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에게 가서 시비를 겁니다. 입다가 암몬 자손과 전쟁을 할 때에 자신들을 불러 동참시키지 않았다면서 입다와 입다의 집을 불사르겠다고 말합니다. 입다는 자신이 도움을 요청할 때 에브라임 사람들이 도움을 주기는 커녕 전쟁이 끝난 후에 오히려 시비를 건다면서, 에브라임 사람들과 전쟁을 합니다. 입다와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무찌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도망합니다. 평소 에브라임 사람들은 길르앗 사람을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면서 멸시했습니다. 길르앗 사람이 요단강 나루턱을 장악하고 행인들을 검문합니다. 언어 구분(쉽볼레와 십볼레 발음의 차이)을 통해 에브라임 사람이 확인되면, 잡아서 죽입니다. 이 때 목숨을 잃은 에브라임 사람이 사만 이천 명입니다. 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한 지파가 다른 지파를 죽이는 비극이 일어난 것입니다. 입다는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6년을 다스렸고, 죽은 후에는 길르앗 그의 성읍에 장사됩니다. 입다를 이어 소사사들이 등장합니다. 베들레헴의 입산은 7년 동안, 뒤를 이어 스불론 사람 엘론은 10년 동안, 뒤를 이어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은 8년 동안 다스립니다.
“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보다 앞서 요단 강 나루턱을 장악하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하건대 나를 건너가게 하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그에게 이르기를 쉽볼렛이라 발음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그렇게 바로 말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강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육 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에 있는 그의 성읍에 장사되었더라” (5-7)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믿음의 공동체 안에 불신과 시기와 다툼이 없도록 우리를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주시고 성령의 하나됨으로 연합되게 하소서. 주님의 겸손을 본받아 서로 섬기게 하시고,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지 않도록 말씀으로 우리를 지켜주소서”
0 Comments
하나님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고, 입다는 암몬과 전쟁을 치르러 나아갑니다. 입다는 하나님께 서원을 합니다. 주님이 전쟁에서 승리를 주시면, 귀환할 때 누구든지 입다 자신의 집 문에서 나와서 영접하는 자를 여호와께 번제물로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입다가 전쟁을 하고, 하나님이 입다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암몬이 이스라엘 앞에 항복을 합니다. 입다가 귀환할 때 그의 딸 무남독녀가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아버지를 영접합니다. 이에 입다는 자기 옷을 찢고 괴로워합니다. 자신의 서원에 사랑하는 딸이 목숨을 잃게 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입다는 서원을 철회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입다의 딸은 아버지의 서원을 받아들이고, 아버지께 서원대로 행하시도록 말합니다. 다만 두 달 동안 친구들과 산에 가서 이 슬픈 일(처녀로 죽음을 맞이하는 일)로 인해 애곡할 수 있도록 아버지의 허락을 구합니다. 입다는 허락하고, 딸은 두 달 동안 여자 친구들과 산 위에 가서 애곡의 시간을 갖고 돌아옵니다. 입다는 자신의 서원대로 딸에게 행합니다. 이 후 딸의 애곡은 이스라엘의 관습이 되고, 이스라엘의 딸들은 해마다 나흘간 나가서 입다의 딸을 위해 애곡합니다. 입다의 경솔한 서원이 가정의 불행을 낳았습니다.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내가 암몬 지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30-31)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35)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전쟁의 승리는 저의 서원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의 결과임을 깨닫습니다. 항상 말씀의 빛으로 저의 믿음을 비추고 분별하도록 도우소서. 주님께 순종하되, 바른 믿음을 따라, 주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게 하소서” 내가 네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거늘 네가 나를 쳐서 내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원하건대 심판하시는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 하였으나 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가 사람을 보내어 말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27-28)
사사 입다가 길르앗의 군대장관이 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대적 암몬이 쳐들어오자 다급해진 장로들은 입다가 싸움을 잘하는 면모를 보고 그를 군대장관으로 초청합니다. 입다는 자신이 암몬 군대를 쫓아내면 정말 자신을 길르앗의 대장으로 삼아줄지 여부를 길르앗 장로들과 거래합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선택 사이에는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결정하기 때문에 좋은 결정들과 잘못된 결정들이 혼재돼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이 섭리요,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방법입니다. 잠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입다는 거짓 요구를 하는 암몬 왕에게 협상가적 기질을 발휘하여 세 가지 논리를 주장합니다. 첫째, 역사적으로 볼 때 암몬 왕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둘째, 이 땅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이므로 우리가 취하는 것이 맞다. 셋째, 지난 300년간 아무도 이 땅을 다시 찾으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더 가까운 모압도 가만히 있는데 암몬이 왜 이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가 하는 주장이었습니다. 