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전도자의 깨달음, 허무함 (전1:2-4, 2:16, 7:2)
전도서는 솔로몬이 지은 아가서, 잠언, 전도서 중에서 결론과도 같은 책입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전도서를 솔로몬이 가장 노년이 되었을 때 기록하였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도서에는 잠언의 지혜에 더하여 솔로몬의 인생 경륜까지 함께 합해져 있는 귀한 말씀입니다. 잠언에서 솔로몬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으로 살면, 이 땅 가운데서 복된 삶을 산다는 도덕법칙을 강조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지혜를 무시한 우매자는 세상에서 실패한다고 경고합니다. 그런데, 그가 지혜자로서의 평생 살아보니 세상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런 발견은 그의 지혜에 대한 묵상을 더욱 깊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 삶과 죽음, 진정한 가치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을 탐구하게 되었습니다. 전 1:2절에 이 책의 가장 큰 주제인 ‘헛되다’ 혹은 ‘허무하다’가 바로 나옵니다. 이 단어의 히브리 원어는 hevel인데, 이는 연기(smoke), 숨/공기(breath), 허영(vanity)를 뜻합니다. * Timothy Mackie 목사님, ‘허무하다’ = (1) 일시적이고 덧없다 (2) 수수께끼 같고 역설적이다 그러나 전도서는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 불교의 허무함과 성경의 허무함의 차이: 본질적 허무함(불) vs. 물질세계의 허무함(성경) 성경은 완전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영역이 진정으로 의미있고, 가치있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선과 악, 영원한 것과 유한한 것, 하나님의 개입과 인간의 자유의지, 우연과 같은 일들이 뒤죽박죽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하나님의 영역처럼 클리어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미스테리한 영역입니다. 이는 하나님 자체가 미스테리하신 분이시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이 고민해야 하는 것은 허무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갈까 하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이 세상에서 허무함을 가장 크게 느낀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시간의 영원함’입니다. (전 1:3-4) 전도자는 세월은 영원한데 우리의 삶은 그에 비해 너무 짧음을 크게 느낀 것입니다. * 이 땅 원주민과 우리의 후손 이야기, 옛 학교 및 고향에서 느낀 이질감 전도자는 자연현상을 통해서도 인간의 유한함을 동일하게 느꼈습니다. (전 1:5, 1:7) 그는 해가 반복해서 뜨고 지는 것, 강물이 끊임없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 등을 보며 우리 인간사를 떠올렸습니다. 우리는 지나가도 세상은 계속되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세월은 모든 불평등을 평등하게 만드는 궁극의 평등자, the great equalizer입니다. * 나비 애벌레 이야기 둘째, 전도자가 허무함을 느낀 주제는 ‘죽음’입니다. (전 7:2) 죽음은 우리 인간이 절대로 극복 불가능한 것입니다. 권력으로도, 재력으로도, 과학으로도 죽음은 극복하지 못하였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다 평등해집니다. 그래서, 죽음도 또 하나의 the great equalizer입니다. 이것이 전도자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전 2:16b) 죽은 사람은 대중들의 뇌리에서 너무 쉽게 잊혀집니다. 이는 당시 최고의 명예를 누리던 전도자에게 또 하나의 충격이었습니다. (전 9:4b) 그래서 전도자는 우리 산 자들에게 ‘죽음’을 생각하고 살기를 강조합니다. (전 7:2) 이 세상을 살아간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죽음을 염두해두고 사신 분은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의 삶과 사역이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고 일관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전도서가 말하는 허무함은 허무주의와 같은 염세적 허무함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시야를 바로잡기 위한 깨달음입니다. 세월의 영원함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또, 죽음이라는 예정된 미래를 염두하면서, 오늘의 삶에서 무엇에 더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하는가를 돌아보는 좋은 기회를 가지시길 축복합니다. 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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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인생의 모든 질문이 풀릴 때 (창 45:25-46:4)
땡스기빙인 오늘 본문말씀은 사실 감사와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야곱의 생애 거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이삭의 쌍둥이 아들의 둘째인 야곱의 이름의 뜻은 발뒤꿈치를 잡는자, heel holder입니다. 나중에 그가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할 때 주께서 그 이름을 이스라엘로 변경해 주셨는데, 이 뜻은 하나님과 다투는 자입니다. 그는 2명의 아내와 2명의 첩 사이에서 12명의 아들과 딸 한 명을 나았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되어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경쟁적이고 투쟁적이었지만 동시에 내성적이 조용한 성격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런 성향 때문에 그는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형 에서를 편애하였고,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편애하였습니다. 편애는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야곱은 본인도 편애의 희생자였지만, 조상의 죄성을 그대로 물려받아서, 레아보다 라헬을 편애하였고, 요셉과 베냐민을 다른 아들보다 편애하였습니다. 야곱이 이처럼 계획이 많고 투쟁적이다 보니 그 삶이 굉장히 고달팠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항상 관계의 문제가 있었고,그는 죽음의 위협도 많이 겪었습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항상 해결되지 않는 궁금증을 평생 간직하고 살았습니다. 이것들은 그가 하나님께 깊이 다가가는 데, 그가 자기 인생을 기쁘게 누리는데 많은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첫째, 그의 풀지 못한 의문은, 출생서열과 아버지의 편애로 말미암아 결정된 장자권이었습니다. 쌍둥이간에 태어난 몇분 안되는 시간 때문에 결정된 장자권을 그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리브가에게 나타나 야곱이 에서보다 큰 자가 될 것을 예언해 주셨는데도 그 아버지는 에서만 편애하였습니다. 또한, 에서는 본인 스스로 팥죽 한 그릇 얻어먹기 위해서 장자권을 야곱에게 넘겼기 때문에,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은 것은 일방적인 속임수라고만 볼수는 없습니다. 