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혼,각혼,영혼 이것은 이 땅에 존재하는 생물체의 분류이다.
하나는 공간적 틀에 한정된 생물이다. 일생동안 주거 변동이 불가능하다. 한 곳에서 발아되고 개화되고 결실하고 쇠퇴한다. 식물 세계의 법칙이다. 다른 하나는 공간적 자유를 누린다. 여기 저기를 자유롭게 활동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사랑과 번식을 위한 것은 거의 수동적이며 기계적이다. 동물 세계의 법칙이다. 나머지 하나는 공간적이든 시간적이든 사랑이든 선택이든 보다 자유의 폭이 넓다. 한 때 인구 팽창이나 근간의 인구 감소 현상은 그 자유의 증거이다. 반란과 진압, 수용과 거절, 진실과 속임, 소유와 폐기, 오만과 겸손,윤리와 불륜, 심지어 사느냐? 죽느냐? 조차 자유의 폭은 광활하다. 인간 세계만의 법칙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는 욕망의 에너지이며 또한 출구이다. 그리고 패망의 입구이기도 하다. 자유는 최고의 은총이며 최고의 위험이기도 하다.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 자유의 다른 얼굴은 임무이다. 왜 인간은 구원이 필요한가?. 자유의 남용으로 잃어버린 낙원 때문이다. 자유가 주는 상처에 대한 치료제가 구원이다. 자유, 그 이후 어떤 책임도 거부하는 인간이있다면 그는 구원의 은총에서 제외 될 수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유에 목마르고 또 그 속에서 치솟고 있다. 그래서 절제와 지혜, 책임과 용기가 없으면 위험하다. 이 모든 것의 원천은 바로 “말씀”이다. 그리고 숨겨진 불순물을 낱낱이 제거하고 순도를 높이는 것이 기도이다. 이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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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만 시계를 만든다.
고대 농경사회에는 계절과 절후, 그리고 달의 위치와 모양, 해가 뜨는 때와 해가 지는 때가 곧 시계였다. 그것은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제공하는 시계이다. 그러다 첨차 산업화되고 도시화될 뿐 아니라 종교적 수행에 있어서도 시계는 기본이다. 심지어 1초를 1/1000로 쪼갠 단위도 일상생활 속에 들어와있다.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만이 아니라 생체의 시계, 심리적 시계도 활용된다. 시계는 현대 과학의 산물이다. 광시계는 300억 년에 1초 편차 정도를 내는 수준이라한다. 앞으로 핵시계는 그 광시계의 10배 정도 더 정밀해 질것이라한다. 왜 인간은 시계를 만드는가?. 시간은 돈이 된다. 시간은 혹독한 훈련의 영광을 말해준다. 응급 병동에서, 깊은 바다 속에서, 우주에서, 전장의 병사에게 그것은 목숨과 같다. 드디어 스마트 시계는 인체의 건강 상태, 걸어야할 거리,활동의 범위까지 일러준다. 그것처럼 마음의 무게, 행복의 지수, 믿음의 순도,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시계는 없을까?. 만약 있다면 우리를 그것을 구입하는 욕구와 지혜가 있을까?. 도대체 그 값은 어느 정도일까?. 시계를 본다는 것은 기다림의 표현이다. 그러면서 인간은 “시간의 속박”에서 자유하려한다. 포기할 수 사실은 시계는 바로 “인간은 유한적” (homo tempolalis)이라는 사실을 경보한다. 이승태 인간을 제외하고 도대체 누가 사진을 만드는가?.
인간은 무엇인가 남기려는 본능으로 시간과 아름다움을 그려왔다. 연필과 렌즈는 드러내고 간직하게 한다. 사진은 찍는 자신의 발견이다. 사진은 자신의 선택이며 그 사실과 자신을 일치시킨다. 사진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작업이다. 자신의 꿈을 담는 행위이며 소리 없는 웅변을 만든다. 그것은 역사이며 또한 무기이다. 가난한 사진에는 행복이 담겨있다. 슬픈 사진에는 오히려 분노가 담긴다. 사진은 시간을 붙들어 놓은 순간이다. 그것은 현재가 과거와 나누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잃어버린 것을 그리워하는 동작이다. 인간이 남기고 싶은 것을 담아 놓은 그릇이 사진이다. 추억은 재산보다 무겁고 명예보다 빛날 수 있다 사진처럼 목소리나 연필로 추억을 찍을 때이다. 나중에 누군가 환호할 것이며 통곡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승태 동물도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 작별의 순간에 진지해지고 눈물을 흘린다.
