범한 하루가 아니라 이제는 특별한 하루를 살아간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쁨가운데 오늘 하루를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면 실수가 없으시고 완전하신 하나님께서는 때가 차면 우리를 불러 주시고 사용하여 주실것입니다. AKPC의 모든 성도님들이 오늘 이 믿음을 가지고 오늘이라는 특별한 ‘하루’를 감사와 기쁨으로 보내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Amen! 나눔 질문 우리의 일상이 지루하다고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어떤 변화가 우리의 삶 가운데 찾아오면 우리가 이제는 지루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특별함은 과연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을까요? 응답 찬양: 하나님의 부르심 & 하늘 보좌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네 내가 이 자리에 선 것도 주의 부르심이라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결코 실수가 없네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네 작은 나를 부르신 뜻을 나는 알 수 없지만 오직 감사와 순종으로 주의 길을 가리라 때론 내가 연약해져도 주님 날 도우시니 주의 놀라운 그 계획을 나는 믿으며 살리 날 부르신 뜻 내 생각보다 크고 날 향한 계획 나의 지혜로 측량 못 하나 가장 좋은 길로 가장 완전한 길로 오늘도 날 이끄심 믿네 오 하나님 그 빛난 얼굴 뵈오며 두 손 들고 나아가리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그 하늘 보좌 위의 주님께 십자가는 수단이 아닌 목표입니다. 샬롬! 십자가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며 우리 삶의 모든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실에 대해 부인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없겠지만, 이를 바르게 깨닫고 적용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이 내용에 대하여 깊이 묵상하며 우리의 중심과 삶 속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는 능력”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씻겨 주었고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놀라운 베너핏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십자가는 다른 이유 때문에 큰 능력입니다. 웨민 소교리문답 4문에 따르면, 하나님은 능력과 지혜와 거룩하심과 자비가 무한하고, 영원하고, 끝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편에서의 능력과 하나님 편에서 능력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그 무한한 권세의 일부를 드러내는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에서 증거해 주셨듯이, 성자 하나님께서 무한한 권세를 드러내지 않으시고 그 무한한 능력으로 죽기까지 인내하신 것이 더 큰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능력안에 담아내신 내용은 “사랑, 오래참음, 겸손, 희생”(고전13) 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도구로 구원받음이라는 베너핏을 얻은 후에, 십자가는 그저 보관만 하고 이전과 같이 그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은 십자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증거입니다. 그 십자가에 성자 하나님의 얼마나 큰 능력이 담겨있는지 깨달은 사람은, 십자가에 새겨진 그 고귀한 사랑과 겸손과 희생 등을 자신의 삶의 최우선의 가치로 두고 그것을 위해 부단히 싸우며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수단이 아닌 우리 인생의 목적이자 모든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갈라디아서 2:20절 말씀처럼, 우리의 육신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고 오직 우리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능력의 십자가를 우리의 중심에 품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품어주고, 덮어주고, 참아주고, 인내하고, 헌신하고,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높은 가치를 따라살아가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임하시옵소서” 라고 삶으로 찬양하는 모든 AKPC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Amen! 나눔 질문 십자가가 우리의 인생의 수단이 아닌 참 목표가 되게 하기 위해 포기해야할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다시 세워야 할 것은 무엇일지 함께 나눠봅시다. 응답 찬양: 나의 모습 나의 소유 나의 모습 나의 소유 주님 앞에 모두 드립니다 모든 아픔 모든 기쁨 내 모든 눈물 받아주소서 어제일과 내일일도 꿈과 희망 모두 드립니다 모든 소망 모든 계획 내 손과 마음 받아주소서 (후렴) 나의 생명을 드리니 주 영광 위하여 사용하옵소서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주를 찬양하며 기쁨의 제물되리 나를 받아주소서 달려가는 삶 샬롬! 신앙은 목표를 향해 꾸준히 인내하며 달려가기에 마라톤과 비슷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인의 삶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삶이라고 권면합니다. 첫째, 사도 바울은 과거를 잊어 버리고 달려가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때로는 과거에 얽매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과거의 잘한 일, 못한 일 등에 얽매이면 현재의 삶에서 진전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영접한 후 엘리트의 삶을 배설물로 여기며, 복음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과거에 얽매이기 보다는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성숙은 과거보다 현재가, 현재보다 내일이 더 나은 상태를 말합니다. 성숙한 신앙은 과거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앞에 있는 것을 바라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둘째,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라고 권면합니다. ‘푯대를 향하여’의 의미는 푯대를 똑바로 쳐다보고 입니다. 우리가 달려가는 경주에 있어서 목적과 방향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간다고 하지만, 방향과 목적이 다르면 그것은 헛수고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좁은 길이며, 좁은 문입니다. 경주 후에 주어질 부름의 상을 생각하며 열심으로 달려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는 늘 예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한 걸음 뛰어가는 삶입니다. 셋째, 함께 달려가라고 권면합니다. 