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린 사람들
신약과 복음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부류의 사람들 중 하나는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로마의 압제에 대항할 메시아를 기다리다가, 자기 눈앞의 메시아를 못 알아보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일반인뿐만 아니라 3년간 예수를 좇은 제자들도 정치인 예수를 원했을 정도입니다. 과연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고, 이들의 실패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기 원합니다. 크게 볼 때, 평화가 이 땅에 도래하는 두 가지 방식은, 평화를 저해하는 위협요소가 제거되는 방식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린 자들은 첫 번째 방식을 선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두 번째 방식을 가르치셨습니다. 때론, 하나님은 위협요소를 제거함으로써 평화를 주시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임박한 환란을 견디며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통해 평화를 주시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첫 번째 평화의 방식에만 고착되었던 이유는, 주전 167년경에 있었던 마카비 전쟁의 영향이 컸습니다. 마카비는 셀리우쿠스 제국의 유대교 핍박에 대항하여 끝까지 항전하였고, 하나님의 강권적 개입하심으로 막강한 헬라제국의 군대를 무찌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약 100여년 후 이들이 다시금 로마의 속국이 되어 억압을 받게 되자, 그들은 제2의 마카비 역할을 할 메시아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미 구약성경에는 로마 (독수리) 제국의 압제와 메시아의 승리가 예언되어 있었기에, 백성들은 자신들을 로마로부터 구원해 줄 다윗의 후손으로 올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가 자신들이 기다린 메시아인지 매우 궁금해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로마를 상대로 전쟁을 할 의도를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으러 왔다고 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임함으로써 도래하는 두 번째 평화의 방식을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는 나라입니다. 이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이며,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뜻은 인류의 구원과 악의 심판인데, 예수님이 그 키를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고착된 자기 신앙으로 그린 메시아에 대한 선입관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로마에 항전을 벌이는데 이를 유대전쟁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의 개입과 보호하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후 70년 예루살렘성이 멸망하면서 완전히 진멸되고, 남은 자들은 노예로 팔려가는 쓰라린 아픔을 다시 경험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활동하실 때 유대전쟁을 예고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묘사가 실제 유대전쟁 때 일어난 일들과 너무나 정확하게 기록되어 놀랍기까지 합니다. 유대인들은 첫 번째 평화 방식을 요구하였지만, 하나님의 뜻은 메시아를 통한 두 번째 평화였기에 그들은 실패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글이 기록된 시기는 유대전쟁이 한창 진행되는 중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한번 정확하게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들이 실패한 사례는 오늘 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끌어 가시는 방법, 혹은 우리 인생을 이끌어 가시는 방법은 우리 생각과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삶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은 ‘나의 프레임으로 하나님을 제한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가 얼마나 많이 이런 오류를 범하는지요~ 이들이 실패했던 다른 요인은, 성경말씀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은 고난받는 메시아에 대한 구체적인 예언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고난받을 것을 예고하셨다면, 그들은 이 구절을 떠올렸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 번 고착된 그들의 메시아 관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취사선택하여 이해하는 방식은 잘못된 프레임을 만드는 가장 흔한 경우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전체적 흐름과 맥락을 이해하도록 더욱 더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전쟁 예언에 이어 종말의 심판까지 예언하십니다.(눅21:25-28, 눅17장) 이 일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유대전쟁이 그랬듯 반드시 그대로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면 갈수록 종말의 징조들은 더 확실해져 가는데 반해 기독교인들마저 종말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어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건전한 종말신앙은 신앙인으로 살아가는데 정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종말이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때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가 종말의 때 예수님의 다시 오심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종말을 바로 알고, 그것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가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에 가장 방해가 되는 세 가지를 말씀해 주셨는데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입니다.(눅21:34) 혹시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요? 그렇다면 우리도 마음이 어두워져 종말을 못 보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그 날이 덫과 같이 임하리라고 예수님은 경고하십니다. 마라나타 신앙이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소망하는 신앙입니다. 그 날이 오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소망인지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데 귀하게 사용되시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묵상 질문 1.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린 사람처럼 나는 나의 프레임에 갇혀 하나님의 계획을 오해한 경험은 없었나요? 2. 우리가 크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구별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해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3. 나는 종말을 두려워하나요, 아니면 소망하나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4. 종말을 소망하는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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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를 버린 자들-바리새인예수님 당시 예수님께 가장 크게 질책을 받은 무리들의 대명사는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 당시 유대교를 대표하는 유력한 세 분파(바리새인, 사두개인, 에세네파)중 하나였는데, 그 이름의 뜻은 “구별된 자들” 입니다. 