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3) 샬롬! 오늘은 누가복음을 통해 ‘인사이더(insider)가 아웃사이더(outsider)가 되고, 아웃사이더가 인사이더가 되는 공동체’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눅 7:36-50은 한 바리새인과 한 죄인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집으로 식사 초대하고,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십니다. 그 때,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 오신 줄 알고는 예수님을 뵙기 위해 그 집에 들어갑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뒤에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예수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예수님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붓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바리새인이 속으로 말합니다. “예수님이 선지지라면 이 여자가 누구인지 알텐데.. 죄인인 여자가 이런 행동을 하도록 허용하지 않을텐데..”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은 죄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대 공동체는 아웃사이더를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아웃사이더는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야기의 결론부입니다. 이야기의 결말은 예수님과 여인을 주목합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죄사함과 구원을 선언하십니다. 이야기의 처음에 주목받지 못한 여인이 결론에서 주목받고, 바리새인에게 환영받지 못한 죄인 여자가 예수님에게 환영받습니다. 반면에, 이야기의 시작에서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하며 주목받은 바리새인은 이야기 결론에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는 조용히 사라집니다. 마치, 이야기에서 배제된 느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동체의 인사이더가 아웃사이더가 되고, 이웃사이더가 인사이더가 되는 일을 보게 됩니다. 유대 공동체의 인사이더인 바리새인은 아웃사이더가 되고, 아웃사이더인 죄인 여자는 인사이더가 된 겁니다. 이런 일이 누가복음 곳곳에서 나타나고, 아웃사이더가 인사이더가 된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님의 공동체를 이룹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왜 아웃사이더가 인사이더가 되고, 인사이더가 아웃사이더가 될까요? 그것은 ‘나의 의로움’과 관계됩니다. 나의 의로움은 나 자신에게(나 자신 안에) 있는가? 예수님께 있는가?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했지만, 그의 마음에 예수님은 손님일 뿐 자기 인생의 주인(구주)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고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자신은 의로운 겁니다. 하지만, 여인은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받지도 못했고,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느끼며 예수님께 나옵니다. 감히 예수님 앞에 서지도 못한 채, 예수님께 눈물로 나아가며 자기의 소중한 향유 옥합을 드립니다. 여인은 자기가 죄인임을 - 예수님의 죄 용서가 필요한 죄인임을 - 압니다. 여인은 자신의 의로움이 자기에게 있지 않고, 오직 예수님이 나의 의가 되심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의롭다 믿는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공동체(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에서 아웃사이더가 되고, 예수님을 나의 의로 인정하는 죄인 여자는 예수님의 공동체(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에서 인사이더가 됩니다. 이 진리를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마음을 낮춰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나의 마음을 낮춰야 합니다. 나를 낮추고 예수님만 높여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공동체 안에 들어오는 분들을 사랑과 포용으로 환영하고 환대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차별 없이 받아주시고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공동체 안의 새로운 형제들과 자매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포용하고 환영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 우리 목장, 우리 교회가 예수로만 충만한 공동체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는 없고, 오직 예수로만 충만한 공동체! 주님이 이 시대에 찾으시고 기뻐하시는 AKPC 공동체 되기를 축복합니다. Amen!