15절, 16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신앙의 경주는 함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주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의 신앙의 성숙도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조화와 협력을 통해 보조를 맞추라고 합니다. 서로가 발 맞춰 함께 달려가는 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공동체를 이루게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함께 달려가 주님이 주신 상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푯대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함께 달려가는 삶입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믿음의 결단으로 주님께 달려가는 귀한 AKPC 성도님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Amen! 나눔 질문 우리의 믿음의 경주를 방해는 것인 무엇인지 나눠보고, 오늘 말씀을 듣고 결단한 것을 나눠봅시다. 응답 찬양: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지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 주시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 가리라 주의 영광 온 땅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샬롬!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은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의 원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 붙어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과 기독교인의 상호 거주의 원리를 통하여 가지인 우리는 포도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내주하심과 말씀으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는 묵상과 순복, 순종을 통해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열매 맺는 가지는 농부이신 아버지께서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가지치기를 해 주십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붙어있는 가지 중에도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가 존재하며, 이것을 아버지께서 심판하실 것을 경고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의 진위는 열매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맺는 대표적인 열매는 내적 열매, 삶의 열매, 영혼 구원입니다. 나무 되신 주님께 건강하게 붙어서 그 분의 영양분을 잘 받음으로 주께서 기대하시는 극상품 포도나무를 맺는 공동체 되길 축원합니다.
핵심 교리: 그리스도인의 열매 그리스도께 붙은 자가 맺는 내적 열매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같이 인격의 변화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내적 열매는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교회에서 가시적인 삶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이는 사랑과 수고와 헌신의 결과로 맺어지는 영적 열매입니다. 그 중 가장 귀한 열매는 영혼 구원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불신자가 예수를 영접하게 될 때 천국 잔치를 차리 실만큼 기뻐하십니다. 그리스도와의 연결 포도나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상징했습니다. 특히,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을 부른 단어였습니다. 시편 80편에는 황폐한 포도나무의 회복을 위해서는 보좌 우편에 계신 인자가 힘있게 서야 한다고 계시적 말씀을 함으로써 오실 예수님이 하실 일을 보이셨습니다. 이렇게 오신 분이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께 접붙인 바 됨으로써 죄로 인해 들포도가 되었던 이스라엘은 극상품 포도로 회복될 것입니다. 나눔 질문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 열매를 맺듯,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 있어 맺는 열매는 무엇일까요? 응답 찬양: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그 크신 사랑 나타나 내 영혼 거듭났네 주 내 맘에 늘 계시고 나 주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내 친구 되신 예수님 날 구원하시려고 그 귀한 몸을 버리사 내 죄를 대속했네 나 주님을 늘 믿으며 그 손을 의지하고 내 몸과 맘을 바쳐서 끝까지 충성하리 내 진실하신 친구여 큰 은혜 내려주사 날 항상 보호하시고 내 방패 되옵소서 그 풍성한 참 사랑을 뉘 능히 끊을 쏘냐 날 구원하신 예수는 참 좋은 나의 친구 창문을 열면 샬롬! B.C. 605 년 바벨론은 남유다를 침공하여 승리를 거둔 후, 귀족과 왕의 자녀들을 바벨론으로 데리고 갑니다. 반역을 막기 위한 바벨론의 식민지 통치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바벨론의 언어와 사상을 가르쳐 그들을 바벨론의 사람으로 만들고 그들을 이용하여 초강대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전략이 숨어 있었습니다. 아직 성장하고 있는 그 소년들을 위해 바벨론 왕은 그의 음식과 포도주를 그들에게 제공해 줍니다. 하지만 그 소년들 사이에 끼어 포로로 끌려왔던 다니엘은 이방신의 제사에 쓰였던 왕의 음식은 먹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웁니다.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역사의 흔적에서 지워 버린 후 다리오가 그 땅을 다스리게 되었을 때, 다리오는 다니엘의 뛰어난 능력을 알아보고 그를 나라를 다스리는 세 명의 총리 중 한명으로 세웁니다. 하지만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다른 총리와 관리자들은 꾀를 내어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가 죽게 되는 상황을 만들어 냅니다. 바로 다리오 왕 외에는 그 어떤 신들에게나 사람에게 30 일 동안은 그 무엇도 구하거나 빌면 안 된다는 내용의 금령을 왕이 도장을 찍어 주는 것으로 실행이 되게 한 것입니다. 30 일동안 모든 문을 닫은 채 조용히 기도를 했어도 되었지만, 다니엘은 전에 하던 것과 같이 창문을 활짝 열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다니엘은 왜 이렇게 고집스러운 행동을 했던 것일까요? 그리고 다니엘이 고집을 꺽지 않고 창문을 활짝 열고 기도를 했기 때문에 일어나게 되었던 결과는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고집스럽게 행하는 일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행동인지 살펴보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돌이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고집스럽게 하기로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어지길 소원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의 창문을 어떤 상황속에서도 열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은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건져내 주신 것과 같이 우리를 신실하게 보호해주시고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아멘 나눔 질문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의 창문을 항상 열어 두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것을 위해 우리가 버려야 할 세상을 향하고 있는 우리의 고집은 무엇일까요? 