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펠 프로젝트 6-4 샬롬! <에스라>서는 하나님의 회복의 스토리입니다. 70년간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회복시키십니다. 이스라엘은 포로 생활을 마치고 본토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무너진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회복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약속하신 말씀(예언)이 성취된 겁니다.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이스라엘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0).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한 회복을 이미 계획하셨고, 하나님의 때가 되자 그 계획을 이루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특별한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겁니다. 먼저, 하나님은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십니다. 고레스는 이방 왕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방 왕 고레스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켜 포로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는 고레스 칙령(the Edict of Cyrus, B.C 539)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고레스 왕은 바벨론 땅의 모든 거주민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백성들을 성심껏 도와주고, 이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바칠 예물도 손에 들려주게 하고, 또한 과거 느부갓네살 때 탈취해온 예루살렘 성전의 그릇들(성물들)을 돌려주도록 명령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감동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귀환에는 헌신과 희생이 요구됩니다. 바벨론 땅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자들은 1,500km의 험난한 길을 걸어야 하고,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폐허가 된 성전 터에 새 성전을 건축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 중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이 자원하여 일어납니다. 이들은 바벨론 땅에서의 평안함과 안락함을 뒤로 하고, 예루살렘 성전 회복을 위한 비전과 사명에 자신의 삶을 기꺼이 던집니다. 이들의 헌신과 희생을 통해 장차 새로운 예루살렘 성전(2차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집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여 부르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자들의 자발적인 순종, 헌신, 희생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세워집니다. 하나님의 감동에 기쁨으로 반응하고,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부흥을 위해 귀하게 쓰임받는 AKPC 공동체 되기를 소망합니다. Amen!
핵심 교리 8: 성경의 보존 하나님은 영감을 불어넣어 오류가 없게 하신 성경 본문을 통해 인류에게 자신을 계시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성경 본문이 미래 세대를 위해 충실히 보존될 수 있도록 역사 흐름 속에서 섭리하셨습니다. 정경의 형성 과정과 수 세기에 걸친 사본들의 충실한 전달 과정이 성경 보존에 관한 믿음을 뒷받침해 줍니다. 그리스도와의 연결 하나님은 바벨론의 포로가 된 자기 백성을 구해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셨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자유를 되찾아 주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세상의 포로가 된 상태이기에 구원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포로 생활을 끝내기 위해 오셨고, 그들을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여 하나님께 예배할 자유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Family Talk (영유아부) 고향으로 돌아오는 백성들의 다양한 마음들을 표현해 볼까요? (유치부) 하나님의 백성을 고향인 예루살렘으로 데려오신 분은 누구이신가요? (CM) 하나님은 약속대로 하나님의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집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인가요? (Youth) 하나님이 회복하심을 체험한 적이 있나요? (장년) 나는 하나님께 감동을 받아 자발적으로 하나님 나라(교회)를 위해 헌신한 적이 있나요? 응답 찬양: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네 내가 이 자리에 선 것도 주의 부르심이라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결코 실수가 없네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네 작은 나를 부르신 뜻을 나는 알 수 없지만 오직 감사와 순종으로 주의 길을 가리라 때론 내가 연약해져도 주님 날 도우시니 주의 놀라운 그 계획을 나는 믿으며 살리 날 부르신 뜻 내 생각보다 크고 날 향한 계획 나의 지혜로 측량 못하나 가장 좋은 길로 가장 완전한 길로 오늘도 날 이끄심 믿네 신실하신 주를 찬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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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펠 프로젝트 6-3 샬롬! 우리 삶에는 다양한 고난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시기와 질투로 모함을 받아 겪는 고난이 있습니다. 단 6장의 다니엘이 그렇습니다. 그는 왕 앞에 충성스러운 신하였습니다. 왕은 그를 높여 페르시아 제국의 수석 총리로 삼았습니다. 이에 다른 총리들과 고관들은 다니엘을 미워했고 그를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다니엘에게서 아무 허물도 찾지 못했고, 이들은 다니엘의 신앙을 문제 삼아 그를 함정에 빠뜨리고자 합니다. 삼십일 동안 왕 외에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기도하는 자가 있으면 그를 사자 굴에 던지기로 하는 조서를 만들고 왕의 재가를 받습니다. 이들은 다니엘이 평소에 자기 집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알기에 기도하는 다니엘을 표적으로 삼으려는 겁니다. 다니엘은 인생의 큰 위기를 맞습니다. 이 때, 다니엘은 어떻게 했나요? 그는 여전히 기도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왕의 조서의 준엄함을 알고도 평소처럼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전과 같이 하루 세 번씩 기도합니다. 다니엘의 기도는 타협하지 않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또한 감사함으로 드려지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로 인해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자들의 입에서 다니엘을 구원하셨고, 이를 통해 다니엘의 무죄를 입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을 참소하던 자들은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목격한 다리오 왕은 나라의 온 백성들에게 하나님을(다니엘의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명령합니다.
