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살롬의 반역이라는 희대의 사건이 종결되고 전쟁이 종식된 지금, 이제 남은 일은 요압이 왕에게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1장과 4장에 사울과 이스보셋의 죽음을 ‘좋은 소식’이라고 생각하고 전달했던 이들이 다윗 앞에 죽음을 당한 것을 보았던 요압은 다윗에게 압살롬의 죽음을 전하는 문제의 핵심은 ‘what’이 아니라 ‘how’임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생각해 낸 것이 21절에 구스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혹 메세지가 잘못 전달되어 누군가 죽더라도 이방인 출신 종이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죠. 하지만 아히마아스의 끈질긴 요청을 못이겨 요압은 그 또한 메신저로 보내게 됩니다. 열정으로 불타오른 아히마아스 (뜻: ‘진노의 형제’) 였지만 그의 문제는 어떻게 전해야 할지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면, 구스 사람은 왕의 아들이 죽었다는 ‘bad news’를 통해 어떻게 에브라임 수풀 전투에서의 승리라는 ‘good news’를 전달해야 하는가를 묵상합니다. 둘 다 열심히 맡은 바 사명을 다하여 달려간 것은 맞는데 좋은 소식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에 대한 접근 방법이 달랐던 것입니다.
파수꾼이 멀리서 한 사람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알리자, 다윗은 승리의 소식임을 직감합니다 (당시, 전쟁에서 아군이 패배할 시 여러 명의 패잔병들이 도망쳐 나온 것으로 간주). 아히마아스는 그러나 제사장의 아들로서 배우고 습득한, 당시 도덕적 기준이 정해놓은 ‘좋은 소식’ (전투에서의 승리) 만 정확하게 전달할 뿐, 정작 압살롬의 죽음이라는 ‘bad news’를 전달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구스 사람이 다윗앞에 나아오고 목숨을 걸고 압살롬의 죽음을 정확하게 전달합니다. 사실, 이것이 성경이 집중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사무엘하 18장 전체에 흐르는 성경저자의 관심은 단 하나 입니다: ‘압살롬이 어떻게 죽었나/저주받았나?’. 다윗의 왕조는 장차 오실 메시아와 그의 나라를 예표하기 때문에, 압살롬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약속하신 왕의 자리를 빼앗는 곧,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에 대한 대가를 말합니다. 이를 통해, 성경은 압살롬의 죽음이 곧 우리의 죽음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율법의 저주 아래 있던 우리가 ‘어떻게 죽었어야 했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3). 다윗은 “내 아들아”를 5번 목놓아 부르며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외치지만 (33절), 어디까지나 그럴 수 있었다는 가정일 뿐입니다. 하지만, 죽을 만큼 사랑한다 하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 사랑하기 전에,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확증하신 분이 계십니다. 이것이 진짜 Good News이며, 곧 복음입니다.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내가 어떻게 죽었나’에 있습니다. 내가 말씀 안에 온전히 죽지 않으면 예수님의 복음이 온전히 전해질 수 없습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 나를 사랑하사 자기 자신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과 승리가 전해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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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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