응답 찬양: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후렴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아서 날마다 기도합니다 괴롬과 죄가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빛나고 높은 저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갑니다 다시금 기도하오니 내 주여 인도하소서 후렴 내주여 내 맘 붙드사 그곳에 있게 하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후렴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 샬롬!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 중 특히 12절에 등장하는 “영접”이라는 선택을 한 사람을 높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선택을 한 사람이 가지게 되는 복에 대해서 당연히 여기게 됩니다. 그렇게, 그 복을 쟁취할 수 있는 선택을 한 주체인 사람을 높이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12절 전 후의 말씀을 확인하면 그럴 수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9~11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포함한 온 세상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서 드러내고 계십니다. 세상은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은 당시의 몇몇 악한 사람만이 아닌, 죄성을 가진 모든 사람이라는 사실을 로마서 3장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절대로 스스로 믿음이라는 고귀한 것을 선택할 수 없고, 주님을 영접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요한복음 1:12절에서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불가능한 영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믿음을 가진 자이며,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진 자라고 선포하십니다. 이어서 이러한 아이러니를 이해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13절을 선포해 주십니다. 12절에 영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람에게서 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즉, 오늘날 우리가 가진 믿음과 영접이라는 선택이 우리가 만들어낼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열심으로 이루어낸 결과였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러한 우리가 얼마나 큰 복된 권세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선포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 기적적인 믿음을 소유한 우리의 남은 인생은 기적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속에 있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누리고, 동행하는 시간일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심에 새기신 그 놀라운 “믿음”은 장차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으실 그 놀라운 은혜들의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애를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승리로 귀결시키실 것입니다. 그렇게 승리할 수 밖에 없는 기적적인 믿음을 가진 자로서의 큰 축복과 감사와 감격이 여러분 인생에 넘치시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나눔 질문 그렇다면,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그 기적적인 믿음과 영접을 우리 안에 이루어내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가,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 담아내야 하는 삶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응답 찬양: 하나님의 은혜(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이땅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 은혜 기쁨의 공동체 샬롬! 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를 향해 쓴 편지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기쁨이요 자랑인 빌립보 교회가 ‘기쁨의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교회가 기쁨의 공동체가 될 수 있는 비밀은 무엇일까요? 첫째, ‘예수님처럼 자기를 비움으로’ 입니다. 빌 2장의 ‘그리스도 찬미송’(2:6-11)은 하나님의 본체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신 예수님의 자기 비움을 보여줍니다. 가장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 가장 낮은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고 사람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본받는 제자로서 자기 비움의 삶을 삽니다. 주님을 섬기면서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않고 서로를 소중한 존재로(나보다 더 나은 존재로) 여깁니다. 둘째, ‘옛 일은 잊고 목표를 향해 함께 달려감으로’ 입니다. 성도는 달리기를 하는 사람입니다. 과거에 매이지 않고 새로운 푯대를 향해 달리는 사람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잡힌 것을 잡으려고 달리는 것입니다(3:12). 믿음으로 얻은 구원(구원의 즉각성)은 출발선이고, 성도는 구원의 완성의 결승선을 향해 달려갑니다(구원의 점진성) (2:12). 성도는 각자 소명과 사명을 따라 달리지만, 공동체 전체로 볼 때는 우리 모두 함께 달립니다(3:16). 함께 달리면서 서로를 격려하고 일으켜 세울 때 공동체는 기쁨이 충만합니다. 셋째, ‘나에게 능력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입니다. 바울의 위대한 고백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3). 바울은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 감옥 안에서든 밖에서든 –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공급하심을 믿기에 자족합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의지할 때, 하나님은 공동체에 풍성한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이루게 하십니다.