삶의 고난 속에 있을 때, 다니엘처럼 여전히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AKPC 성도님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역사와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 하시고 고난에서 구원해주실 줄 믿습니다. Amen! 핵심 교리 81: 신자의 제사장직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히 제사장을 통해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곧 제사장의 나라가 되게 하는데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 제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 직접 나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지성소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던 휘장이 찢어진 것이 예시하는 바처럼,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은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결 하나님은 다니엘을 죽음에서 건지시는 능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이르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자기 아들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능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Family Talk (영유아부) 하나님은 다니엘이 겪고 있는 위기를 어떻게 바꾸셨나요? (유치부) 다니엘은 어떻게 사자 굴 속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나요? (CM) 다니엘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통해서 배울점은 무엇인가요? (Youth) 다니엘이 바벨론 법에 반대할 때 기도가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장년) 나는 삶의 역경에 부딪힐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습을 어떻게 보여주나요? 응답 찬양: 나의 기도하는 것보다 나의 기도하는 것보다 더욱 응답하실 하나님 나의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이루시는 하나님 우리 가운데 역사하신 능력대로 우리들의 간구함을 넘치도록 능히 하실 주님께 모든 영광과 존귀 찬양과 경배를 돌릴지어다 모든 영광과 존귀 찬양과 경배를 돌릴지어다 가스펠 프로젝트 6-2 샬롬! 단 5장에서, 벨사살 왕은 귀족들을 위한 큰 잔치를 베풉니다. 그는 잔치 중에 선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빼앗아온 금, 은 그릇들을 가져오게 하여 술잔으로 사용하고, 술을 마신 후에는 바벨론의 신들을 찬양합니다. 이 때,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 왕궁 벽에 글자를 씁니다. 이것을 목격한 왕은 충격과 두려움에 빠집니다. 바벨론의 술객과 점쟁이를 불러 그 글자를 읽고 해석하게 하지만 아무도 할 수 없었고, 왕비의 제안으로 다니엘을 부릅니다. 다니엘은 왕 앞에 서서 왕의 교만을 책망하며, 벽에 기록된 글자를 해석합니다. 해석된 내용은 하나님이 벨사살 왕을 저울에 달아보았는데 부족하여 나라(바벨론)를 메대와 바사 둘로 나누신다는 겁니다. 그 날 밤, 벨사살 왕은 죽임을 당하고, 바벨론은 메대의 다리오 왕의 손에 넘어갑니다. 오늘 목장 모임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저울에 달아보는 분이신 것과, 하나님 앞에서 교만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핵심 교리 12: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뜻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죄를 지으실 수는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완전한 도적적 성품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죄 짓는 일을 의도하지 않으시고, 그런 일을 하실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믿음 안에서 안식을 누리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유익과 기쁨을 위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데서 큰 위안을 얻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결 벽에 쓰인 글씨는 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게 된, 자격 없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또한 확증했습니다. 목장 나눔 질문 1. 벨사살 왕이 귀족 천 명을 위해 큰 잔치(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잔치)를 벌인 동기는 무엇이며, 그가 예루살렘 성전의 그릇들을 술잔으로 사용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2. 벽에 글씨를 쓰는 손가락을 본 벨사살 왕은 어떻게 반응하나요? (5:6, 9). 벨사살 왕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게 되나요? 3. 