성경은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워준다. 전체에 약1720여 번이나 나타난다. 매 2장마다 약 3번씩 언급되는 셈이다. 그러나 그것을 끝으로 하지 않는다. 그 후에 반드시 아름다운 만남을 약속한다. 인간에게 영원한 만남이란 없다. 영원한 이별 또한 없어야 행복한 만남이다. 죽음이란 하나의 작별이며 그리고 다른 하나의 만남이다. “어떻게 사느냐?”는 “어떻게 죽느냐?”와 같은 질문이다. 최고의 감동을 주는 작품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가장 정직하고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거룩하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게 하는 동기는 죽는다는 사실이다. 빼앗긴 병사의 죽음을 자기 고국으로 찾아오는 나라는 훌륭한 나라이다. 한 인간의 죽음의 가치는 누구를 위하여 희생하였나로 평가된다. 죽음은 허무와 영광을 구별한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흙은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인간 최고의 지혜가 여기있다. 그리고 돌아갈 집이 있고 낯설지 않게 만날 관계가 있음이 최고의 복이다. 이승태 성경에는 이름이 바꾸어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고 시몬이 베드로가 된다. 사울이 바울이 된다. 바울은 “작은 자”를 말하며 이전 이름과는 정반대 뜻이다. 이름은 그의 존재이며 가치이고 아울러 정체이며 특권도 담겨있다. 사람만이 아니라 머물렀던 자리까지 다른 이름으로 불려진다. 혼자서 밤을 보내던 그 들판은 “벧엘”(“하나님의 집”)이 된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역활에는 이름이 주어진다. 아울러 그 이름에 맞는 사고와 행동, 그리고 언어의 책임이 따른다. 한자의 “이름”은 “명”(名)으로 “저녁의 언어”라고 할까?. 저녁은 생체 리듬 상 활동이 아닌 생각하고 반추하는 시간이다. 코비드 19는 누구나 부르는 바이러스 질병 이름이다. 이 질병 속에는 나만이 불러줄 수 있는 이름이 숨겨져 있다. 다른 눈, 다른 귀, 다른 입으로 다가 갈 것이다. 그 때 엄청난 환희와 치유 그리고 자유가 치솟으리라. 내가 무엇이라 불러줄런지를 그것은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이승태 인간을 제외하고 옷을 입는 존재가 또 있는가?.
인간이 세상과 만나는 그 순간에 처음으로 주어지는 것은 옷이다. 그리고 이세상과 마지막 작별할 때 역시 새로운 옷이 주어진다. 옷은 구체적으로 신체 보호하고 그리고 신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노출과 숨김의 얇은 경계를 통하여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것 역시 옷이다. 옷은 자신의 개성을 말하는 또 다른 언어이다. 옷은 그 사람의 사회적 역활과 신분을 말하기도 한다. “옷을 벗는다”는 것은 그 위치와 역활에서 물러난다는 표현이기도하다. “옷을 입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모방 또는 동일시하려는 심리이기도하다. 어린 아들이 어느 날 아버지의 옷을 걸치게 되는 것이나 어린 딸이 엄마의 구두를 끌거나 손가방을 걸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인간은 마음의 결단과 성장, 그리고 삶의 큰 전환의 시점에서 옷을 바꾸어 입는다. 인간이 최초로 옷을 걸치게 된 것은 부끄러움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그 극복을 위하여 자신이 감춘 것 대신에 새로운 옷이 주어진다. 그것은 다른 한 생명이 희생된 피의 옷이다. 성경은 줄곳 옷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옷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성경은 옛 습관을 벗어버리고 거룩한 새 사람을 입으라고 당부한다. 옷은 날개의 경지를 뛰어넘어 죽느냐? 사느냐를 구별하기도 한다. 옷은 인생에서 거룩한 운명을 만든다. 