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대적하는 사람들은 유대주의자들이 써 준 추천서를 내밀며 바울에게 추천서 있는냐고 공격합니다. 이에 바울은 추천서가 굳이 필요하냐고 되묻고, 고린도교회가 바로 그 추천의 편지다라고 말합니다. 고린도교회는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세워진 교회로 곧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당당하게 너희가 살아있는 증거이며,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열매인 고린도 교회가 자신의 사도됨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성령에 의해 하나님께 사도롤 인정받았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고, 부르심을 받은 자는 자기를 불러 사역을 맡기셨다는 분명한 소명의식이 있었기에 그 부르심을 따라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의한 직분과 성령에 의한 직분을 구별하여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가 우리를 의롭다하고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영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직분이 더 귀하고 영광스러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는 소명과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나를 위해 살아야 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각 자의 삶 속에서 주님의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귀한 성도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의 편지로 이 땅을 살아가게 하여 주소서. 주님의 복음을 삷 속에서 드러내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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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 비난은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할 계획을 변경한 것에 대하여 경솔하고 변덕스럽다는 비난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사도 바울은 비난에 대하여 해명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계획을 변경하게 된 동기를 진심을 담아 설명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지도자로서 성도들을 위해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했으며, 자신의 의지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행했음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양심이 비추어 떳떳하다고 말하면서 이런 부분은 오히려 자랑할 만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쓴 편지의 내용은 여전히 변함이 없으며, 고린도 성도들이 모르는 다른 저의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이야기 합니다. 바울의 고린도 방문 계획이 여러 번 변경되자 바울이 일관성이 없다는 비난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바울은 이러한 상황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자신의 편리함을 따져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함을 따라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셔서 인간의 계획은 완벽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완전합니다. 그러한 하나님께는 ‘예’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계획이 변경되었던 일을 해명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오해는 상대방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함부로 판단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바울을 향한 비난도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를 통해, 자신의 변경된 계획이 자신의 편리함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함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함으로 그들의 오해를 풀고 있습니다. 바울의 거룩함과 신실함,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순종함을 따라 우리의 삶에서도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는 성도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해의 상황 속에서도 거룩함과 진실함을 잃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말하고 행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소서”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3-4)
오늘부터 묵상하게 되는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중 오늘날 남아있는 두 통 중 두번째 편지입니다. 고린도전서가 고린도 교회의 질문에 대해 바울이 설명을 해 주었던 편지라면, 고린도후서는 바울의 사도권을 변호하고 자신이 당하는 고난과 복음의 관계를 설명하는 편지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이 편지의 서두 부분입니다. 보통 바울은 서두 부분에는 아주 무거운 내용을 쓰지는 않는데, 고린도후서에서는 간단히 인사말을 마친 후 바로 중심 테마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고난’과 ‘위로’입니다. 바울의 전도사역의 모든 여정은 매우 힘든 고난의 여정이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바울이 표현했겠습니까? 바울이 11장에서 고백한 내용을 보면 힘겨운 여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후 11:23-27)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고난을 크게 두 가지로 좀 나누어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 안에 죄가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더 거룩하게 하시려고 주시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런 고난은 우리를 정결케 하는 고난입니다. 따라서, 이 때는 겸손하게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게 급선무입니다. 두 번째 고난은 내게는 아무런 원인이 없는데도 오는 고난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받는 고난이 이에 해당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경적 가치관으로 세상을 살려 노력할 때 세상적 가치관과 충돌할 때 생기는 고난입니다. 이런 고난은 영광스러운 고난입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5장에서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다” 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런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의 크신 위로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만 ‘위로’라는 단어가 열 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늘에서 쏟아지는 큰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위로가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감을 말합니다. (5절) 예수님이 낮고 천한 삶, 고난 받는 삶을 사셔야만 했던 이유를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실, 큰 고난은 비슷한 고난을 겪어 본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잘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 자녀를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 같은 경우는 이런 고통을 겪어보기 전에는 얼마나 큰 고통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비슷한 아픔을 겪으신 분들간의 모임을 권장합니다. 그 이유는, 이런 고통을 겪어본 사람들이어야 서로가 함께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고, 또한, 그들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시는 분이십니다. (마 11:28)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아픔들을 몸소 겪으셔야만 하셨던 것입니다. (히 4:15) 그래서 예수님의 위로에는 힘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새 힘을 불어 넣어 주십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위로야말로 자신이 숱한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해 준 힘의 원천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 위로는 이제 바울을 통해서 다시금 세상 가운데로 흘러 들어갑니다. (6절) 바울은 자신이 환난 당하는 것이 다른 성도들이 위로함 받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이러한 고난을 허락하신다면, 이 때 너무 이상히 여기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 15:18-19)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받는 박해는 영광스런 박해입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이러한 박해가 올 때는, 주저하지 말고 그 박해를 감당해 내시는 자 되시길 소망합니다. 그 고난을 통해 고난받는 다른 성도님들이 위로함 받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생명의 면류관을 준비해 주실 것입니다. 이 말씀 붙잡고, 주님 주시는 위로함 받으며 끝까지 승리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우리가 정직하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다가 겪게 되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옵소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깊은 위로를 통해 끝까지 고난의 시간을 감당하는 위로의 도구로 사용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제 3연(9-13절)에서, 시인은 여호와께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청원하며 자신의 상황이 ‘깨진 그릇’같다고 탄식합니다. 제 4연(14-18절)에서, 시인은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고백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얼굴이 자신을 비추기를 소망하며, 하나님의 사랑하심으로(헤세드) 구원해주시기를 청원합니다. 제 5연(19-22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감사를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시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그의 부르짖음을 응답하셨습니다. 제 6연(23-24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시인은 회중들(성도들, 여호와를 바라는 자들)을 향해 외칩니다. 시인은 회중들에게 두 가지, 곧 여호와를 사랑할 것과 강하고 담대할 것을 요구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9)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23-24)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깨진 그릇처럼 제 삶이 흔들리고 불확실한 미래로 답답할지라도 나의 하나님만 바라기 원합니다. 주님의 얼굴을 제게 비추소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며 새 힘을 얻게 하소서. 주님을 소망하면서 강하고 담대하게 하소서.” 시편 31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시인은 인생의 위기 가운데 피난처 되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제 1연 (1-4절)에서, 시인은 주님께 청원하며 주님을 향한 신뢰를 고백합니다. 제 2연(5-8절)에서, 시인은 주님께 신뢰를 고백하며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께 감사합니다. 특히, 시인은 1절에서 자신이 주님께 피하고 있음을 고백하는데, 이는 3절에서 ‘주님은 나의 산성이시니’라는 그의 고백과 짝을 이룹니다. 시인은 주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3가지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를 부끄럽지 않게 하십니다(1).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를 인도(지도)하심으로 나타납니다(3).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를 넓은 곳에 세우십니다(7-8).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1)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3)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삶의 위기 속에서 주님께 피하기보다 세상의 방법을 의지했던 저의 모습을 회개합니다. 주님이 나의 산성이고 영원한 피난처임을 고백하며 다시 믿음으로 일어나게 하소서. 주님께 피하는 저를 긍휼히 여기셔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넓은 품 안에 보호하시고 안전케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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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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