왕과 다니엘의 대화를 통해( 5:16-17), 우리는 다니엘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나요? 다니엘은 무엇에 관심이 있나요? 4. 다니엘은 왕궁 벽에 기록된 글씨를 읽고 해석합니다. 그 글씨와 그 뜻은 무엇입니까? (5:25-28). 여기에서, 우리는 ‘인생을 저울에 달아보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됩니다. 만약 하나님이 내 인생을 저울에 달아보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내 인생을 저울에 달아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돌이키고 회개할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지 나눠보세요. (합심 기도) 내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며, 내 인생의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때에 주님께 칭찬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항상 내 입술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흘러 넘치도록 기도합시다. 우리 가정, 목장, 교회가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나아가는 공동체(말씀, 제자, 미셔널 공동체) 되도록, 내가 품은 전도 대상자와 우리 목장의 선교사님 가정과 사역을 위해 합심하여 기도합시다. Family Talk (이번 주 영유아부, 유치부 본문은 단 3장입니다) (영유아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뜨거운 불 속에서도 안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유치부)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어떻게 불속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나요? (CM) 벨사살은 교만 때문에 멸망하였고 다니엘은 겸손함으로 하나님께 높임을 받았습니다. 가정 생활에서 겸손할 수 있는 방법을 나누어 보세요. (Youth)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높였던 때가 있나요? 응답 찬양: 신실하게 진실하게 &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후렴)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하소서 (x2) 하나님 나의 마음 만져주소서 하나님 나의 영혼 새롭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하소서 (x2) 하나님 나의 기도 들어주소서 하나님 주의 길로 인도하소서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가스펠 프로젝트 6-1 샬롬! 소년 다니엘은 남유다의 왕족(혹은 귀족) 출신이지만,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갑니다. 어느 날 다니엘은 바벨론 왕궁의 인재로 선발되고, 3년의 왕궁 특별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왕의 신하(환관장 아스브나스)에게 간청합니다. 자신이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먹지 않도록 허락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다니엘은 왕의 음식과 포도주로 자기의 거룩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이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시지만, 환관장은 다니엘의 요청이 환관장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자, 다니엘은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에게 열흘 동안 채식을 먹게 하고, 열흘 후 채식을 먹은 다니엘과 세 친구들과 왕의 음식을 먹은 다른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해보는 겁니다. 다니엘의 제안은 수용되었고, 열흘 간 시험 결과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얼굴은 다른 소년들보다 더 윤택해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다니엘과 세 친구는 3년 동안 왕의 음식과 포도주 대신 채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년의 과정이 마쳤을 때,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 왕의 총애를 입고 왕의 신하들로 발탁됩니다. 다니엘은 인생의 선택의 기로에서 믿음을 위해 뜻을 정했습니다(단 1:8). 그러면 무엇이 소년 다니엘로 하여금 뜻을 정하게 했을까요? 첫째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믿음입니다. 세상에는 왕들이 있지만, 진정한 역사의 주인(the Lord)은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제국에서 살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다니엘 같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 어떤 환경에서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 뜻을 정하고 용기있는 행동을 하는 사람! 그가 ‘우리 시대의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처럼 세상을 향해 ‘살아있는 믿음’을 나타내는 AKPC 공동체와 우리 다음 세대 되기를 소망합니다. Amen!
