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15장에 언급된 엘리바스에 변론에 대한 욥의 대답입니다. 다시 시작된 변론에서 점점 서로에 대한 감정이 격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욥은 세 친구를 향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는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다. 욥은 친구들을 통해서 위로와 배려를 얻고 싶었지만, 오히려 마음의 상처만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자신도 같은 상황에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4~5절).
욥은 그의 답답한 마음을 다시 표현합니다. 자신의 모든 고통의 책임을 하나님께로 돌리면서, 다시 하나님께 한탄을 쏟아 놓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적으로 여기시며, 자신의 고통을 자신을 향하여 날아오는 화살로 비유해 자신이 모든 것을 잃었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결백을 다시 주장합니다. 내 손에는 포악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다는 고백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고통 당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고통을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그 아픔을 안아 주는 것입니다. 또한 욥기의 주제는 욥의 고통이 아니라 그 넘어 있는 하나님의 주권과 의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롬12:15) 오늘의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가운데 어려움을 처한 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욥의 고난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넘어 하나님의 일하심과 통치를 기억하고 하시고, 주님은 한 없는 은혜를 다시 기억하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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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Job didn’t know before his trials, he knows it intimately and personally about life or better yet, about the fragility and brevity of life. This is a good reminder for all of us about the shortness and uncertainty of human life.
In the Scriptures, life is here on earth isn’t calculated by months or years, but by days, for we cannot be sure of any day but that it may be our last. These days are few, fewer than we think of. As it says in James 4:14, “What is your life? For you are a mist that appears for a little time and then vanishes. Keeping this truth in the forefronts of our minds will not only keep us grounded in this life but give us a hope for the life to come. Job had a keen awareness that this life was not the end all be all and though he had lost everything up to this point in his life, he was able to cling to the hope that he could find a hiding-place in the grave. It was not only a passionate weariness of this life that he wished to die, but also in the assurance of a better life. The grave is not only a resting-place, but a hiding-place, to the people of God. The grave is only a pitstop on our journey to paradise—eternal life. It is amazing how hard we fight to “live our best life now” or to live as long as possible. If we say we love the Lord and cannot wait to be with Him and our loved one who are with Him, then why do we fight so hard to stay here. Why do we live as if there is no resurrection and eternal life that awaits those who put their hope and trust in Jesus? Yes, live to the fullest and enjoy the life that God has given you, but know that we have a God who is good and will do good to us in this life and raise us to a new and glorious life for all of eternity as well. Job mourned and suffered tremendously. Job’s suffering and his feelings were real and understandable; yet there was a truth that went beyond his feelings that made sense of his suffering. May this same truth of the resurrection power through Jesus Christ, allow us to navigate through this life with the understanding that this is not our home; that there will be waiting for us life with no more pain, sorrow, tears, or death. May this give us courage to not put all of our lives in the temporary, but to have an eternal mindset. Prayer: Father God, thank you that you are the giver and sustainer of not only this life but for eternity. May the truth of the resurrection power that belongs to all who put our hope and trust in you, give us courage to live here, but also give us hope for what awaits. In Jesus’ name, amen. 욥은 인간의 실존적 한계를 들어 하나님께 변론합니다. 인간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고 그림자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않습니다. 이런 유한한 존재를 왜 주께서 엄격한 눈으로 바라보시고 재판하시는지 묻습니다. 욥은 인간 존재의 부정함을 말합니다. 더러운 것에서 깨끗한 것을 낼 수 없듯이, 인간은 출생부터 부정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주께서 근원적으로 부정한 존재인 인간에게서 눈을 떼시고, 그를 (품꾼처럼) 그의 날이 마칠 때까지 홀로 있도록 해주시기를 탄원합니다. 욥은 인간을 나무와 비교합니다. 나무는 한 번 잘린다 해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루터기에서 새순이 돋고 새로운 가지가 뻗습니다. 뿌리가 늙고 줄기가 죽을지라도 물기운에 힘을 얻어 움이 돋고 가지가 자랍니다. 하지만 인간은 장정일지라도 죽으면 소멸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깨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욥은 인간의 실상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여겨 보시나이까 나를 주 앞으로 이끌어서 재판하시나이까” (1-3) “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뻗어서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장정이라도 죽으면 소멸되나니 인생이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 있느냐” (7-10)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저는 실존적 한계와 부정함을 가진 연약한 존재입니다. 저를 위해 십자가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죽음과 썩어질 육체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늘도 긍휼과 자비로 품어 주시는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의지하게 하소서” 욥은 두 가지 전제 조건을 제시합니다. 첫째,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말아 마소서. 이 요청은 육신의 질병에서 구원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둘째,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마실 것.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감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12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욥은 하나님의 하시는 것에 대한 경외의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 마음으로 한 걸음 하나님께 더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두 가지의 조건을 통해 욥은 하나님과 변론을 자유롭게 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합니다. 부르심과 응답, 질문과 대답을 통해 욥은 자신의 고통을 하소연하고자 합니다. 욥은 23~28절을 통해 자신의 다양한 질문을 하나님께 쏟아 놓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 자신을 날리는 낙엽으로 표현하고, 또 썩은 물건의 낡아짐, 좀먹은 의복으로 표현합니다. 이런 표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고, 하나님 앞에 한걸음 더 나아가는 욥의 고백입니다.
비록 고통 가운데 있지만, 욥은 여전히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다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대답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어려움을 대하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더 나아가고 있습니까? 고난의 때에 우리도 주인 되신 하나님께 한 걸음 더 가까이 가는 성도가 되길 소망합니다. “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얼굴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오리니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시오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마실 것이니라” (20~21) 오늘의기도 “하나님 아버지, 고통 가운데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 앞에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욥의 모습을 우리가 닮게 하여 주시옵소서. 시험과 연단 앞에 알곡이 되어 주님만으로 만족하는 성도가 되게 하여 주시고, 매일 삶 속에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여 주소서.” 욥은 친구들과 변론하기보다 하나님과 직접 변론하기를 원합니다. 친구들의 말은 욥도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욥이 당하는 고난은 (혹은 고난의 원인은) 친구들이 (그리고 욥 자신도)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며 욥을 비난하는 친구들을 ‘거짓말쟁이’요 ‘쓸모없는 의원’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 잠잠할 것을 요구합니다. 잠잠한 것이 지혜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고 말하는 친구들은 사실상 자기 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친구들을 감찰하시고, 이들을 책망하시며, 그 분의 존귀로 이들을 두렵게 하실 것입니다. 친구들의 격언(조상 때부터 전수받은 지혜)은 재 같은 속담에 불과하고, 이들이 방어하는 것은 토성에 불과합니다. 이제 욥은 결심합니다. 그는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더라도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욥을 죽이실지라도 욥의 희망은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뵙고 자신의 의로움을 아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직접 자신의 사정을 아뢰고 자신의 의로움을 인정받는 것입니다. 욥은 오직 하나님께만 구원이 있음을 압니다.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깨달았느니라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하지 않으니라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1-3)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14-15)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인생의 진정한 답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합니다. 사람의 소리, 사람의 의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소서. 주님께 구원이 있음을 믿습니다. 구원자 예수님이 제 삶에 계시니 감사합니다. 나의 변호자이신 예수님, 오늘도 저와 동행해 주시고 제 마음과 영혼을 위로해 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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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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