나눔 질문 내가 처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공동체에 들어왔을 때, 그 때의 감격과 기쁨을 나눠보세요. 나는 예수님의 공동체의 새로운 형제와 자매들을 어떻게 사랑으로 환영할 지 나눠봅시다. 응답 찬양: 충만 무명이어도 공허하지 않은 것은 예수 안에 난 만족함이라 가난하여도 부족하지 않은 것은 예수 안에 오직 나는 부요함이라 고난중에도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주의 계획 믿기 때문이라 실패하여도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예수 안에 오직 나는 승리함이라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내 몸이 약해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예수 안에 난 완전함이라 화려한 세상 부럽지 않은 것은 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함이라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세상 모든 것들도 부럽지 않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세상 모든 풍파도 두렵지 않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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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2) 샬롬! 오늘은 마가복음을 통해 ‘반전의 예수를 따르는 역설의 삶’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반전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역설적 삶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1:1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시작이라”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메시아 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은 1장부터 8장까지에서 왕이신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왕이심을 보여주는 절정의 사건이 8장의 ‘7병 2어 기적’ 다음에 등장하는데, 그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왕으로 고백합니다. (이것은 막 1:1의 선언과 같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 반전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당할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왕으로 인정받은 그 절정의 순간에,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막 9장부터 왕이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십자가로 가는 길)을 걸으십니다. 반전의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심지어 제자들에게도 충격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반전의 길을 걸으실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해방을 주기 위함이고(상황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자기 자신(죄)으로부터의 해방), 또한 우리에게 참된 삶의 모범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십자가를 지는 것에서 얻는 참된 기쁨). 반전의 예수님은 그 분을 따르는 제자들 안에 역설적 삶을 일으킵니다. 더 이상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일시적 쾌락을 따라 살지 않고,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며 영원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제자의 역설적 삶을 깨닫지 못합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직전에, 예수님은 한 맹인을 치유하십니다. 그는 한 번에 시력을 온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두단계에 걸친 예수님의 치유로 온전히 시력을 회복합니다(막 8:22-25 참고). 이 사건은 상징적인 사건일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은 마가복음 8장까지 예수님을 따랐지만 - 예수님이 왕이신 것을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지만 - 이들의 영적 시력은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온전한 회복을 위해 맹인에게 한 번 더 주님의 치유가 필요했듯이, 온전한 영적 회복을 위해 제자들에게는 마가복음의 후반부(막 9-16장, 왕으로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는예수님)이 필요한 겁니다. 반전의 예수님을 따르는 역설적 제자의 삶을 잘 보여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맹인 거지 바디매오입니다(막 10:46-52). 그는 길에서 예수님 이야기를 듣고 소리칩니다. 예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칩니다. 그리고 걸음을 멈춰선 예수님의 긍휼을 입고 치유 받습니다. 그런데, 치유 받은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걷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예수님이 걸으시는 길을 따라 걷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반전의 왕 예수님을 따라 역설적 제자의 삶을 사는 겁니다. 역설적 제자의 삶을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이 삶을 환영하지 않고 조롱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삶이 생명의 삶인 줄 알기에 이 삶을 기꺼이, 기쁨과 자원함으로, 살아갑니다. 반전의 왕 예수를 따르는 역설적 제자의 삶, 이것이 은혜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삶입니다. 오늘도 역설적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님들을 주님께서 위로하시고 힘주시를 소망합니다. 왕이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세상을 향해 역설적 제자의 삶을 살아내는 AKPC 공동체 되기를 축복합니다. Amen!
