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는 신구약 성경 전체의 기초가 되는 책이며, 창조 이야기 역시 모든 성경 이야기의 기초가 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혼동과 공허 속에서 천지창조를 하셨습니다. 혼돈은 뒤죽박죽 질서가 없는 상태를 공허는 텅 비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뒤죽박죽 질서가 없는 것에 질서를 세우시고, 텅비어 있는 곳을 채우시는 방향으로 창조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기본적인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먼저 빛을 만드시고, 그 빛을 기준으로 삼아 빛과 어둠, 낮과 밤을 나누시고, 둘째 날에 궁창을 만드십니다. 셋째날에는 땅을 물에서부터 드러나게 하시고 땅에 각종 풀과 나무들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과정은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그 필요를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과정은 하나님의 주된 관심의 대상이요 사랑의 대상이 사람임을 암시합니다. 창조는 하나님이 인간의 거주지를 만들어 가신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 속에서 살아갑니다.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하루 되시길 축복합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그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소서.”
0 Comments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거짓 사도들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으며 바울의 사도적 권위가 의심받고 있음을 전해 들었습니다. 바울 자신이 피땀 흘려 세운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음의 순수한 가르침을 거부하려는 상황을 알게 되면서,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모든 노력을 쏟게 됩니다.
그 방법 중에 하나가 ‘내가 좀 자랑을 해야겠다’ 라는 것입니다. 16절 하: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18절: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자랑이라는 단어 [카우카오마이] 자체가 신약 성경에서 바울이 독점적으로 사용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먼저 쓰여진 서신인 고린도전서와 또 고린도후서 11장 전까지는 바울은 오히려 ’자랑하지 말라’ 하는 것을 여러번 교훈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한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않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하면서, 이 세상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할 뿐, 우리의 능력으로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결코 자랑할 수 없다 하는 것이 그의 신앙 철학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사도권 외에도 특히 복음의 순수성이 깨어지는 상황에서 그가 이전에 했던 이 말과는 약간은 모순되는 듯한 발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바울을 이렇게 어리석은 자가 되기를 자처하면서까지 성도들과 논쟁하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결국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8절: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어떻게 하면 교회를 바로 세울 수 있을까를 밤낮으로 걱정하고 고민했던 바울, 교회 일에서는 약자가 될 수 밖에 없었고 성도를 위해서는 수많은 고통과 매맞음도 감내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연약한 모습, 그것이 바로 바울의 자랑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렇게 성도를 지극히 사랑할 수가 있을까요?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면 교회를 위하여 밤낮 염려하는 것으로 연약함을 자랑삼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크신 사랑을 더욱 깨달아 교회와 성도를 더욱 사랑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오늘 본문은 소위 ‘바보 연설(Fool’s Speech)’이라고 불립니다. 바울은 대적들의 자랑에 고린도 성도들이 영향을 받고 있기에 무익한 줄 알면서도 자신의 자랑을 시작합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바보처럼 자신을 자랑해야 하는 것을 이해해달라고 거듭 당부합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대적들(거짓 교사들)이 전파하는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쉽게 용납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바울은 자신을 고린도 성도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중매인으로 묘사합니다. 그는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신부인 고린도 성도들을 순결하게 지키고자 합니다. 바울은 그의 대적들이 고린도 성도들을 꾀어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게 할까 두려워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과 비교합니다. 먼저, 그는 자신이 말(연설)에는 부족함이 있지만 지식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자신을 변호합니다. 다음으로, 자신이 고린도에서 사역할 때 (1년 반 동안) 성도들의 후원을 받지 않고 자비량 사역을 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고린도 성도들을 높이려고 바울 자신을 낮춰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전하기 위함이었고, 고린도 성도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 안에 그리스도의 진리가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고린도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이 아신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교회 내에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있음을 주의시킵니다. 이들은 거짓 사도이고 속이는 일꾼이고 스스로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입니다. 사탄이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듯이, 사탄의 일꾼들(교회 내에 기회를 엿보는 자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최후는 이들이 행한 대로 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2-3)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제가 주님의 신부로서 이 땅을 사는 동안 진실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모하게 하소서. 주님이 저에게 맡겨주신 영혼들이(가정이나 교회 공동체에서) 주님의 정결한 신부로 살아가도록 돕고 섬기는 일에 쓰임받도록 열정을 더하소서. 항상 깨어서 거짓과 잘못된 가르침에 빠지 않게 하시고, 우리 가정과 목장과 교회를 진리의 말씀 위에 견고히 세워주소서.” 바울은 대적들이 자기를 자랑하며 자기를 추천하는 것을 비판합니다. 이들은 자기를 기준으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를 기준으로 자기를 비교합니다. 이들의 평가와 비교의 절대적 기준은 오직 자기 자신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을 뿐입니다. 대적들과 달리, 바울은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자신에게 나눠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특히 바울의 사역 범위를 뜻하는 것으로, 바울은 하나님께 위임받은 사역의 범위를 따라, 곧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아 하나님이 맡기신 지역들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로 인해, 바울은 고린도 지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고 그 열매로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을 거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의 자세를 변호합니다. 그는, 대적들과 달리,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믿음 성장과 함께 자신의 복음 사역의 영역이 고린도를 넘어 확대되기를 소망합니다. (참고로, 바울은 고린도 지역을 넘어 로마나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기를 소망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자랑하는 자들을 향해 단호히 말합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렘 9:23-24 인용). 그리고, 참으로 인정받는 자는 스스로 자기를 자랑하는 자가 아니고, 오직 주님이 칭찬하시는 자임을 분명히 말합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17)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18)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주님께 칭찬받기보다 저 스스로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들의 칭찬받기를 갈구했던 저의 모습을 고백합니다. 저의 연약과 허물을 용서하소서. 분수 이상으로 자랑하려는 유혹을 이기게 하시고, 모든 사역과 삶의 열매를 주님의 은혜로 고백하며 오직 주님만을 높이는 겸손의 사람 되게 하소서.” |
굿모닝! 말씀 산책매일 개인묵상을 위한 말씀입니다. 아카이브
February 2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