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 사도행전 5장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아나니아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 교회로 가져왔습니다. 마치 전부를 바치는 것처럼 속이고 베드로 앞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함을 받던 사도 베드로는 이모든것을 이미 알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서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이렇게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 교회의 하나됨과 거룩성을 훼손한 사건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성령을 속이는 신성모독 죄로 엄중한 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도들을 속이고 하나님의 신성한 교회를 거짓말로 방해하려는 것에 대한 징벌인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들은 세속적인 것을 버리고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이 사명은 우리교회와 이 말씀을 듣는 주의 성도들의 모든 책임인 것입니다 오늘 주신말씀으로 교훈삼아 변함없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충만한 교회와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오늘의 기도 “하나님, 우리교회의 거룩함을 회복시켜 주시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소서 ” “Elephant in the Room” 이라는 영어 표현이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명백한 문제를 어느 누구도 언급하려 하지 않을 때 쓰는 말입니다. 곧, ‘불편한 진실’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2차 산헤드린 공회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71명의 공회원들 중 사두개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버젓이 일어나 자신들 앞에 서 있는 이 ‘표적’이 이들에게 눈에 가시가 된 것입니다. 이 표적은 예수님의 부활하심, 곧 복음을 가리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 또한 보고 들은 바 된 부인할 수 없는 복음의 메세지 인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얼마 전 예수를 잡아 십자가에 처형 할 때만 해도 “학문 없는 범인”(13절)이었던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함 받은 자, 진짜 구원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믿음은 설득이 아니라 선포입니다. 복음을 삶으로 선포할 때 나타나는 권능입니다. 비난할 말이 없어진 공회원들은 또 모여서 회의를 합니다. 논의 결과 자신들도 부인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16절) 이제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17-18절) 며 베드로와 요한을 위협합니다.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표적만 가리기에 급급하여 그 표적이 가리는 메세지 즉, 복음/말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19절) 선포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문제는,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과 같이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20절) 말하는 그들과 달리, 도리어 사두개인들과 똑같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여전히 믿지 않는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진짜 ‘불편한 진실’입니다. 베드로는 이 불편한 진실을 오늘 자신이 복음을 선포한 바로 이 자리에서 불과 얼마전 (1차 산헤드린 공회) 주님을 세 번 부인할 때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닭이 울고 주님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주님의 말씀을 (예수님 따른 후 지난 3년간 처음으로) 기억해 냅니다. 이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들은 베드로는 이제 두려움이 사라져 버립니다. 두려움의 반대말은 믿음입니다. 믿음의 근거는 끝까지 포기치 않으시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랑입니다 (요일 4:18). 그 사랑을 말하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사두개인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 ‘불편한 진실’을 깨달으셨다면 오늘 말씀 가운데 닭 울음 소리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잠자는 교회를 흔들어 깨우시는 경종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예수님을 모릅니다’ 부인하며, 침묵하며 살던 나를 돌아보시는 주님의 눈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지금도 역사하시는 성령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복음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믿음으로 담대히 선포하는 증인 되게 하소서!” 오늘 본문은 앞장 3장의 사건과 연결이 됩니다. 그 사건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는 중에, 날 때부터 다리저는 자를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키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여 베드로에게로 주목하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베드로가 믿음으로 담대히 행하여 일어난 놀라운 기적이었지만, 몰려드는 백성들에게, 베드로는 더욱 놀라운 발언을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이 일을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말하면서, 수 많은 백성들 앞에서 이 일을 이루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우리는 오직 그의 증인이 될 뿐이라고 외치는 놀라운 믿음의 발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공회 앞에 넘겨 결국 십자가형을 선고했던 같은 무리들이,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었다가 공회에 넘김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물었던 같은 질문을 합니다. 7절: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그러나 베드로는 담대하게 그들 앞에서 선포합니다. 10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2절: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는 우리를 구원하실 이가 없음을 공회 앞에 선포합니다. 모든 유대인 지도자들과 제사장의 문중이 방해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은 끊임없이 확산되어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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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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