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신앙의 기초_말씀과 기도
본문: 수 1:8, 살전 5:16-18 지난주 부터 신앙의 가장 기초가 되는 영역들을 하나씩 살펴보는 시리즈 설교를 갖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주일 성수에 대해서 함께 묵상했고, 오늘은 말씀과 기도 생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과 기도 생활의 전통은 구약시대 때부터 있어 왔습니다. 신명기 6장에 보면 유대인들은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것을 적어서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고,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고 했고, 이 명령을 지금까지도 잘 지키고 있습니다. 또한, 경건 생활을 지키는 자들은 수시로 기도하였던 것을 구약성경이 증거합니다. 예를 들어, 다니엘은 왕 이외의 신에게 기도하면 사자굴에 들어가게 된다는 조서를 인지한 상황에서도 동일하게 하던 대로 하루 세 번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런 전통은 신약 시대에도 이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을 꿰뚫어 알고 계시며, 바쁘신 사역 가운데서도 새벽에 기도하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초대교회에도 말씀과 기도에 전념했던 사례가 수 없이 많습니다. 이처럼 말씀과 기도 생활은 신앙인에게는 기본 중의 기본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말씀과 기도생활을 해야 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는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에덴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소통하고, 동역하며, 동행하였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단절된 것은 죄가 들어온 결과였으며, 이것을 영적 사망으로 부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은 끝도 없는 타락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창 5장).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은 인간이 창조목적에 맞게 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 됩니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에게 창조주 하나님 자신을 알게 하는 소통의 채널로서 우리에게 주신 책입니다. 성경만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 종합적이며 자세하게 계시해 준 선물이 없습니다. 2천년 전에 기록된 책이지만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서 지금도 살아있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충분합니다. 기도는 성경말씀보다도 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대화에 가까운 행동입니다. 모든 신앙의 선진들은 기도를 통해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쌍방향 기도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할 마음의 준비와 갈망함이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말씀하십니다. 말씀과 기도는 긴밀히 연결되어 함께 작용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받아 기도하기도 하고,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답하시기도 하십니다. 큐티는 말씀과 기도를 종합하여 하나님과 대화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입니다. 그럼 우리는 말씀과 기도 생활을 얼마나 자주 해야 할까요? 예수님과 제자들의 본을 볼 때 매일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 날의 삶의 환경이 다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지혜가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생명의 양식이요, 기도는 생명의 호흡입니다. 음식과 호흡 없이 단 하루도 살 수 없듯 말씀과 기도가 없으면 우리 영은 죽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은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될 수 있습니다. 저의 권면은 ‘어떠한 형태로든 하루 삶 동안 하나님과의 교제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영적 친밀감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친밀감이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준점이 되기 바랍니다. 또한, 일주일 삶을 하나의 영적 리듬으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매일 승리하기는 어려워도 일주일에 두 세번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통해 영적 힘을 얻는 것은 상당히 가능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씀과 기도 생활을 하는 데 가장 큰 방해요소는 무엇이 있을까요? 첫째, 바쁜 일상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은 바쁨을 관리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청년들의 직업선택의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워라벨 (work-life balance)입니다. Life는 생명입니다. 일과 생명의 밸런스를 맞출 수 있는 직업이 영적으로 건강한 근무 환경입니다. 만약 내 삶의 환경이 하나님을 찾기 어렵다면 주기적으로 하나님과 깊이 만나는 기회를 가져야만 합니다. 중세시대 때 세속화, 제도화된 교회에서 영적으로 지친 사람들은 영성을 회복하기 위해 스스로 수도원에 들어가 영성 훈련을 받았습니다. 현대에도 이런 훈련이 필요합니다. 또한, 바쁜 일상 가운데 말씀과 기도 생활을 하는 현실적인 방법들을 훈련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둘째, 회개하지 않은 죄입니다. 