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엘리후의 네 번째 발언입니다. 엘리후는 욥을 향해 자신이 계속 말하도록 용납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입장을 빙자하여 자신의 논리로 자신의 논지를 펼치고 있습니다. 자신의 지식은 먼 곳으로부터 왔다고 말하며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엘리후가 자신을 지혜롭게 여기지만 다른 이들의 말을 듣지 안으려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공의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려움을 주시는 이유는 그 악행과 교만을 깨닫고 돌이키도록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결국 세 친구들의 변론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입니다. 엘리후는 욥을 경건하지 않는 자로 규정하면서 저주까지 이야기합니다. 엘리후의 주장은 결국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자가 늘어놓은 진부한 주장입니다.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지만 듣지 사람을 생각하지 않은 그저 자신의 의만 드러내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지혜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상처를 줍니다. 고통 당하는 자를 위로하는 것은 말보다 행동입니다. 진실한 말과 행함을 통해 우리는 고통 당하는 자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기도 “하나님 아버지,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늘 주님의 기억하며 겸손한 삶의 자세를 살게 하여 주시고, 다른 이웃을 향하여 진실함으로 대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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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엘리후의 마지막 변론입니다. 그는 이제까지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주장하는 욥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욥을 책망하는 가운데 그의 변론은 매우 논리적이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확고한 듯 보였으나,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공의의 부분은 이해했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속성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위대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지만, 하나님의 공의에만 치우치다 보니, 엘리후는 우리의 인생을 깊이 이해하시는 인격적이고 긍휼하신 하나님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채, 욥의 고난의 이유가 하나님의 공의에서 오는 심판인 것처럼 욥을 정죄하는 모습입니다.
2절: ‘그대는 이것을 합당하게 여기느냐 그대는 그대의 의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말이냐’ 5-6절: ‘그대는 하늘을 우러러보라 그대보다 높이 뜬 그름을 바라보라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13절: ‘헛된 것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자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사랑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 아닐까요?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될 때, 내가 하나님 앞에 서기에 부족하고 부끄러운 자라는 사실을 더욱 실감하게 되고, 남을 정죄하기 보다는 남을 더 이해하려고 하는 모습으로 성숙되어져 갈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응징하시고 질책하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늘 긍휼을 베푸시고 우리의 부르짖음에 귀기울여 주시는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나의 내면을 먼저 살펴보는 성숙한 믿음의 백성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엘리후의 두 번째 발언이 계속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고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십니다. 행악자는 하나님께 숨을 곳이 없습니다. 행악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지체없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권세자들의 행위를 아시기에 그들을 꺾고 다른 사람들로 그들을 대체하십니다. 그들의 심판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들이 심판 받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며, 가난한 자와 빈궁한 사람을 멸시하고 학대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잠잠히 계실지라도 누가 문제삼을 수 있겠습니까? 이상에서 하나님을 변호한 엘리후는 이제 욥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회개의 내용까지 보여줍니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께 생각을 바꾸시도록 요구하기 전에 먼저 그의 생각을 바꾸어야 함을 말합니다. 엘리후는 다시 한번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 자신의 말을 잘 판단하여 욥의 무지함과 어리석음을 드러내줄 것을 요구합니다. 엘리후는 욥이 끝까지 시험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가 보기에 욥의 대답은 악인의 대답 같고, 욥은 죄에 반역을 더하며 하나님을 대항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행악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사망의 그늘이 없느니라” (21-22)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제 길을 살피시고 제 걸음을 돌보시는 주님이 계셔서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제 마음을 낮추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가난한 자와 빈궁한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게 하소서. 다른 사람에게 회개를 요구하기 전에 저 자신을 돌아보게 하소서. 고난 당하는 사람을 차갑게 판단하지 않게 하시고, 따뜻한 마음으로 위로하며 함께 기도하게 하소서” 엘리후의 두 번째 발언입니다. 그는 지혜와 지식 있는 자들을 향해 자기의 말을 경청하라고 합니다. 정의와 선을 가려내자고 합니다. 엘리후는 욥의 말(자기의 의 변호)을 인용하면서, 욥을 습관적인 비방자요, 악한 자들의 일당으로 평가합니다. 욥은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무익하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엘리후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변호합니다. 하나님은 악과 불의를 행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으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이 뜻을 정하시고 사람에게서 숨을 거두시면, 사람은 누구나 죽고 흙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왕과 지도자들을 향해서도 쓸모없고 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고관들과 부자들을 지위나 외모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창조주이시고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엘리후의 하나님 변호는 대체로 정당하지만, 이것으로 욥의 고난을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엘리후는 인과응보의 논리로 욥을 평가하기에,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고난당하는 욥은 악할 뿐입니다.
“그가 만일 뜻을 정하시고 그의 영과 목숨을 거두실진대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14-15) “고관을 외모로 대하지 아니하시며 가난한 자들 앞에서 부자의 낯을 세워 주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라” (19)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주님은 저의 창조주요 제 인생의 주관자이십니다. 주님께 제 삶을 맡기오니, 제 삶의 걸음걸음을 주의 선하신 뜻대로 인도하소서. 모든 사람을 공의로 대하시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고난 당하는 사람을 대할 때 나의 생각(논리)대로 평가하지 말게 하시고, 그의 상황을 잘 헤아리며 따뜻한 마음으로 위로하게 하소서” 오늘 본문은 엘리후가 고난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던 욥과 세 친구들의 주장과 달리 고난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일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은 때로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도 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말씀을 주셔서 교만하지 않도록 만드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엘리후는 욥의 불평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고난과 재난을 통해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고 한다고 해석합니다. 고난을 벗어나는 방법으로 천사가 그의 중보자가 되어 그의 정당함을 보이고 하나님이 그를 불쌍히 여기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엘리후의 주장은 세 친구들의 주장과 조금 다르게 접근합니다. 자신의 주장에 강한 확신을 가진 엘리후는 욥에게 자신의 말을 잘 들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욥에게 할 말 있으면 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욥의 말을 듣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계속 욥을 가르치겠다는 의미입니다. 엘리후의 말은 결국 욥을 향하여 자신이 가진 것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고난 당하는 자에게 먼저 해야 할 일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견뎌내는 것입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사과니라(잠25:11)” 오늘의기도 “하나님 아버지, 모든 상황속에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심을 감사드립니다. 매일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하여 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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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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