나눔 질문 반전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은 역설적 삶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왕)로 고백만 하며 살았는지, 그 분을 따르는 진정한 제자의 길을 걸었는지 나의 삶을 점검해 봅시다. 응답 찬양: 예수의 길 &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후렴) 안개 속에서 주님을 보네 아무도 없을 것 같던 그 곳에서 손 내미셔서 나를 붙드네 길 잃고 쓰러져가던 그 곳에서 주 말씀하시네 내 손 잡으라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 생명이니 나 그 길을 보네 주 예비하신 곳 다른 길로 돌아서지 않으리 예수의 길 그 좁은 길 나는 걷네 주 손 잡고 그 무엇도 두렵지 않네 주님 주신 약속 내게 있으니 세상의 길 그 험한 길 승리하네 성령으로 그 무엇도 바라지 않네 저 하늘에 내 소망 있으니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복음서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1) 샬롬! 오늘부터 8월 한 달 동안은 ‘복음서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주제로 말씀을 나눕니다. 오늘은 첫 시간으로 마태복음을 통해 ‘우리의 본성을 거스리는 은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마 20:1-16은 ‘포도원 품꾼 비유’입니다.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에 나가서 품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하고 포도원으로 들여보냅니다. 그리고 제삼시(오전 9시), 제육시(낮 12시), 제구시(오후 3시), 그리고 제십일시(오후 5시)에도 나가서 품꾼들을 찾아 포도원으로 들여보냅니다. 그리고 해가 저물 때가 되자 주인은 청지기를 불러 일꾼들에게 품삯을 지급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온 자도 한 데나리온을 받고 먼저 온 자도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이에 먼저 온 자들이 주인을 원망합니다. 나중에 온 자와 먼저 온 자를 동일하게 대우하는 주인의 처사가 불공평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주인은 원망하는 자에게 “나는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온 자에게도 먼저 온 자와 같이 주는 것이 주인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은혜의 본질(은혜란 무엇인가)을 보여줍니다. 먼저, 주인은 자신이 직접 일꾼들을 찾아 나섭니다. 일꾼 찾는 일을 자신의 십장에게 맡겨도 되지만, 주인은 직접 일꾼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하루에 다섯 번이나 반복합니다. 다음으로, 주인이 일꾼들을 찾아 나선 것은 주인에게 지금 일꾼들이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일꾼들에게 일(일자리)를 제공해주기 위해서입니다. 오후 늦게 고용된 일꾼들이, 심지어 오후 5시에 고용된 일꾼들이, 주인에게 과연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6-7절 참고). 또한 아침에 와서 일을 시작한 사람에게도(주인을 향해 원망하는 사람에게도) 주인이 약속한 한 데나리온은 사실 비숙련 노동자의 일당 치고는 굉장히 많은 액수입니다. 그러면, 주인은 왜 이토록 특별한 호의(은혜)를 일꾼들에게 베푸는 걸까요? 그것은 주인의 마음 안에 있는 긍휼(compassion)입니다. 주인은 가난한 일꾼들이 하루의 품삯을 얻지 못하면, 그리고 한 시간만 일한 일꾼들이 그 시간에 대한 삯만 받는다면, 그들은 가족들의 저녁 식사를 준비할 돈이 없을 거란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일꾼들이 원하는 것을 풍성히 주는 겁니다. 일꾼들의 자격, 일꾼들의 노력 이상으로 풍성히 베푸는 겁니다. 하지만, 원망하는 사람은 주인 안의 긍휼을 몰랐고, 그리하여 그가 받은 은혜를 망각했던 겁니다. 원망하는 우리의 본성은 은혜를 거스릅니다. 그리고 은혜는 우리의 본성을 거스릅니다. 긍휼이 풍성한 은혜의 포도원 주인, 그 분은 누구일까요? 우리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그 분 자신을(그의 가장 소중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기꺼이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은혜의 하나님을 알아가고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매일 삶 가운데 은혜로 우리 본성을 이기고, 은혜로 형제와 자매를 대하며, 은혜로 이웃과 세상을 품는 AKPC 공동체 되기를 소망합니다. Amen!
나눔 질문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때로는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여전히 죄된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된 본성을 이기고 은혜 안에 살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응답 찬양: 은혜 1.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 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2.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 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후렴)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하나님 나라 샬롬! 성경에는 하나님 나라, 천국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대화입니다. 예수님에게 부정적이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묻고,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미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며,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가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골1:13,14)’ 사도 바울도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고단하고 힘들어도 우리가 이미 구원받고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것만으로도 감사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완성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대화 후 제자들에게 재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지만, 그 완성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새 예루살렘이 임할 때 완성됩니다. 신학적 용어로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원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 되었고,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완성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며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성화의 과정을 이뤄가야 합니다. 셋째,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하나님 나라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재림을 기다리는 자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17:32)’ 롯의 아내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돌아 봄으로 인해 소금 기둥이 된 것을 예수님은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함을 지적합니다. 세상의 가치관,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감으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시작되었고,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완성되며,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는 나라입니다. 우리 삶 속에 이미 이뤄진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주님의 통치를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고대하는 AKPC 성도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Amen!
