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엘리바스가 욥에게 마지막 권면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해답을 욥에게 주면서 그대로 행할 것을 촉구합니다. 하지만 엘리바스가 제시하는 해답은 욥에게 결코 소망을 주지 못합니다. 엘리바스는 욥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라’, ‘교만했음을 회개하라’고 해답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엘리바스의 제안은 욥에게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죄인에게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않는다면 이것은 불가능한 해답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죄인된 우리가 화목하게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엘리바스는 욥을 향하여 태도를 바꿀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욥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엘리바스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욥의 고난이라는 현 상황만을 보고 그 죄인임을 단정하고 있습니다. 회개를 통한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죄인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고,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하여 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오늘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으로 인해 회복의 은혜를 누리는 삶이 되게 하여 주소서. 오늘 하루도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주님께서 부어 주시는 은혜로 승리하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소서. 엘리바스의 세번째 논쟁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욥과 그의 친구들은 인간의 지식, 지혜, 경험으로 논쟁했지만, 인간의 지혜는 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해결책을 찾아주지 못합니다. 위로는 뒷전이 된 채, 대화는 격한 논쟁으로 치닫게 되어서 심판하고 정죄하고 비난하며 오히려 욥의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됩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두가지 죄를 짓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이웃에 대해 불의를 행했다는 것입니다. 6, 7, 9절: ‘까닭 없이 형제를 볼모로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목마른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너는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 대하여 죄를 지었다고 합니다 13-14절: ‘그러나 네 말은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며 흑암 중에서 어찌 심판 하실 수 있으랴, 빽빽한 구름이 그를 가린즉 그가 보지 못하시고 둥근 하늘을 거니실 뿐이라 하는구나… 엘리바스가 말하는 욥의 죄인 됨, ‘사람 앞에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는 것,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짐작을 사실인 것 처럼, 목격하지도 않은 것을 마치 그럴수 밖에 없다 가정하면서 욥을 왜곡하고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오해하지 않는 하나님 이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사람은 나를 오해할 수도 있고 그 오해로 인해 미워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을 아시고 우리의 선한 동기를 한치도 오해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 큰 위로가 됩니다. 나를 온전히 아셔서 우리의 온전한 위로자가 되시고 온전한 중보자가 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힘을 얻는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욥은 친구들의 논리에 반박합니다. 친구들은 인과응보의 논리에 기초하여 악인의 멸망을 말합니다. 그러나 욥은 묻습니다. 현실은 어떠한가? 정말 악인의 등불이 꺼지고 재앙이 악인에게 닥치는가? 친구들은 악인의 죄악이 그의 자손을 위해 쌓여진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하면 악인은 자기 죄악을 자기가 당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하나님은 그 분의 주권에 따라 행하실 뿐이라고 욥은 말합니다. 욥은 사람이 단지 두 부류로 구분된다고 말합니다. 이 땅에서 건강하고 안전하고 평안하게 살다가 죽는 사람과 이 땅에서 고통을 당하고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살다가 죽는 사람입니다. 둘의 공통점은 둘 다 죽어서 무덤에 눕게 되는 사실입니다. 둘 사이에는 선인과 악인의 구별은 없습니다. 욥은 이것이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이 현실은 길 가는 행인은(인생의 경험 많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압니다. 악인은 재난의 날에도 남겨집니다. 아무도 악인을 깨닫지 못하게 하고, 악인에게 보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인은 죽음 이후에도 그의 무덤이 사람들에게 보호를 받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현실이라고 욥은 말합니다.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현실이 인생의 실상이며, 인생은 인과응보의 논리로 다 설명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로써 욥은 친구들의 말은 거짓임을, 즉 자신의 고난은 인과응보의 논리를 초월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내가 너희의 생각을 알고 너희가 나를 해하려는 속셈도 아노라 너희의 말이 귀인의 집이 어디 있으며 악인이 살던 장막이 어디 있느냐 하는구나” (27-28)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헛되이 위로하려느냐 너희 대답은 거짓일 뿐이니라” (34)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고난을 사람의 잣대로 평가하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겸손히 인정하는 믿음을 주소서. 악인이 형통하게 살아가는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원망과 불평을 하기보다 악인을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소발의 반론 이후 욥이 대답합니다. 욥은 친구들이 자신의 말을 주의깊게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고 합니다. 자신이 말하는 동안 좀 참고 있다가, 말이 끝난 후에 조롱하라고 합니다. 욥은 자신의원망이 사람(친구들)을 향하는 것이 아님을, 다시 말해 하나님을 향한 것임을 드러냅니다. 친구들이 선입견이나 전제없이 욥의 고난을본다면 놀랄 것입니다. 욥 역시 자신이 당한 고난을 생각하면 끔찍해서 몸서리쳐집니다. 욥의 고난은 친구들과 욥이 가진 기존의 사고방식, 가치체계를 전복시키는 사건입니다. 소발은 악인은 반드시 멸망당한다고 말하지만, 욥이 보기에 악인은 생존하고 장수하고 강합니다. 악인의 자식들과 자손들도 잘 삽니다. 이들의 집은 평안하고, 하나님의 매도 이들 위에 있지 않습니다. 악인들의 가축도 번성하고,악인의 자녀들은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에도 평안히 스올로 내려갑니다. 더욱이, 악인들은 하나님을 향해 자신들을 내버려 달라고 말하고, 자기들은 하나님의 길을 알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이들은 전능자가 누구기에자신들이 전능자를 섬겨야(예배해야) 하는지, 그에게 왜 기도해야하는지 따져 묻습니다. 하지만, 욥은 이런 악인들의 삶을 부러워하지않고, 이들의 삶에 동조할 마음도 없습니다. 욥은 지금까지 걸어온자신의 길을 걸을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이해할 수없지만, 욥은 자신의 경건을 계속 유지하려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말을 자세히 들으라 이것이 너희의 위로가 될 것이니라” (1-2) “그러나 그들의 행복이 그들의 손 안에 있지 아니하니 악인의 계획은 나에게서 멀구나” (16)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하나님 앞에서 저의 편견과 가치관, 고정관념을 내려놓게 하소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겸손히 인정하는 제가 되게 하소서.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게 하시고, 비록 고난의 길일지라도 주님의 길, 경건의 길을 따르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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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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