한 조각 한 조각 깨끗한 세마포 행실로 신부의 옷을 짜고있는 벗을 생각하면서-, 이승태 인간은 비누를 사용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한 때는 고급스러운 사치품이기도 하였다. 비누 등장으로 유럽인들의 수명이 20년이나 증가되었다는 보도가 있을 정도이다. 비누의 기원은 종교 행위의 산물이다. 고대에 제사를 드리면서 짐승을 불태워 바치고 그 기름과 그 나무의 재를 합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 잿물은 드디어 양잿물로 등장한다. 신앙의 현장에 청결은 필수 행위이다. 건강과 청결은 같은 선상에 있다 하겠다. 그 말의 뿌리도 공통적이다.사봉, 사분이다.(Soap. Savon. Sabun. ) 옷이 더러우면 빨래할 줄 알면서, 몸과 얼굴은 날마다 비누로 씻으면서-. 바이러스가 겁이 나서 무엇을 만질 때나 무엇을 먹기 전에 손은 엄청 잘 씻으면서-.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는?. 그리고 행복을 위해서는 ? 내 입은 얼마 더러울까? 내 귀는 얼마나 더러울까? 내 마음은 언제나 깨끗할까? 그것 가지고 여태 사용하고 사랑하였는데-. 그래도 탈나지않고 깨어지지 않고 내버리지 않았다면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비누는 몸을 위하여, 눈물은 마음을 위하여”있다 한다. “비누로 몸을 씻어 보아라. 잿물로 몸을 닦아 보아라 너의 더러운 죄가 내 앞에서 사라질 것 같으느냐?”. 성경에서 단 한 번 나타나는 이 비누가 한 밤 중 숲 속 오두막 집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 같아라. 이승태 인간만 가진 독특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숫자를 만든다는 사실이다.
원시시대는 인간이 몸으로 22까지 셀 수 있었다한다. 그 이상 소유할 것도 없고 그러니 셀 필요도 없고 관심의 분야도 좁았다는 의미이다 주전 3000년 대에 이집트에서는 백 만 단위를 헤아릴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였다 한다. 인간의 삶이 풍요롭고 관심과 삶의 영역이 광대해질 수록 더 큰 숫자가 필요하게 된다. 현대는 디지털 시대이다. 사실 디지털은 “손가락”이란 뜻이지만 그것은 숫자 시스템이란 말이다. 건강도 수치로 증명한다. 정치,경제, 과학, 전쟁, 스포츠, 지능, 행복,심지어 미래 예측도 수치다. 그렇다면 신앙만은 숫자와 상관없을까?. 신령하다는 사실 때문에 은총과 임무를 숫자로 말하는 것을 무시하거나 거부해야하는가?. 특히 숫자 0의 등장은 지금까지의 “없음”에 대한 새로운 세계를 향한 창이 되었다. 그것은 “비어있음”을 의미하며 지금까지의 인간 시야의 한계, 인식의 한계, 존재의 한계를 깨뜨린 사건이다. 그 “비어있음”의 위치에 따르거나 다른 숫자에 덧붙여질 수록 10배씩 증가는 역활을 한다. 지금은 예사로운 인식이지만 가히 기적의 경지가 아닐 수 없다. 성경은 진리의 세계를 숫자로 표시한다. 100마리 양 가운데 1마리 잃은 양을 찾는다하시지 않는가. 아버지 품을 떠나 자기의 꿈을 찾아 나선 아들. 꿈은 커녕 재산과 몸을 망가친 채로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는 변함없이 아들로 대접한다. 100분의 1이든, 10분의 1이든 2분의 1이든 같은 얘기이다. 소홀히 여길 수 있고 무시할 수 있으며 무지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그렇게 가르치신 것이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신다. 병든 사람 10사람이 고침받았는데 1사람만 돌와왔을 때이다. 사실 9사람이 돌아와야하는 것이다. 1사람 쯤은 놓칠 수 있으나 예상 외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은 지금 여기 나의 모습이 아닌가?. 고침받고 새로워진 감동의 9개를 잊고 사는 삶을 안타까워서 깨우쳐 주신 것이다. 괴롭고 힘들고 못마땅하며 원망스럽고 불행하다면 다른 것 때문이 아니다. 방향과 위치를 잃어버리고 어딘가 배회하고 있는 나의 아홉 때문은 아닌가? . 이것을 먼제 문제 삼을 것이 아닌가? 이승태 어렸을 적에 들은 숱한 동화의 끝은 똑같다.
