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복음주의 목회자 A. W. Tozer는 이렇게 말합니다: “현대 복음주의 교회에서 예배는 잃어버린 보석이 되고 말았다.”
사도 바울은 그 이유를 ‘아직도 내가 완전히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경험하기 원하나, 이는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v. 10) 라는 전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예배에는 제물이 필요한데 바로 내가 완전히 죽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함께 죽는 예배의 삶을 살기 위해 첫번째 필요한 것은 ‘거룩한 불만족’ 입니다 (vv. 12-13a).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바울의 믿음의 경주에 있어 기준점은 언제나 예수그리스도 였고, 그의 한가지 목적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거룩한 불만족은 둘째로, ‘거룩한 헌신’을 불러옵니다 (vv. 13b-14, 16). “오직 한 일,” 예배를 향한 거룩한 헌신을 위해 사도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라” 말합니다. 과거의 승리 혹은 실패에 영향 받지 말고 “푯대를 향하여” 예수님 한 분 닮기 위해, 그리스도 한 분 더 깊이 알기 위해 믿음의 경주를 멈추지 말고 그대로 행할 것을 권면합니다. 따라서 셋째로, 믿음의 경주를 먼저 완주하신 예수님을 카피하는 ‘거룩한 모방’이 필요합니다 (vv. 15, 17-21). 당시 빌립보 교회에 들어와 분탕질하던 유대주의자들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음식규례와 할례를 더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 주장했습니다. 땅의 일을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 이들과 달리,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선포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대표하는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고 도전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지상에서 드리는 하늘의 예배를 경험하는 인생을 살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내가 완전히 죽음으로, 나의 섬김과 봉사 가운데 잃어버린 보석, ‘지상에서 드리는 하늘의 예배’를 매일의 삶 속에서 맛보아 알게 하소서”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이렇게 자신을 자랑하였던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 이 모든 것이 자신에게는 해가 되고, 배설물로 여기는 것들이 되었다고 오늘의 본문에서 고백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은 지금 무엇을 자랑하며 살고 계십니까? 세상이 주는 지식, 부, 권력, 심지어 자녀들의 성공을 자랑하며 사는 것에 큰 기쁨을 느끼며 살고 계십니까? 혹은 성경 말씀을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교회에서 여러가지 봉사로 수고와 열심을 내는 것을 자랑하는 것에 기쁨을 느끼며 살고 계십니까?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우리의 믿음 성장의 해로 여기고 배설물과 같이 생각하며 버리기에 힘 써야합니다. 그런 것에 기뻐하는 삶이 아니라, 복음을 듣게 되었는데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믿게 된 그 믿음을 소유한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자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마지막 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잘 지키며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받고 칭찬받으며 저 하늘 나라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 수 있다는 소망을 품게 된 것에 기쁨을 누리며 그 기쁨을 다른 이들에게 날마다 자랑하며 나누는 복된 삶을 살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가 마땅히 자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여 주시고, 오직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며 그 기쁜 소식을 날마다 힘써 전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앞서 (1장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복음에 합당한 삶을 당부하면서, 한 마음 한 뜻으로 복음을 위해 협력할 것과 대적들을 두려워하지 말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제 (2장에서) 바울은 이를 기초로 (1절의 ‘그러므로’) 빌립보 교인들에게 겸손의 마음을 권면합니다.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와 사랑, 성령의 교제와 긍휼과 자비를 경험한 성도들이라면 서로 간에 한 마음을 품고 사랑할 것을 권면합니다. 이를 위해, 성도는 다툼이나 허영, 곧 이기적 욕망과 자만심을 버리고, 겸손함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자기 일뿐 아니라 타인의 일도 돌보아야 합니다. 이럴 때, 하나 됨을 이루게 되고 (비록 감옥 안에서지만) 바울의 기쁨을 충만하게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겸손의 모범으로 예수님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은 본질과 성품이 하나님과 동일하시지만, 스스로 하나님과 동등되게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여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죽음에 자신을 내어주시기까지 겸손을 보이셨습니다. 이것이 빌립보 교인들이 배워야 할 겸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수님을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들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굴복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예수님처럼 겸손히 섬길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높이신다고 교훈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3-4)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5)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고 닮기 원합니다. 모든 존귀와 영광을 내려놓고 낮아지시고 죽기까지 하나님 뜻에 복종하신 예수님을 따르기 원합니다. 가정 안에서, 교회 안에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존중히 여기고, 서로를 돌보는 마음을 주소서. 나의 삶에서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쓴 서신서로 옥중서신이라고 분류됩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4편의 옥중서신을 기록했는데,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기록하면서, 이 서신들을 많은 믿음의 형제들에게 보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옥중생활은 편안했을리가 없겠지만 유독 그의 표현에서 ‘내 육신' ‘내몸' ‘죽는것’ ‘사는것' 등의 표현을 많이 사용한 것을 볼 때, 그의 옥중생활이 어쩌면 죽음과 아주 가까이 맏닥드려져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그의 믿음이 얼마나 정결하고 담대했는지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언제 처형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 언제 순교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바울은 그의 죽음과 삶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찰하고 있고, 그와 동시에 아직도 그리스도를 위해 더 나아가야 할 복음의 진보를 고민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23절: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7절: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28절: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바울에게 있어서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 오직 유일한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께 유익이 되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유익이 된다면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교회에, 이웃에게, 가족에게 유익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사는 삶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다른 사람들의 삶에 용기를 주고 격려를 주고 기쁨을 주는 삶이라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교회에, 이웃에게, 믿음을 위하여 협력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이땅에 있다면 하나님 앞에 우리가 행해야 할 소명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 담대하게 전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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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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