나눔 질문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살아가기 위한 나의 결단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눠봅시다. 응답 찬양: 주의 나라가 임할 때 주의 나라가 임할 때 하나님 임재하실 때 예배가 회복되고 기적은 일어나네 전능하신 주 영원하신 능력의 통치자 자유가 선포되고 주 백성 돌아오네 하나님 나라 임하소서 영광과 존귀 능력과 위엄 놀라운 사랑의 기적의 하나님 지금 이곳에 오소서 주 높고 위대하심을 크게 외쳐 선포하네 만 왕의 왕 주 하나님 지금 오소서 무엇을 붙잡을 것인가 샬롬! 예수를 따르는 길에는 ‘회색지대’ 가 없습니다. 바울은 지금 가이사랴 감옥에 수감 중입니다. 베스도가 유대 총독으로 신임되고 아그립바 왕이 문안 차 가이사랴에 방문합니다. 아그립바 앞에서 바울은 자신을 변명할 기회를 얻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변증합니다. 아그립바는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알고 있는 매우 똑똑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를 알고 아그립바에게 자신이 과거에 경험한 하나님의 말씀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4절) 을 담대히 증언합니다. 구약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로 성취되었음을 풀어 설명합니다. 이를 가만히 듣고 있던 베스도가 갑자기 크게 소리를 지르며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는도다” (24절) 라며 바울을 고발합니다. 그가 말씀의 가시채에 정곡을 찔렸으며, 자신이 영적으로 궁지에 몰린 것을 반증합니다. 베스도는 그러나 “가시채 뒷발질”을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의 잘남과 자랑을 붙잡습니다. 바울은 다시 아그립바 왕에게로 향합니다. 그가 구약에 정통한 자임을 알고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27절) 묻습니다. 궁지에 몰린 아그립바는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8절) 답합니다. 바울이 자신을 ‘거의 그리스도인’ 으로 만들 뻔 했다는 말입니다. 아그립바가 이렇게 애매한 입장을 취한 이유는 그가 버니게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버니게는 그의 아내이며 누이 입니다 (근친상간). 아그립바는 죄에 붙잡힌 것입니다. 내가 붙잡는 것이 곧, 내가 붙잡히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끝까지 ‘거의 그리스도인’으로 남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무엇을 붙잡고 계십니까? 어차피 한 번 죽는 것 정해진 인생, 나를 위해 단번에 죽으신 예수를 위해 살아 보시지 않겠습니까? 끝까지 왕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 내 자랑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자랑하며 ‘복음의 증인’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AKPC 공동체 되기를 축원합니다. Amen!
나눔 질문 예수를 따르는 길에는 ‘회색지대’가 없습니다. 이 땅의 것이 아닌 영원한 것을 붙잡는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적용하고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눠봅시다. 응답 찬양: 예수의 길 + 하늘 소망(후렴) 안개 속에서 주님을 보네 아무도 없을 것 같던 그 곳에서 손 내미셔서 나를 붙드네 길 잃고 쓰러져 가던 그 곳에서 주 말씀하시네 내 손 잡으라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 생명이니 나 그 길을 보네 주 예비하신 곳 다른 길로 돌아서지 않으리 예수의 길 그 좁은 길 나는 걷네 주 손 잡고 그 무엇도 두렵지 않네 주님 주신 약속 내게 있으니 세상의 길 그 험한 길 승리하네 성령으로 그 무엇보다 바라지 않네 저 하늘에 내 소망 있으니 주님 그 나라에 이를 때 까지 순례의 걸음 멈추지 않으며 어떤 시련이 와도 나 두렵지 않네 주와 함께 걷는 이 길에 가스펠 프로젝트 5-12 샬롬! 히스기야는 일생 다윗의 길을 따른, 남유다의 가장 선한 왕입니다. 비록 말년에 자기를 자랑하는 잘못을 범하는 불완전함이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왕입니다. 그는 국내적으로 우상을 제거하고 여호와 신앙을 회복하는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국외적으로는, 굴욕적 외교를 펼쳤던 앗수르에게 반기를 들고(더 이상 조공을 바치지 않고), 블레셋을 쳐서 나라의 영토를 확장시켰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의 가장 위대한 점은 그의 기도입 니다. 그는 남유다를 위협하는 앗수르 군대를 기도로 물리쳤습니다. 히스기야는 처음부터 군대를 이기는 기도를 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위협하는 앗수르를 두려워했고, 인간적인 타협으로(금과 은을 바침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앗수르는 금과 은을 받고는 다시 남유다를 위협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합니다. 이 때 히스기야는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앗수르 왕이 보낸 편지(하나님을 모독하는 편지)를 펴놓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현재의 위기를 하나님께 아뢰며, 하나님이 남유다를(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왕하 19:20). 그리고 그 날 밤, 하나님의 사자(천사)가 앗수르 군사 십팔만 오천명을 쳐서 죽입니다. 예루살렘을 위협 하던 앗수르 왕 산헤립은 어쩔 수 없이 퇴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본국의 우상 신전에서 경배하다가 반역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에서 우리는 영적 교훈을 깨닫습니다. 첫째, 위기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야 하는 시간입니다. 둘째, 기도의 능력은 군대보다 강합니다. 셋째, 기도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고 하나님의 백성이 대적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점점 조롱받고, 하나님 백성을 향한 영적 위협과 공격이 커져가는 이 시대에, 히스기야의 기도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AKPC 공동체 되기를 소망합니다. Amen!