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피하도록 합니다. 내 마음에 죄를 품고 있으면 말씀과 기도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때는, 제자의 발을 닦아 주신 예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목욕한 사람 (세례)도 흙 길을 다니면 매일 발을 닦아야 합니다 (회개). 우리 주님은 이것을 너무 잘 아십니다. 우리가 매일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주께서 우리 발을 깨끗이 씻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죄에서 자유해져서 하나님께로 담대히 나아갑시다. 셋째, 말씀과 기도의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D형 큐티가 뭔지, 관찰 – 해석 – 적용이 뭔지 전혀 훈련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 훈련이 안되어 기도의 감동도 모르고, 10분 이상 기도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요. 예수님 조차 말씀과 기도를 매일 훈련하셨습니다. 우리의 영적 삶이 깊어지려면 우리는 말씀과 기도의 훈련을 기꺼이 받아야 합니다. 공동체가 함께 하는 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하시기를 권면합니다. 좋은 신앙서적들을 읽는 습관도 대단히 도움이 됩니다. 주일 저녁에 한 주 영적 삶의 포트폴리오를 짜시기 바랍니다. 한 주간 하나님과 깊이 있는 교제의 기회를 계획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단 번에 받았습니다. 그 다음은 부지런히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 가야만 합니다. 태어나서 성장이 없으면 부모가 근심하듯, 구원받고 영적 성숙이 없으면 하늘 아버지가 근심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말씀과 기도 생활을 통해서 건강한 영성으로 무럭 무럭 자라는 복된 공동체 되기를 축원합니다. 나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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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앙의 기초_주일성수
본문: 출 20:8-11 할렐루야! 오늘부터 저희는 신앙의 기초가 되는 몇 가지 요소들을 하나씩 살펴보는 시리즈를 갖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청년분들이 신앙의 가장 기초가 되는 영역들을 성경적 배경을 통해 이해하고 삶에서 실천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주일 성수에 대해서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주일의 개념은 구약시대의 안식일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서 비롯됩니다. 주께서 엿새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칠일 째는 안식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안식이 7일간 창조사역의 완성이며, 안식도 창조사역의 일부분입니다. 하루에는 낮(일)과 밤(휴식)이 있듯, 일주일에는 안식일이 시간적 리듬을 갖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따라서, 안식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창조 원리입니다. 안식의 문자적 의미는 ‘멈춰서다, 휴식하다’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에는 하던 일을 멈추고 휴식하는 것입니다. 피곤치 않으시고 안식이 필요 없으신 하나님께서 친히 본을 보이심으로써 우리에게 안식의 원리를 확실하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조차 이렇게 본을 보이셨다면, 그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은 안식의 창조 원리를 지킬 때 가장 완전하고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안식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원리이기 때문에 내 생각을 버리고 성경의 원리를 신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재정하셔서 우리를 복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은 안지키면 벌받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지킬 때 창조주의 복을 받는 축복의 일환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행위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노예로 있을 때는 안식함이 없이 이집트와 그들의 신들을 위한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원리가 깨어진 상태였습니다. 이런 주의 백성을 자유케 하셔서 바로 세우신 것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하며 과거의 고된 노동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택함받은 백성인 이스라엘이 안식의 원리를 지킬 때 복 받는 것을 열방에 보임으로써 온 세상이 창조주의 창조 원리를 깨닫도록 하시기 원하셨습니다. 이처럼 구약시대 안식일의 본래 의미는 자유함이요, 복된 백성의 정체성이며, 창조 질서의 회복이란 깊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주일로 전환된 것은 이 땅에 오신 독생자 예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부활의 영광의 의미를 깊이 깨달은 초대 교회의 자연스런 결정이었습니다. 부활의 아침은 창조주께서 승리하신 날이요, 인류 구원이란 큰 계획이 완성된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의미있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부활의 아침을 주일 (The Lord’s Day)로 부르며 구약 시대의 안식일의 전통을 계승하였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가 주일 아침에 예배를 드린다는 의미는 구약의 안식일의 의미에 더하여 예수 부활의 기쁨과 능력을 매 주 삶 속에서 누리는 의미가 추가된 것입니다. 