그의 두번째 풀리지 않는 질문은 그가 하란땅으로 쫓겨가게 된 것입니다. 크게 잘못한 것이 아닐수도 있는 일이지만, 불같이 화가 난 형 에서를 피해 그는 외삼촌 댁으로 피해 갑니다. 이 일은 내성적인 야곱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돌베게 사건) 세번째 질문은,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과는 정 반대되는 현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에게 땅과, 자손과, 복의 근원이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펼쳐진 삶은 이와는 정 반대였습니다. 외삼촌 라반은 그를 계속해서 속이고, 노동력을 착취합니다. 특히, 자기에게 주기로 약속한 라헬 대신 레아를 아내로 주었습니다. 이 때문에 14년간이나 노동력을 착취당했습니다. 그의 결혼생활도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두 아내는 항상 질투와 갈등관계에 있었습니다. 더구나, 사랑하는 라헬이 낳아 준 요셉을 레아의 아들들이 이집트로 팔아버리고 짐승에게 죽었다고 야곱을 속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죽는,’ 마치 저주 같은 느낌까지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가나안 땅에 심한 가뭄으로 야곱은 그 아들들을 이집트로 보냈고, 그 과정에서 아들들에게 요셉이 살아있고, 온 이집트를 다스리고 있다는 충격적인 말을 전해 듣습니다. 야곱은 이에 모든 가족을 이끌고 이집트로 향하는 길에서, 자기 고향이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감격적인 약속을 다시 들려줍니다. 이 언약의 말씀을 통해 야곱은 130세나 돼서 드디어 그가 평생 갖고 있던 모든 인생의 질문들이 해결되기 시작했습니다. 자손에 대한 약속은 이집트에서 계획된 것이었고, 하나님은 그를 장자로 인정하고 계셨으며,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해서 그는 많은 자녀를 낳아야만 하였고, 그 모든 미스터리의 중심에 가장 사랑하는 요셉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삶의 힘겨운 무게들이 하나님의 크신 계획과 경륜을 이해하기 시작하니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야곱은 이제서야 자기 삶의 영원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날은 야곱에게 인생의 땡스기빙이었습니다. 우리도 끈기 있게 하나님께 붙어있고, 주신 비전만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 인생이 설명되는 축복의 시간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땡스기빙입니다. 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말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지혜의 말씀: 경외, 의뢰, 섬김, 훈계, 화평, 이웃사랑 (잠언)
오늘은 잠언 마지막 편으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지혜의 말씀들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잠언의 하나님에 대한 지혜의 말씀 중,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강조합니다. 경외는 하나님을 외경스럽게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하나님은 친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관심이 많으시고, 우리의 세밀한 부분까지도 함께 하시기 원하십니다. 이 두 가지 태도를 균형있게 유지하는 것이 건강한 영적 생활에 매우 중요합니다. 둘째, 범사에 하나님께 의뢰하고 그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느냐? 입니다. 성경은 우리 눈에 하찮게 보이는 작은 것들이 내 영적생활에 더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눅 16:10, 마 6:34) 우리가 우리 일상을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다고 인정하고 그 분을 신뢰하면 우리 일상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 됩니다. 셋째,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영역인 헌금과 섬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잠 3:9) 잠언말씀은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헌신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일을 하시기 위해 우리의 헌금과 섬김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신데 왜 이것을 요구하실까요? 그것은 거기에 우리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 6:21) 성경적인 헌금은 나의 마음이 담긴 헌금입니다. 헌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헌금과 헌신은 하나님의 초청이자 calling 입니다. 넷째, ‘징계’를 겸손히 받으라는 것입니다. (잠 3:11) 하나님은 우리보다 굉장히 인내하심이 크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를 징계하시기까지 그 분은 우리에게 많이 인내하신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경고와 징계를 경히 여기지 않습니다. 추가해서, 잠언은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징계하시기 때문입니다. (잠 3:12) 또한, 하나님의 징계는 반드시 회복과 성숙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잠언은 이웃간에 적용되는 지혜를 말합니다. 그 첫째는 화평케 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단점보다는 장점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바다는 물을 가려서 받지 않습니다. 두번째로, 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사람이 극단적이면 일단 목소리가 커지고 센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다른 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화평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잠언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강조합니다. 이웃사랑의 황금률은 “내가 받고 싶은 것처럼 남을 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은 쉬운데 행동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비결은 잠 14:31a,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하시는 창조물이요, 주의 자녀들입니다. 비록 우리 눈에는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도 우리 하나님께서 그 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그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교사님 이야기) 기독교인의 사랑은 수평적 사랑이 먼저요, 수직적 사랑이 그 다음입니다. 그 수평선과 수직선이 만나 십자가를 이루고, 그 곳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근간이자 이유입니다. 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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