핵심 교리 24: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이 하신 일이 볼 수 있게 드러나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이 자신의 완전한 성품을 자신의 일을 통해 나타내시는 방식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뛰어난 명성을 가리키는 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 다. 또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으로, 하나님의 속성들과 성품들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밝음과 아름다움을 말합니다. 성경은 인류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저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롬 3:23). 그리스도와의 연결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대적해 일어난 이방 나라로부터 그들을 구원해 자기 영광을 드러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써 자기 이름을 높이셨습니다. 예수님도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대적을 물리치심으로써 백성을 구원하시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Family Talk (이번 주 영유아부, 유치부, CM본문은 장년 본문과 다르고, Youth 는 장년과 같습니다.) (Youth) 보이는 상황에 관계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나요? (장년) 지금까지 나의 기도 가운데, 나의 문제가 해결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 게 된 경험이 있나요? 가스펠 프로젝트 5-11 샬롬! 역대하 36장은 예루살렘 멸망의 이야기입니다. 예레미야가 예언하고 직접 보았던 예루살렘 멸망의 이야기, 즉 이스라엘 역사의 끝자락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끝에는 4명의 왕,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3개월, 100일 혹은 11년의 짧은 기간 동안 남유다를 통치하고 이집트 또는 바벨론으로 잡혀갑니다. 여호아하스는 바벨론 편에 섰다가 이집트에 잡혀가고, 여호야김은 국제 정세에 따라 친이집트 입장과 친바벨론 입장을 바꾸다가 바벨론에 끌려가고, 여호야긴은 즉위 100일만에 폐위되어 바벨론에 끌려가고, 시드기야는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바벨론에 대항하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갑니다. 네 왕의 공통점은 강한 자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겁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합니다. 그 결과, 남유다(예루살렘)는 멸망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멸망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3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예루살렘은 멸망해도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둘째, 남유다의 바벨론 포로는 가나안 땅에 안식을 제공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심판 중에서도 회복을 계획하십니다. 우리는 <역대기>를 통해 소중한 교훈을 얻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핵심은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열왕기서>가 선지자적인 시각에서 – 순종하면 축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신명기 말씀의 기초 위에서 - 왕들의 도덕적 행실을 바라본다면, <역대기>는 제사장적인 시각에서 – 성전에서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제사(예배)가 드려지는가에 초점을 맞추며 – 왕들을 평가합니다. 특히, <역대하>는 성전 건축에서 시작하여 성전 건축으로 마칩니다. 2장에서 솔로몬 왕이 성전을 건축하고, 마지막 36장에서 바사 왕 고레스가 성전 재건을 명령합니다. 오늘날도 성전(예배)이 우리 안에 회복되어야 합니다. 합니다. 공동체의 예배와 성도 각자의 삶의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참 예배가 회복되는 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참 성전으로 회복되는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펼쳐집니다. 매일의 영적 싸움터에서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공동체와 나의 삶 속에서 참 예배의 회복을 갈망하는 AKPC 성도님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Amen!
핵심 교리 36: 죄-위반 ‘어기다’(수 7:11), ‘잘못’(수 24:19), ‘허물’(렘 5:6), ‘반역’(애 3:42) 등으로 번역되는 영어 성경의 단어 transgression은 ‘바꾸다’ 혹은 ‘지나가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을 위반하는 행위와 연관되어 쓰이곤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구체적인 명령을 주셨는데도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범죄하는 것입니다(롬 5:14; 딤전 2:14). 이런 의미에서 죄란 법을 어기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의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신실하셔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남은 자를 보존하고, 왕을 세우시겠다고 하신 약속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님을 통해 우리 죄를 벌하셨고, 그를 우리의 영원한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Family Talk (영유아부) 포로로 끌려가는 남유다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뜻은 무엇인가요? (유치부) 하나님의 백성을 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 (CM)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어떤 모습일까요? (Youth) 하나님이 당신의 삶을 변화시키심으로 그리스도의 빛을 비춘 적이 있나요? (장년) 오늘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예배를 드리고 있나요? 응답 찬양: 임재(하늘의 문을 여소서) 하늘의 문을 여소서 이곳을 주목하소서 주를 향한 노래가 꺼지지 않으니 하늘을 열고 보소서 이곳에 임재 하소서 주님을 기다립니다 기도의 향기가 하늘에 닿으니 주여 임재하여 주소서 이곳에 오셔서 이곳에 앉으소서 이곳에서 드리는 예배를 받으소서 주님의 이름이 주님의 이름만이 오직 주의 이름만 이곳에 있습니다. 가스펠 프로젝트 5-10 샬롬! 