핵심 교리 82: 신자의 새로운 정체성 그리스도를 믿으면 정체성이 근본적으로 변합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원수의 신분(엡 2:1-3)에서 하나님의 권속, 사랑받는 자녀의 신분(엡 2:19)으로 변화됩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삶, 대속적 죽음, 부활에 근거해 의롭다고 선언되고,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흑암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빛의 나라로 옮겨집니다(골 1:13).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로서(고후 5:17), 구원받은 우리는 살아서 성장하고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그리스도와의 연결 다니엘은 자기 정체성을 지켰고, 하나님께 순종했으며, 하나님 은혜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는 죄성이 없으면서도 죄 많은 세상을 기꺼이 품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킵니다. 그 분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에 드러내는 가장 위대한 장면입니다. Family Talk (영유아부) 하나님을 사랑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어떤 행동으로 그 마음을 표현했나요? (유치부)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나요? (CM) 다니엘과 친구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honor)했는지 가족과 나눠 보세요. (Youth)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으로 힘들었던 시기를 견딜 수 있었던 때를 떠올릴 수 있나요? (장년) 세상에 유혹에 맞서기 위해, 우리 자신과 우리 다음 세대는 어떻게 신앙의 노력을 해야 할까요? 응답 찬양: 오직 믿음으로 (세상 흔들리고) 세상 흔들리고 사람들은 변하여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믿음 흔들리고 사람들 주를 떠나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나라는 영원히 쇠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복음서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4) 샬롬! 오늘은 ‘복음서를 통해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 시리즈의 마지막 시간으로, 요한복음을 통해 ‘그가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4복음서 중에서, 예수님의 성육신(the incarnation of Jesus Christ)을 보여주는 책이 ‘요한복음’입니다. 다시 말해,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분’으로 증거합니다. 요 1:1-3은 예수님을 태초부터 계신 말씀(로고스)로 표현하면서, 이 말씀은 하나님이시고 온 세상 만물의 창조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요 1:14은 이 말씀이 사람(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놀라움과 경이의 사건입니다. 우리의 이성과 상식을 뛰어 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의 성육신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은 이 땅을 밟고 거니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3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물과 피를 가진 사람이 되신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셨고, 그리하여 친히 우리를 위한 대속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히 9:22: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또한, 성육신은 진흙을 빚는 토기장이가 질그릇이 되신 겁니다. 만물의 창조자가 질그릇처럼 연약한 인간이 되신 겁니다. 그리하여 사람이 되신 하나님(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고,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가지고 언제든지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육신은 창조자가 피조물 가운데 한 존재가 되신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겸손입니다. 온 우주 만물의 창조자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낮춰 피조물과 같이 되신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성육신의 이유는 무엇인가요? 왜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나요? 그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하는 사다리’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하는 사다리가 되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과거 믿음의 조상 야곱이 벧엘에서 꿈에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를 보았는데, 이 사다리가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해 이뤄졌다는 말입니다. 사다리를 통해 땅의 야곱과 하늘의 하나님이 연결되었듯이, 이제는 예수님(사람이 되신 하나님)을 통해 우리(죄인인 인간)와 하나님(거룩하신 하나님)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친밀한 교제를 누릴 수 있게 된 겁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성육신으로 인해, 죄로 인해 고통하고 신음하는 세상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선한 창조의 모습으로 회복될 겁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유일한 사다리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영생의 길이신 예수님을 이웃에게 전하며,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모습으로 회복시켜가는 AKPC 공동체 되기를 소망합니다. Amen!