기쁨이 점점 사라지는 오늘, 우리 교회가 기쁨의 공동체로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빌립보서의 ‘기쁨의 공동체의 비밀’을 충만히 누리고 살아내는 교회,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기쁨을 풍성히 나누는 교회 AKPC 되기를 소망합니다. Amen! 나눔 질문 우리 교회가 기쁨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 나는 어떤 성도로 섬겨야 할까요? 응답 찬양: 기대 (주 안에 우린 하나) 주안에 우린 하나 모습은 달라도 예수님 한분만 바라네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를 격려해 따스함으로 보듬어가리 주님 우리안에 함께하시니 형제 자매의 기쁨과 슬픔 느끼네 네 안에 있는 주님 모습보네 그분 기뻐하시네 주님 우릴 통해 계획하신일 부족한 입술로 찬양하게 하신일 주님 우릴 통해 계획하신일 너를 통해 하실일 기대해 서로 사랑하라 샬롬! 사람이 죽음이 임박하면 겸손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본질적인 것을 챙기게 되듯, 예수님도 이 땅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하실 때 마지막 순간을 제자들과 함께 보내셨습니다.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찬과 세족을 베풀어 주심으로써 이들이 하나된 공동체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후에 제자들에게 하신 첫 번째 당부가 “서로 사랑하라” 입니다. 그래서 이 당부는 교회 공동체성을 유지하는 핵심적인 계명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단순한 말씀 앞에서 겸손하고 솔직하게 스스로를 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 중에는 ‘다름’과 ‘미성숙’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가 매우 다릅니다. 또한, 각자가 다른 인격 성숙의 단계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러한 다름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남을 사랑하지 못할 타협의 마음을 버려야 진정한 형제 사랑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몇 가지 기준을 제시해 주고 계십니다. 첫째,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너무 애쓰지 마”라고 하지만, 주님은 ‘할 수 없는 가운데 사랑하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의 본을 닮으면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극복하고 어떻게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둘째,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랑을 성령의 열매라로 말합니다. 즉, 성령님이 나를 다스려야만 사랑의 열매가 맺힌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가 답입니다.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제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 솔직하게 주님께 고백하고 기도하면 성령님께서 반드시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수고입니다. 원래 사랑은 수고가 따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이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부를 것입니다. 그런 축복을 누리는 AKPC 공동체 되기를 소망합니다. Amen!
나눔 질문 내가 형제를 내 몸같이 사랑하기 위해서 버려야 될 것과 집중해야 될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응답 찬양: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의 힘을 의지할 수 없으니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참 소망이 되심이라 주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세상의 것 의지할 수 없으니 감사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참 기쁨이 되심이라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젼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기도의 삶 샬롬!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향해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삶에 대하여 권면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마지막으로 기도에 관련하여 바울은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첫째, 영혼이 깨어 있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깨어 있다는 의미는 영적으로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영적인 생명력을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처해 있는 상황(잘못된 사상, 철학, 속임수, 이단) 속에서 믿음을 지키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도에 힘쓰며, 영적으로 살아 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영적인 민감함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영적 분별력이 무뎌 질 때 우리는 쉽게 죄의 유혹에 넘어지고 믿음이 흔들리기 때문에, 바울은 기도에 힘쓰고, 깨어 있어야함을 강조합니다. 둘째, 기도할 때 감사하라고 권면합니다. 간구에 몰두하다 보면 감사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기도할 때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기도를 보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송축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먼저 해야 할 것은 감사입니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그 감사가 기도에 풍성해야 할 것을 바울은 권면합니다. 셋째,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3~4절 바울은 자신과 같이 복음 전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들의 안위, 형통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중보기도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목사, 전도사, 선교사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말씀과 사역을 위해 기도해야 함을 바울은 권면합니다. 또한 시야를 넓혀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비전을 따라 복음과 사랑을 전할 수 있도록,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 목장의 목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권면입니다.
바울의 기도에 대한 권면을 살펴보았습니다. 무더운 여름, 영적 민감함과 분별력을 위해 우리는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하며, 염려가 아니라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하며, 또한 기도를 필요로 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로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AKPC 성도님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Amen! 나눔 질문 얼마나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지 개인의 기도생활을 점검해 보고, 오늘 말씀을 듣고 결단한 것을 나눠봅시다. 응답 찬양: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의 힘을 의지할 수 없으니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참 소망이 되심이라 주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세상의 것 의지할 수 없으니 감사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참 기쁨이 되심이라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
주일설교 산책주일 2부예배 설교 아카이브
September 2024
카테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