예레미야는 남유다 역사의 가장 어둡고 우울한 시대를 지나며,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확정되었고, 실제로 예레미야는 자신이 예언했던 예루살렘의 멸망을 자기 눈으로 직접 지켜보았습니다. 이런 때,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31). 새 언약은 옛 언약과 어떻게 다를까요? 옛 언약은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첫 언약)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는데, 이는 결혼 서약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신부 이스라엘이 결혼 서약(언약)을 깨뜨립니다. 우상 숭배와 사회적 타락에 빠진 채, 하나님과 맺은 은혜와 공의의 언약을 깨뜨립니다. 그리하여 이제 남유다는 멸망의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깨어진 언약 관계는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이 먼저 하나님께 나아와 용서를 구하고 회개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거꾸로 하십니다. 하나님이 먼저 이스라엘을 찾아오시고, 비록 첫 언약은 깨어졌지만 새로운 언약을 맺을 날이 올 거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새 언약을 백성의 마음에 기록하여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영원한 언약을 맺으실 겁니다. 이 새 언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속죄와 용서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 영원한 회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새 언약이 임하면,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하나님을 알라고 하지 않을 겁니다(34). 새 언약의 은혜 안에 있는 자는 이미 하나님을 충만히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의 핵심은 마음의 변화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겁니다. 말씀과 성령 안에서 날마다 마음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과 더 친밀한 교제를 누리고, 내가 아는 하나님을 세상에 전하는 AKPC 성도님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Amen!
핵심 교리 65: 그리스도인의 삶에서의 성령의 사역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령님의 역사는 한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구원 사역에서부터 그리스도를 점차 닮아 가도록 하는 성화에 이르기까지 계속됩니다. 또한 성령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능력을 부어 주시고, 그들 안에 거하시며, 그들을 위해 중보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섬길 수 있는 특별한 은사를 주십니다. 신자들의 위로자인 성령님은 우리가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그리스도와의 연결 예레미야 시대의 문제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가졌으나 마음의 죄성으로 인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장차 하나님이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의 마음에 율법을 새겨 주실 날에 관해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은 복음에서 성취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용서를 베풀어 주시고, 성령님을 통해 그 분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게 하십니다. Family Talk (영유아부) 하나님이 새겨주신 새 언약이 담긴 나의 마음은 지금 부드러운가요 딱딱한가요? (유치부) 새 언약이 옛 언약보다 좋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CM)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왜 새언약을 주셨나요? (Youth) 평화와 화해를 위해 나서야 되었던 적이 있나요? (장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새 마음’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응답 찬양: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나의 말엔 주가 주신 진리로 나의 눈에 주의 눈물 채워 주소서 내 입술에 찬양의 향기가 두손에는 주를 닮은 섬김이 나의 삶에 주의 흔적 남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가스펠 프로젝트 5-9 샬롬! 렘 1장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부르십니다. 그를 선지자로 부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예레미야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는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가 자신을 아이라고 표현한 것은 단지 그의 어린 나이를 뜻하기보다 예레미야 자신의 한계(예레미야 자신이 가진 여러 한계들)를 고백한 겁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에 ‘스스로 준비되지 못한 자’라고 느끼는 겁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오셔서 3가지 말씀으로 용기를 주십니다. 먼저,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를 위한 계획을 갖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레미 야가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예레미야를 부르신 분, 곧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예레미야 입에 두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살구나무 가지 환상을 보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말씀을 지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이십니다. 우리도 예레미야 처럼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두려워할 때가 있습니다. ‘나 자신의 한계’와 ‘나 스스로 준비되지 못한 자’인 것을 느끼고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레미야의 하나님은 오늘 나의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나에게 용기를 주시고,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확신하고, 내가 아닌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어가는 AKPC 성도님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Amen!