나눔 질문 요한복음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요? 이것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응답 찬양: 그가 오신 이유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순종의 눈물 온 세상 다시 빛나게 한 생명의 눈물 그가 이 땅에 오신 이유 죽어야 살게 되고 져야만 승리하는 놀랍고 영원한 신비 지으신 그대로 회복시킨 우리의 창조주 그리스도 십자가의 길로 아버지 뜻 이루셨네 그가 이 땅에 오신 이유 이제 우리에게 맡겨진 그 소망 그 사랑 그 생명 아름답고 눈부신 십자가의 길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갈 이유 복음서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3) 샬롬! 오늘은 누가복음을 통해 ‘인사이더(insider)가 아웃사이더(outsider)가 되고, 아웃사이더가 인사이더가 되는 공동체’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눅 7:36-50은 한 바리새인과 한 죄인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집으로 식사 초대하고,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십니다. 그 때,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 오신 줄 알고는 예수님을 뵙기 위해 그 집에 들어갑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뒤에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예수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예수님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붓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바리새인이 속으로 말합니다. “예수님이 선지지라면 이 여자가 누구인지 알텐데.. 죄인인 여자가 이런 행동을 하도록 허용하지 않을텐데..”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은 죄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대 공동체는 아웃사이더를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아웃사이더는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야기의 결론부입니다. 이야기의 결말은 예수님과 여인을 주목합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죄사함과 구원을 선언하십니다. 이야기의 처음에 주목받지 못한 여인이 결론에서 주목받고, 바리새인에게 환영받지 못한 죄인 여자가 예수님에게 환영받습니다. 반면에, 이야기의 시작에서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하며 주목받은 바리새인은 이야기 결론에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는 조용히 사라집니다. 마치, 이야기에서 배제된 느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동체의 인사이더가 아웃사이더가 되고, 이웃사이더가 인사이더가 되는 일을 보게 됩니다. 유대 공동체의 인사이더인 바리새인은 아웃사이더가 되고, 아웃사이더인 죄인 여자는 인사이더가 된 겁니다. 이런 일이 누가복음 곳곳에서 나타나고, 아웃사이더가 인사이더가 된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님의 공동체를 이룹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왜 아웃사이더가 인사이더가 되고, 인사이더가 아웃사이더가 될까요? 그것은 ‘나의 의로움’과 관계됩니다. 나의 의로움은 나 자신에게(나 자신 안에) 있는가? 예수님께 있는가?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했지만, 그의 마음에 예수님은 손님일 뿐 자기 인생의 주인(구주)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고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자신은 의로운 겁니다. 하지만, 여인은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받지도 못했고,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느끼며 예수님께 나옵니다. 감히 예수님 앞에 서지도 못한 채, 예수님께 눈물로 나아가며 자기의 소중한 향유 옥합을 드립니다. 여인은 자기가 죄인임을 - 예수님의 죄 용서가 필요한 죄인임을 - 압니다. 여인은 자신의 의로움이 자기에게 있지 않고, 오직 예수님이 나의 의가 되심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의롭다 믿는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공동체(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에서 아웃사이더가 되고, 예수님을 나의 의로 인정하는 죄인 여자는 예수님의 공동체(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에서 인사이더가 됩니다. 이 진리를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마음을 낮춰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나의 마음을 낮춰야 합니다. 나를 낮추고 예수님만 높여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공동체 안에 들어오는 분들을 사랑과 포용으로 환영하고 환대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차별 없이 받아주시고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공동체 안의 새로운 형제들과 자매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포용하고 환영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 우리 목장, 우리 교회가 예수로만 충만한 공동체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는 없고, 오직 예수로만 충만한 공동체! 주님이 이 시대에 찾으시고 기뻐하시는 AKPC 공동체 되기를 축복합니다. Amen!