입다의 반박은 굉장히 논리적이고 분명합니다. 만약 암몬이 이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마음이었다면 입다의 이러한 논리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암몬은 지금 이 문제를 순리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생활 속에서도 논리만 맞으면 다 될 것 같은데, 실제로 그렇지 않은 경우를 보게 됩니다. 맞는 논리가 안 받아들여 지고, 엉뚱한 주장이 먹힙니다. 이런 상황에선 논리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 크리스챤이 진정으로 신뢰해야 하는 것은 나의 논리, 나의 말주변,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 이십니다. 우리가 더더욱 분별하고 살피려 노력해야 하는 것은 좋은 논리를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우리가 혼탁한 세상 속에 살 때에 우리의 눈이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급한 마음과 나의 능력을 내려놓고, 상황과 환경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 더욱 집중하는 성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잇사갈 사람 돌라와 길르앗 사람 야일 사사 이후 18년 동안 블레셋과 암몬 두 민족의 압제를 받으며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들은 이전보다 더욱 더 많은 우상을 숭배하면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한 것을 보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도 우리의 인생이 때때로 어려움에 부딪히고, 또 우리의 죄성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범죄하게 되는데, 하나님을 져버리고 다른 신들, 온갖 이방나라의 신들을 섬긴다면 이것은 하나님 크신 사랑을 배반하는 행위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를 거부하는 일이 됩니다.
오랜 시간 고통 중에 있던 이스라엘이 이번에는 이전의 모양과는 달리, 먼저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자발적인 회개를 시작했습니다. 10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쉽게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13절: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따른 징계로 신음하는 백성에게 ‘공의’를 강조하시다가도, 백성들이 회개하자 애처로운 심정으로 백성의 고통을 돌아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게 됩니다. 공의를 확립하는 동시에 회개하는 자에게 친히 염려해 주시며 구원해 주시며 그의 사랑을 쏟으시는 이중적인 섭리야말로, 하나님께서 창조때부터 예수님을 통한 구속사와 또 지금에 이르기까지 보여주시는, 일관적이고도 신실하신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하나님의 백성 삼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택하여 주신 섭리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백성들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Starting from chapter 10 through chapter 12, are brief mentions of the five so-called “minor Judges” before we are introduced to Samson in chapter 13. For whatever reasons, their role in Israel seems to have differed from the other Judges. Each is mentioned only briefly and there is no mention of any battle against a foreign enemy as the other more prominent judges.
We can assume for our reading that these kings were not proactive in addressing the sin issues that gripped Israel, but if we are honest with ourselves, the same sin issues that we struggle with today of idolatry and worshiping false gods. The fact that several of the judges fathered extremely large families points to their living like the eastern kings of their day. This is further evidence that Canaanite culture was influencing the Israelites adversely. Positively these accounts indicate God’s gracious blessing of His people despite their constant betrayal and refusal to surrender to God and his ways. This fact suggests that God is working behind the scenes in and through the family and political institutions to promote stability and prosperity. Unfortunately, verse 6 says that “Israel again did what was evil in the sight of the Lord.” In previous accounts only the Baals and the Ashtaroths were mentioned, but this list is far more extensive and long. This longer list of gods indicates a downward spiral in Israel’s disobedience and lack of faith to God the covenant. They thought that they could find happiness, joy, and freedom by worshiping these idols like the other pagan nations that surrounded them, but in the end these same idols enslave and oppress them. Prayer: Father God, may we never become complacent in our pursuit and love for you. May our hearts always yearn for the true and living God and not for the false idols of this life. We know that true freedom is only found in you. In Jesus’ name, amen. |
굿모닝! 말씀 산책매일 개인묵상을 위한 말씀입니다. 아카이브
September 2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