“그래서 둘은 다시 만나서 행복하게 오래 오래 잘 살았단다”이다. 어떤 동화는 주인공이 다시 어디론가 떠나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석양을 향하여 또 다른 상황을 만나려 뚜벅뚜벅 걸어간다. 카메라는그 “호보”의 꼬리에 촛점을 맞춘다. 현대는 말할 것도 없고 고대에서 부터 드라마는 인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원시 시대는 제사적 동작이며 신앙의 표현이다. 광대 놀이는 사회적 정의와 불의에 대하여 통쾌함과 저항을 대신한다. 거기서만은 상놈이 양반을 조롱할 수도 있다. 실제가 아닌 상황을 다른 존재를 통하여 실제보다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심리적으로 더 강력하게 행동한다. 그것은 권선징악을 통하여 인간 원형의 회복을 가르친다. 대체로 주인공(protagonist)은 선하며 조연(antagonist)은 악하게 행동한다. 그런데 주인공은 하필 조연에게 모함을 받거나 시련을 당한다. 시련 없는 주인공은 없다. 때로 그는 절규하며 통곡한다. 그러나 주인공은 끝까지 버티어낸다. 때로 명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드라마는 반전이 거듭될 수록 명작이다. 예술적 표현은 필수 요소가 된다. 성경은 한 편의 큰 드라마로 엮어져 있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사랑과 믿음의 원작이다. 그 드라마의 무대에 내가 서 있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그 작가의 시나리오이다. 나는 바로 그 주인공이 되고 그 안타고니스트는 나의 실제 삶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치유와 자유를 분출해낸다. 오늘도 무대 한 켠에서 명작의 한 부분을 엮어가는 그대를 생각한다. 이승태 인간이 인간됨의 궁극적 핵심은 무엇일까?.
몸의 조직이나 기능과 윤리만으로 인간을 다른 생물체와 차별화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가능할까?. 그것은 “거룩”이다. 그러나 일상 삶에서 그것은 무시되기 쉽다. 현실성이 그것을 짖밟아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거룩은 기도가 그 얼굴이기도 하다. 기도 없는 인간은 아직 인간이 아니며 기도 없는 종교는 이미 종교도 아니다. 지구 상 어떤 존재도 인간 이외에 예배의 의식을 보여주는 생물은 없다. 예배는 모든 관계의 뿌리이며 원형이다. 단지 어둠의 세력은 예배를 부정하는 본성이 있다. 그리고 반드시 대체 예배를 유혹한다. 예배 없이 참된 믿음도 없고 그 믿음 없이 참된 예배도 불가능하다. 인간에게는 아직 잠재된 믿음이 있고 숨겨진 예배가 있다. 언젠가는 발휘되는 때가 반드시 온다. 인간은 극단의 한계나 역부족의 상황에서 자신의 모태를 그리워하는 본성을 갖고 있다. 게으름같이 보이지만 일컬어 퇴행이라 한다. 그 상황에서 오히려 안식과 평온을 누리게 된다. 예배는 인간의 궁극적 귀소 본능의 행위이다. 인간에게 최고의 불행이 있다면 이 섬김을 거부하는 것이다. 인간은 숱한 섬김으로 행복하고 여러 섬김으로 성공한다. 이 모든 섬김의 원천이 절대자를 섬기는 예배이다. 예배는 인간의 최고의 행복이며 최고의 임무이다. 오늘도 예배로 치유와 자유를 누리는 그대를 생각하며-. 이승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