나눔 질문 내가 처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공동체에 들어왔을 때, 그 때의 감격과 기쁨을 나눠보세요. 나는 예수님의 공동체의 새로운 형제와 자매들을 어떻게 사랑으로 환영할 지 나눠봅시다. 응답 찬양: 충만 무명이어도 공허하지 않은 것은 예수 안에 난 만족함이라 가난하여도 부족하지 않은 것은 예수 안에 오직 나는 부요함이라 고난중에도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주의 계획 믿기 때문이라 실패하여도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예수 안에 오직 나는 승리함이라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내 몸이 약해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예수 안에 난 완전함이라 화려한 세상 부럽지 않은 것은 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함이라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세상 모든 것들도 부럽지 않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세상 모든 풍파도 두렵지 않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복음서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2) 샬롬! 오늘은 마가복음을 통해 ‘반전의 예수를 따르는 역설의 삶’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반전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역설적 삶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1:1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시작이라”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메시아 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은 1장부터 8장까지에서 왕이신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왕이심을 보여주는 절정의 사건이 8장의 ‘7병 2어 기적’ 다음에 등장하는데, 그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왕으로 고백합니다. (이것은 막 1:1의 선언과 같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 반전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당할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왕으로 인정받은 그 절정의 순간에,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막 9장부터 왕이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십자가로 가는 길)을 걸으십니다. 반전의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심지어 제자들에게도 충격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반전의 길을 걸으실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해방을 주기 위함이고(상황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자기 자신(죄)으로부터의 해방), 또한 우리에게 참된 삶의 모범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십자가를 지는 것에서 얻는 참된 기쁨). 반전의 예수님은 그 분을 따르는 제자들 안에 역설적 삶을 일으킵니다. 더 이상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일시적 쾌락을 따라 살지 않고,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며 영원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제자의 역설적 삶을 깨닫지 못합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직전에, 예수님은 한 맹인을 치유하십니다. 그는 한 번에 시력을 온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두단계에 걸친 예수님의 치유로 온전히 시력을 회복합니다(막 8:22-25 참고). 이 사건은 상징적인 사건일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은 마가복음 8장까지 예수님을 따랐지만 - 예수님이 왕이신 것을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지만 - 이들의 영적 시력은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온전한 회복을 위해 맹인에게 한 번 더 주님의 치유가 필요했듯이, 온전한 영적 회복을 위해 제자들에게는 마가복음의 후반부(막 9-16장, 왕으로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는예수님)이 필요한 겁니다. 반전의 예수님을 따르는 역설적 제자의 삶을 잘 보여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맹인 거지 바디매오입니다(막 10:46-52). 그는 길에서 예수님 이야기를 듣고 소리칩니다. 예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칩니다. 그리고 걸음을 멈춰선 예수님의 긍휼을 입고 치유 받습니다. 그런데, 치유 받은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걷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예수님이 걸으시는 길을 따라 걷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반전의 왕 예수님을 따라 역설적 제자의 삶을 사는 겁니다. 역설적 제자의 삶을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이 삶을 환영하지 않고 조롱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삶이 생명의 삶인 줄 알기에 이 삶을 기꺼이, 기쁨과 자원함으로, 살아갑니다. 반전의 왕 예수를 따르는 역설적 제자의 삶, 이것이 은혜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삶입니다. 오늘도 역설적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님들을 주님께서 위로하시고 힘주시를 소망합니다. 왕이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세상을 향해 역설적 제자의 삶을 살아내는 AKPC 공동체 되기를 축복합니다. Amen!