주께서도 누가복음 4장에서 주일 사역을 통해 자유함과 회복의 큰 은혜가 임할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일주일간 세상에서 받은 상처가 회복되고, 세상의 거짓 왕들 (돈, 권세 등)이 파함 받고 주께서 영원한 왕되심이 선포되는 귀한 시간이 주일과 주일 예배를 통해 재정립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성경적일까요? 첫째, 주 안에서 안식하는 것입니다. 성경적 안식의 의미는 창조주와의 연합을 통한 영적 휴식을 의미하기에 세상의 레크리에이션이 아닙니다. 창조주를 기억하고, 그 분을 예배하며 그 분과 연합됨을 통해 우리 영혼이 휴식과 재충전을 받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이 날 세상적 유희나 오락을 삼가할 것을 강조합니다. 이 부분은 우리 청년들이 깊이 고민해봐야 할 부분입니다. 주일을 껴서 여행계획을 잡고,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것에 있어서 성경의 원리보다 내 상식으로 너무 융통성을 갖고 있지 않은 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둘째, 주의 백성들과 기쁨을 나누는 교제입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 교제하기 위해서 당시 안식일의 규정까지 어기셨습니다. 이어서 주님은 안식일의 핵심은 안식일의 주인인 주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요, 주의 백성들이 삶과 기쁨의 교제를 하는 것임을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주일에는 주의 백성들이 함께 안식하며 식사 교제하며 삶을 나누는 것이 주님이 보여주신 본입니다. 저희 목장모임이 굉장히 좋은 예입니다. 함께 주님을 따르는 지체들이 소그룹 교제와 식사를 통해 신앙과 삶을 나누는 것은 세상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값진 것입니다. 그 값어치를 안다면 교제 시간을 쓰는 것을 너무 아까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하나님께 후히 드리면, 하나님이 더더욱 내게 후히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맛보는 귀한 청년들 되시길 소망합니다. 셋째, Internalization (내재화) 하는 것입니다. 주일 하루동안 주님을 예배하고, 주 안에서 휴식을 누리며, 교우들과 깊은 교제를 하다 보면 반드시 내게 와닿는 포인트들이 있게 됩니다. 그것들을 깊이 내재화하는 가장 좋은 시간이 주일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인생의 4 big questions가 더욱 명확해지고, 내 삶의 가치관과 방향성이 바로 서게 됩니다. 이것이 주일을 주일 답게 보내는 가장 복되고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주일을 기점으로 매주 새로워지고, 심령이 강건해지며, 우리 삶의 방향성이 잡혀 간다면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날을 ‘구별하여 복되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날, 창조주의 창조 원리에 맞게 창조주 안에서 깊은 영혼의 쉼을 얻고 새롭게 변화받는 우리 Psalm 공동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 질문
제목: 부르심을 따라서
본문: 행 22:17-21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뒤로 한 바울은 마게도냐와 헬라를 거치며 2차 전도여행 때 세운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며 성도들을 세웁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이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바울을 심히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이는 위험한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이 생각은 성령님께서 주신 마음이었습니다. 성령님의 음성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갈 것과 그 곳에서 결박과 환난이 있을 것임을 반복적으로 말씀합니다. 심지어 바울을 아끼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도 예루살렘에 가면 위험하다는 메시지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것이 비록 위험하더라도 예루살렘에 가기로 결단합니다. 그것이 성령님이 이끄시는 길임을 바울은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갔을 때 성령님의 말씀대로 그는 유대인들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로마 천부장이 소동을 진압하며 그를 진영 내로 억류하였고, 소동이 심해지자 그는 가이사랴에 위치한 로마 총독에게로 보내지게 됩니다. 거기서 그는 로마 황제에게 상고하여 결국 로마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 과정에 2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감옥에서 황제의 판결을 기다리며 옥중서신 네 편을 기록합니다. 그 사이에 그는 유대인들 앞과, 로마의 천부장과 총독, 아그립바 왕 앞에서 예수를 변증하였으며, 로마 옥중에서도 복음 전파 사역을 담대히 계속합니다. 결국 그는 그의 삶을 로마에서 마감합니다. 인간적으로 보자면 매우 힘들었던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의 의미를 살펴 봄으로써 그의 신앙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첫째, 교회의 연합을 위해서 입니다. 바울이 위험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은 자신이 개척한 이방교회와 예루살렘 교회의 연합을 염두한 발걸음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교 출신의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었는데 그들은 율법과 전통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반면 이방교회는 헬라인과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중심인데 특히 이방인들에게는 율법과 전통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방교회의 유대인들에게서 바울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돌기 시작했는데 바울이 율법과 전통, 심지어 유대 민족과 예루살렘을 욕되게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유대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 것이기 때문에 이 소문은 헛소문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오해로 인해 초대교회가 완전히 둘로 갈라질 위기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이러한 오해를 풀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장 먼저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들을 만납니다. 