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가매 다윗이 곧 바위 남쪽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서로 입 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41)
사울은 다윗을 자기 개인에 대한 위협일 뿐 아니라, 자신의 집안, 자신의 왕조에 대한 위협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 당시 사울 자신도 하나님이 자신을 떠나버렸고, 다윗이 이 왕권을 잇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고,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다윗을 죽이려고 결심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대적하는 자리에 서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은 힘들고, 결국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비록 그 뜻이 내 뜻과 다를 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면 이에 순종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인 것입니다. 이제 요나단은 이 사실을 들판에서 기다리는 다윗에게 알려주려 합니다. 그런데, 사울이 워낙 위협적으로 나왔기에, 다윗과 접촉하는 일은 요나단에게도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남들 눈에 덜 띄도록 ‘작은’ 아이를 데리고 그 곳에 갔고, 그 아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빨리 서둘러 성읍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는 마치 그 아이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해서, 다윗에게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빨리 이 곳을 피하라고 외쳐 말합니다. 요나단은 왜 다윗을 구하기로 마음먹었을까요?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다윗과 맺었던 약속, 즉, 인간적인 신의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우리 믿는 자들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는 이런 인간적인 신의의 관계 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둘의 깊은 신뢰의 배경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십니다. 요나단은 자신과 다윗 가운데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사람 간의 우정은 사실 오래 못갑니다. 서로 좋을 땐 목숨을 내 놓을 듯 좋다 가도, 금새 변하기 쉬운 것이 사람 간의 우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 맺어진 신의관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변치 않으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을 통해서 상대방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믿는 자들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도 신뢰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크리스챤의 올바른 Lordship에서 나옵니다. 이 말은, ‘우리의 궁극적인 주인은 내 직장 상사가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시다’는 흔들리지 않는 가치관이 정립된 것을 말합니다. 보통 이런 사람들을 세상은 처음에는 미워하나, 결국에는 신뢰하게 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살다 보면 하나님의 권위와 세상의 권위가 내게 다른 것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어려워도 하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왜냐면, 성경은 모든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롬 13:1) 오늘 요나단도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이 결정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 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다윗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요나단의 호의 때문에 크게 울고, 최고의 예우를 갖춰 작별인사를 합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하고, 그 관계가 주변 사람들에게 확장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의 원리가 우리 삶에서 꽃을 피우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저희가 하나님과의 건강한 관계를 바탕으로, 주변 사람들과도 건강한 관계를 맺어 갈 수 있기 원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신의를 지키며, 신뢰받을 수 있는 성품으로 성장토록 우리를 인도해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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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40년간을 왕위에 있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은 그가 즉위한 기간동안 계속되었었는데, 다윗이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대적했던 때가 사울이 왕이 된지 10년 정도 지난 후라고 추정할 때, 그의 남은 통치기간, 약 30년간의 세월을, 블레셋을 견제하는 동시에 왕으로 기름부어진 다윗을 견제하면서, 그를 해하고 죽이려는 일에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울 왕의 속마음을 알기 위해 요나단이 다윗과 대화한 대로 실행에 옮기는 내용으로, 다윗을 살해하고자 하는 사울의 의도가 확실하게 드러나는 이야기 입니다. 27절: “... 이새의 아들이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 식사에 나오지 아니하느냐 하니" 30절: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31절: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한지라" 34절: “심히 노하여 식탁에서 떠나고…”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특별합니다. 요나단이 사울왕의 아들임을 생각할 때, 보통 이런 관계에서 서로에게 진실한 친구가 되어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그의 왕좌를 자신의 힘으로 유지하려고 다윗을 제거할 생각을 하며 안간힘을 썼지만, 요나단은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인 것을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원수는 서로가 아니라 블레셋이며,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함께 바라보았기에 그들은 믿음안에 진실한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이 된 우리의 이기심과 자만심을 버릴 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믿음, 그 뜻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 생깁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따라가는 믿음을 가진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1절) 라는 말은, 사무엘 선지자를 떠났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람 곁에 머물며 잠잠히 하나님의 시간과 일하심을 경험하는 것인데, 그 자리에서 도망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1절 말씀에 다윗의 현실이 비춰집니다. ‘내가’, ‘나’ 라는 말을 무려 네 번이나 반복하며, 하나님 중심에서 나 중심으로 변모한 다윗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던 그의 모습과 사뭇 다릅니다. 이 순간 다윗을 가장 힘들게 한 질문은 ‘Why Me?’ 하나님 왜 나 여야만 합니까?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나의 구원에 관해서는 같은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Why Me?: 하나님 왜 나 같은 ‘죄인 중에 괴수’를 택하셔서 구원의 감격을 누리게 하십니까? … 현실적인 다윗 앞에 요나단은 꽤 비현실적인 답을 합니다 (2절). 그의 대답으로부터, 사울과 요나단의 (왕과 왕세자의) 관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밀접하며, 요나단이 당시 사울의 정책결정에 깊이 참여할 만큼 중요한 직위에 올라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3절). 죽음의 그림자가 눈 앞에 있음을 직시한 다윗은 더욱 요나단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요나단의 길은 다윗의 길과 애초부터 달랐습니다 (삼상 26:25 & 삼상 18:4, 다윗에게 신발 만은 절대 벗어주지 않는 요나단). 이것이 이어지는 유대인의 식탁 문화를 통해 나타납니다. 당시 ‘월삭’을 지키며 매 월 첫 삼일동안 제사를 드리고,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자리에 다윗은 왕의 사위임에도 식탁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제사’(예배)라는 형식을 빌어 거짓말을 합니다 (다윗의 현재 영적상태가 그만큼 무너져 있음). 그리고 11절에 요나단이 꽤를 내어 다윗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들로 가자 하고 두 사람이 들로 가니라”.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이 ‘들’ 이라는 말 앞에 정관사 “그”가 붙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 된 “그 들”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의 광야 인생이 정하신 바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잠잠히 머무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말입니다. 사무엘상 21-22장은 다윗의 광야 인생의 끝자락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친 체 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슬리는 모습입니다 (삼상 21:13). 또 다시 도망을 가 도착한 곳이 아둘람 굴입니다 (삼상 22). 그 곳에서 시편 34편을 써 내려가며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4:8). 인생의 광야를 통과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오늘 인생의 “그 들”로 나아가실 때, 다윗과 같이 나와 죽음의 사이가 한 걸음 뿐인 곳,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우리의 현실의 그 간극을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아내시기 바랍니다. 빈 들에서 하나님의 일하심과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인생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내 인생의 ‘그 빈 들’ 한 가운데에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하소서!” 우리가 죄로 가득한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로운 삶을살다 보면 억울한 고난을 당할 때가 있는데, 우리가 그 고난을 당하는 것에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은 그 고난 또한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오히려 우리는 저 하늘 나라에서 영원토록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있는 영생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적과 이적을 베푸시며 우리를 보호하여주시고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오랜시간 억울한 도망자의 삶을 살면서도 그의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께 순종한 것은 이 믿음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그와 같은 믿음을 소유함으로 그가 고백한 시편 62편의 고백이우리의 고백이 되어지길 소망합니다. “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6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7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롭게 살다가 당하는 고난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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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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