핵심 교리 87: 전도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과 모든 교회의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영이 거듭났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모든 이를 향한 선교적 노력은 영적 거듭남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토대로 이루어집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을 눈 앞에 보여주고 말로 증언함으로써, 잃어버린 자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자 끝없이 노력하는 것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진 의무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결 예레미야는 백성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 때 종종 울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눈물의 선지자’로 알려졌습니다. 예레미야의 슬픔에서 하나님의 선한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은 회개하지 않으려는 예루살렘 백성들을 보고 우셨던 예수님에게서 가장 잘 표현되었습니다. Family Talk (Youth 본문은 요한계시록 3장입니다) (영유아부)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도록 부름 받았을때 뭐라고 대답했나요? (유치부) 하나님은 어떤 일을 맡기려고 예레미야를 부르셨나요? (CM) 하나님은 언제부터 우리를 알고 계셨나요? (Youth) 주님 앞에 미지근한 믿음을 가졌을 때가 있나요?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떻게 회복했나요? (장년) 사명을 감당할 때 주님께 나의 시선을 고정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응답 찬양: 아무 것도 두려워말라 아무 것도 두려워 말라 주 나의 하나님이 지켜주시네 놀라지마라 겁내지마라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내 맘이 힘에 겨워 지칠지라도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세상의 험한 풍파 몰아 칠때도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주님은 나의 산성 주님은 나의 요새 주님은 나의 소망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 가스펠 프로젝트 5-8 샬롬! 오늘은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하기 3-40년전에 북이스라엘에서 활동 하였던 호세아 선지자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선지서들은 죄를 짓게 되면 심판을 받아야 하고, 그 심판 받는 것의 고통과 치러야 할 대가가 얼마나 가혹한지를 알려주며 죄로부터 멀어진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해주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호세아 선지자가 음행을 행했던 고멜과 결혼을 하게 되고, 음란한 신부 고멜이었지만, 그녀를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했던 헌신과 사랑을 통해, 심판자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고난의 시간을 줘야만 하는 고뇌하는 마음과 안타까워 하시는 마음을 보여줌으로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고통과 눈물을 우리가 생각나게하여 우리가 죄로부터 멀어진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하게 만들어주는 소선지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와 고멜의 결혼 생황을 통해 다음과 같은 네가지 사랑의 속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꾸짖으시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세번째 사랑의 마음은 바로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이고 마지막 네번째 사랑의 마음은 희생하신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호세아 선지자와 고멜에게 허락하신 세 명의 자녀들, 이스르엘(하나님께서 흩으신다), 로루하마(긍휼을 받지 못하는 자), 그리고 로암미(나의 백성이 아니다)의 이름을 통해 우상 숭배를 하는 죄악 가운데 있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바르게 알고 그래서 우리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긍휼을 받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맘껏 누리며 사는 AKPC의 모든 성도님들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핵심 교리 20: 은혜로우신 하나님 하나님은 자격 없는 자에게 과분한 호의를 베풀기를 기뻐하시는 성품을 지니셨습니다. (엡 2:8-9) 죄인을 향한 주님의 은혜는 그리스도를 통해 주셨던 구원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죄를 보면, 인간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등을 돌렸으므로 결과적으로 죽어 마땅합니다. (롬 6:23) 그런데도 하나님은 죄인을 죄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시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 죄를 사하고 용서해 주심으로써 은혜를 보여 주셨습니다. (고후 5:21) 그리스도와의 연결 하나님께서는 음란한 생활을 끝내 청산하지 못하고 종의 신분으로 살고 있는 고멜을 구원하기위해 호세아 선지자에게 당시 여종한 사람의 몸값에 해당되는 은 열 다섯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을 지불한 이후에 고멜을 집으로 데려오게 하십니다. (호 3:1-2) 이것은 죄의 사슬을 끝내 끊지 못하고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 대가를 치르시고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Family Talk (CM과 Youth 본문은 나흠 1장입니다) (영유아부) 하나님께서 호세아선지자를 통해 가르쳐주신 마음은 어떤 사랑의 모습인가요? (유치부) 하나님은 왜 호세아에게 고멜과 결혼하라고 했나요? (CM) 믿지않는 백성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Youth)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적이 된다는 것을 알때 어떤 느낌이 드나요? (장년)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해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는 고난 가운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응답찬양: 주 사랑이 나를 숨쉬게 해 주 사랑이 나를 숨쉬게 해 세상 그 어떤 어려움 속에도 주 은혜로 나를 돌보시며 세상 끝날까지 지켜 주시네 주 사랑이 나를 이끄시네 내가 갈 수 없는 그 곳으로 주의 사랑 나를 붙드시며 세상 끝날까지 인도하시네 주님만이 내 아픔 아시며 주님만이 내 맘 어루만지네 어느 누구도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네 주님만이 내 능력이시며 주님만이 나의 구원이시네 어느 누구도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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