거기서 바울은 전도여행의 결과를 알리고, 준비해 간 헌금을 교회에 드렸습니다. 또한, 교회가 권면한 결례를 지킴으로써 오해를 풀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초대교회의 연합을 지키고자 바울은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둘째, 유대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바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대인들에게 붙잡힙니다. 이것을 주도한 것은 소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바울을 따라다니며 훼방하던 자들입니다.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온 이들은 거짓 주장을 펴며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붙잡고 죽이려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은 인간이 막을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군중심리에 호도된 군중보다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그들에게 바울을 거의 죽기 직전의 위기를 맞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에 참여한 자는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마치 욥의 생명을 지키셨듯 하나님은 바울의 생명을 지키십니다. 이 소식이 로마 천부장의 귀에 들어가서 그들이 군중의 소동을 진압한 것입니다. 이로서 바울의 목숨이 보존되었습니다. 이 때 바울은 천부장의 허락을 받고 충대에서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변증합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과 그들의 동질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나서 왜 자신이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바울은 열심 있던 유대인인 자신이 바뀐 이야기를 들으면 동족들도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을까 기대하였습니다. 이는 로마서에서 밝혔듯 하나님의 유대인 구원 계획을 그가 믿고 있었고, 그 스스로도 유대인들을 깊이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셋째, 부르심을 따라 간 것입니다. 바울의 변증은 오히려 유대 군중의 격분을 불러옵니다. 유대교 프레임에 갇힌 자들은 여전히 복음에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이들의 반응을 통해 바울은 아직 유대인의 때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는 실망하기 보다는 자신의 부르심에 집중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위대한 점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음성을 따라 로마에서 예수를 전할 마음의 준비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천부장에게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히고 정당한 권리인 로마 황제의 재판을 요구합니다. 그는 로마로 압송되는 과정 속에서 만나는 모든 자들에게 자신있게 예수를 전합니다. 그리하여 그의 부르심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합니다 (행 9:15). 심지어 로마에서 수감된 상태에서도 그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칩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마지막 구절을 읽으며 바울이 수감된 것을 떠올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담대한 행보 때문입니다. 사실 그는 쇠사슬에 묶여 로마 군병의 감시를 받는 상태였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를 포함한 교회 전승에 의하면 바울은 네로 황제 때 로마 화제 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참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삶은 예수를 만난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교회의 핍박자에서 교회의 수호자가 되어 이방인 복음전파의 위대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한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그의 인생 후반전은 결코 쉽지 않은 삶이었지만 그는 끝까지 사명을 완수합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평생을 ‘부르심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소명은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배의 키잡이가 됩니다. 다메섹에서 만난 주님의 부르심. 그 하나만 집중하며 위대한 삶을 살아낸 바울에게 최고의 존경의 마음을 드리며, 바울을 바울되게 하신 주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나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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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mber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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