나눔 질문 반전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은 역설적 삶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왕)로 고백만 하며 살았는지, 그 분을 따르는 진정한 제자의 길을 걸었는지 나의 삶을 점검해 봅시다. 응답 찬양: 예수의 길 &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후렴) 안개 속에서 주님을 보네 아무도 없을 것 같던 그 곳에서 손 내미셔서 나를 붙드네 길 잃고 쓰러져가던 그 곳에서 주 말씀하시네 내 손 잡으라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 생명이니 나 그 길을 보네 주 예비하신 곳 다른 길로 돌아서지 않으리 예수의 길 그 좁은 길 나는 걷네 주 손 잡고 그 무엇도 두렵지 않네 주님 주신 약속 내게 있으니 세상의 길 그 험한 길 승리하네 성령으로 그 무엇도 바라지 않네 저 하늘에 내 소망 있으니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복음서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1) 샬롬! 오늘부터 8월 한 달 동안은 ‘복음서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주제로 말씀을 나눕니다. 오늘은 첫 시간으로 마태복음을 통해 ‘우리의 본성을 거스리는 은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마 20:1-16은 ‘포도원 품꾼 비유’입니다.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에 나가서 품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하고 포도원으로 들여보냅니다. 그리고 제삼시(오전 9시), 제육시(낮 12시), 제구시(오후 3시), 그리고 제십일시(오후 5시)에도 나가서 품꾼들을 찾아 포도원으로 들여보냅니다. 그리고 해가 저물 때가 되자 주인은 청지기를 불러 일꾼들에게 품삯을 지급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온 자도 한 데나리온을 받고 먼저 온 자도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이에 먼저 온 자들이 주인을 원망합니다. 나중에 온 자와 먼저 온 자를 동일하게 대우하는 주인의 처사가 불공평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주인은 원망하는 자에게 “나는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온 자에게도 먼저 온 자와 같이 주는 것이 주인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은혜의 본질(은혜란 무엇인가)을 보여줍니다. 먼저, 주인은 자신이 직접 일꾼들을 찾아 나섭니다. 일꾼 찾는 일을 자신의 십장에게 맡겨도 되지만, 주인은 직접 일꾼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하루에 다섯 번이나 반복합니다. 다음으로, 주인이 일꾼들을 찾아 나선 것은 주인에게 지금 일꾼들이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일꾼들에게 일(일자리)를 제공해주기 위해서입니다. 오후 늦게 고용된 일꾼들이, 심지어 오후 5시에 고용된 일꾼들이, 주인에게 과연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6-7절 참고). 또한 아침에 와서 일을 시작한 사람에게도(주인을 향해 원망하는 사람에게도) 주인이 약속한 한 데나리온은 사실 비숙련 노동자의 일당 치고는 굉장히 많은 액수입니다. 그러면, 주인은 왜 이토록 특별한 호의(은혜)를 일꾼들에게 베푸는 걸까요? 그것은 주인의 마음 안에 있는 긍휼(compassion)입니다. 주인은 가난한 일꾼들이 하루의 품삯을 얻지 못하면, 그리고 한 시간만 일한 일꾼들이 그 시간에 대한 삯만 받는다면, 그들은 가족들의 저녁 식사를 준비할 돈이 없을 거란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일꾼들이 원하는 것을 풍성히 주는 겁니다. 일꾼들의 자격, 일꾼들의 노력 이상으로 풍성히 베푸는 겁니다. 하지만, 원망하는 사람은 주인 안의 긍휼을 몰랐고, 그리하여 그가 받은 은혜를 망각했던 겁니다. 원망하는 우리의 본성은 은혜를 거스릅니다. 그리고 은혜는 우리의 본성을 거스릅니다. 긍휼이 풍성한 은혜의 포도원 주인, 그 분은 누구일까요? 우리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그 분 자신을(그의 가장 소중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기꺼이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은혜의 하나님을 알아가고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매일 삶 가운데 은혜로 우리 본성을 이기고, 은혜로 형제와 자매를 대하며, 은혜로 이웃과 세상을 품는 AKPC 공동체 되기를 소망합니다. Amen!
나눔 질문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때로는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여전히 죄된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된 본성을 이기고 은혜 안에 살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응답 찬양: 은혜 1.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 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2.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 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후렴)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하나님 나라 샬롬! 성경에는 하나님 나라, 천국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대화입니다. 예수님에게 부정적이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묻고,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미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며,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가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골1:13,14)’ 사도 바울도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고단하고 힘들어도 우리가 이미 구원받고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것만으로도 감사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완성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대화 후 제자들에게 재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지만, 그 완성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새 예루살렘이 임할 때 완성됩니다. 신학적 용어로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원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 되었고,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완성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며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성화의 과정을 이뤄가야 합니다. 셋째,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하나님 나라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재림을 기다리는 자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17:32)’ 롯의 아내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돌아 봄으로 인해 소금 기둥이 된 것을 예수님은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함을 지적합니다. 세상의 가치관,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감으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시작되었고,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완성되며,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는 나라입니다. 우리 삶 속에 이미 이뤄진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주님의 통치를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고대하는 AKPC 성도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Amen!
나눔 질문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살아가기 위한 나의 결단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눠봅시다. 응답 찬양: 주의 나라가 임할 때 주의 나라가 임할 때 하나님 임재하실 때 예배가 회복되고 기적은 일어나네 전능하신 주 영원하신 능력의 통치자 자유가 선포되고 주 백성 돌아오네 하나님 나라 임하소서 영광과 존귀 능력과 위엄 놀라운 사랑의 기적의 하나님 지금 이곳에 오소서 주 높고 위대하심을 크게 외쳐 선포하네 만 왕의 왕 주 하나님 지금 오소서 무엇을 붙잡을 것인가 샬롬! 예수를 따르는 길에는 ‘회색지대’ 가 없습니다. 바울은 지금 가이사랴 감옥에 수감 중입니다. 베스도가 유대 총독으로 신임되고 아그립바 왕이 문안 차 가이사랴에 방문합니다. 아그립바 앞에서 바울은 자신을 변명할 기회를 얻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변증합니다. 아그립바는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알고 있는 매우 똑똑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를 알고 아그립바에게 자신이 과거에 경험한 하나님의 말씀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4절) 을 담대히 증언합니다. 구약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로 성취되었음을 풀어 설명합니다. 이를 가만히 듣고 있던 베스도가 갑자기 크게 소리를 지르며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는도다” (24절) 라며 바울을 고발합니다. 그가 말씀의 가시채에 정곡을 찔렸으며, 자신이 영적으로 궁지에 몰린 것을 반증합니다. 베스도는 그러나 “가시채 뒷발질”을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의 잘남과 자랑을 붙잡습니다. 바울은 다시 아그립바 왕에게로 향합니다. 그가 구약에 정통한 자임을 알고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27절) 묻습니다. 궁지에 몰린 아그립바는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8절) 답합니다. 바울이 자신을 ‘거의 그리스도인’ 으로 만들 뻔 했다는 말입니다. 아그립바가 이렇게 애매한 입장을 취한 이유는 그가 버니게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버니게는 그의 아내이며 누이 입니다 (근친상간). 아그립바는 죄에 붙잡힌 것입니다. 내가 붙잡는 것이 곧, 내가 붙잡히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끝까지 ‘거의 그리스도인’으로 남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무엇을 붙잡고 계십니까? 어차피 한 번 죽는 것 정해진 인생, 나를 위해 단번에 죽으신 예수를 위해 살아 보시지 않겠습니까? 끝까지 왕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 내 자랑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자랑하며 ‘복음의 증인’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AKPC 공동체 되기를 축원합니다. Amen!
나눔 질문 예수를 따르는 길에는 ‘회색지대’가 없습니다. 이 땅의 것이 아닌 영원한 것을 붙잡는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적용하고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눠봅시다. 응답 찬양: 예수의 길 + 하늘 소망(후렴) 안개 속에서 주님을 보네 아무도 없을 것 같던 그 곳에서 손 내미셔서 나를 붙드네 길 잃고 쓰러져 가던 그 곳에서 주 말씀하시네 내 손 잡으라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 생명이니 나 그 길을 보네 주 예비하신 곳 다른 길로 돌아서지 않으리 예수의 길 그 좁은 길 나는 걷네 주 손 잡고 그 무엇도 두렵지 않네 주님 주신 약속 내게 있으니 세상의 길 그 험한 길 승리하네 성령으로 그 무엇보다 바라지 않네 저 하늘에 내 소망 있으니 주님 그 나라에 이를 때 까지 순례의 걸음 멈추지 않으며 어떤 시련이 와도 나 두렵지 않네 주와 함께 걷는 이 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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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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