이들은 예수님 오시기 약 2백년 전 밀려오는 헬레니즘 문화와 이방신들에 저항하여 광야로 나가 끝까지 싸우며 율법의 순수성을 지켰던 자들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에게 백성들은 큰 지지를 보냈고, 그들은 이어 회당 (synagogue)을 중심으로 율법과 전승문헌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장로를 세우고 판사 역할을 하며 백성들의 민/형사 및 종교 문제를 판결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바리새인은 종교교육과 재판권을 갖고 점차 백성들의 지도층이 되었고, 백성들에게 존경과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나온 장로, 서기관, 제사장, 산헤드린 공의원들도 많은 수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이렇듯 이방신을 섬기는 문화에서 율법을 지키는 ‘거룩 회복운동’이란 좋은 뜻으로 시작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당시까지 율법을 수호하기 위해 여러 번 학살과 처형을 받는 어려움도 감수하였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어찌하여 예수님께 가장 책망받는 부류가 되었는지는 역사의 아이러니요,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어떠한 점을 책망하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은 그들의 외식함을 신랄히 비판하셨습니다. 외식(外飾)이란 겉과 속이 다름을 의미합니다. 또한, 가르치는 것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죽어있는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럼 왜 율법을 위해 죽음도 불사했던 바리새인들은 이렇듯 외식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들 마음이 ‘하나님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충직히 섬기자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로인해 권력층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마음에 하나님은 사라지고 백성들만 남은 것입니다. 성경에는 바리새인들이 백성들을 살피는 장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마3:7, 막11:18, 마21:46 등) 이렇듯 사람이 중심이 되면 권력 중심적, 재물 중심적 사람이 되게 됩니다. 그러면 세상 가치관이 성경 말씀보다 강하게 작동해서, 말씀이 돌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튕겨 나갑니다. (눅16:14) 우리는 가급적, ‘하나님도 잘 섬기고, 세상에도 잘 맞춰 사는 것이 더 지혜롭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성경의 결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영적으로 타락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바알도 섬겼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영적 간음으로 간주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라는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처음에는 순수한 신앙 열정으로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대중의 지지를 받아 권력의 자리에 올라가자 하나님의 자리에 사람을 앉힌 것입니다. 그 결과, 헬레니즘을 반대했던 그들은 후에 권력유지를 위해 로마 권력을 끌어들입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로마의 식민지가 되고 맙니다. 바리새인들의 영적 타락에는 성경에 대한 임의적 해석 관습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모세오경) 외에도 전승문헌 (미쉬나, 미드라쉬, 탈무드, 할라카 등)을 거의 동등한 권위로 인정합니다. 랍비의 성경해석법 (PRDS 4단계)를 보면 성경본문을 해석할 때 전승문헌을 함께 보도록 합니다. 전승문헌은 말씀과 전혀 관련 없는 수많은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 탈무드) 그래서 랍비들의 성경해석은 굉장히 율법적일 것 같은 첫인상과 반대로 개인별로 천차만별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말씀 해석 자체는 보수적으로 하고, 이를 적용할 때에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기독교의 전통적 성경해석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신구약이 통합될 때 하나님의 구원사역, 은혜, 믿음, 종말 등에 대한 이해가 완성됩니다. 구약만 가지고는 이러한 내용이 다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구약만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세상과 삶에 대한 수많은 질문들은 전승문헌과 자신들의 영적 상상력으로 해석합니다. 그 결과, 오늘날 유대인들은 말씀의 본질인 메시아에 대한 이해조차 매우 비성서적이 된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을 보면서 놀라운 점은, 우리 안에도 바리새인과 같은 모습들이 참 많다는 점입니다.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사람들의 인정에 목말라 있습니다. 이는 굉장히 위험한 태도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 사람에게 맞춰지면 그 때부터 우리의 가치기준은 세상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좋은 동기로 시작했지만, 그들이 대중의 지지에 취하면서부터 그들의 영성이 타락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항상 무엇을 하든지 첫 마음을 기억하고, 내가 이 섬김을 왜 하는지 근본 목적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또한, 성경말씀을 내 잣대로 가감하지 않고, 순수히 받으며, 순종하는 태도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경해석에 과도한 자기 생각은 우리를 미끄러지게 만듭니다. 말씀은 말씀 안에서 해석하고, 더 많은 노력을 ‘어떻게 살아낼까’에 기울여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회당에서 율법공부하던 자들이고, 제자들은 예수님과 삶의 현장에서 제자훈련을 받은 자들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을 많이 아는 것보다, 적게 알더라도 순종하는 것이 훨씬 보배로운 이유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이름의 참 뜻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잡아와 사형죄로 넘기고, 주님 부활하시자 거짓으로 제자들에게 시체를 훔친 혐의를 씌웁니다. 예수님을 버린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과 철천지 원수가 됩니다. 반면, 그들에게 탄압받던 초대교인들은 죽음 앞에서도 신앙의 정절을 지키고,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구별된 자”의 삶을 삽니다. 누가 진정한 바리새인 (구별된 사람들) 입니까? 만일, 우리 크리스챤(예수를 따르는 자)이 예수를 따르는 진정한 의미를 놓친다면 우리도 제2의 바리새인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는 이 시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나의 신앙의 모습에서 외식함 (겉과 속이 다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2. 내가 사람의 인정을 가장 목말라 하는 분야는 어디인가요? 어떻게 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3. 오늘 말씀을 통해 진정한 크리스쳔의 삶을 살기 위해 내가 결단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들을 생각해 봅시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한다면 나는 이미 바리새인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노력하면 우리도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샬롬! 오늘은 마가복음을 통해 ‘반전의 예수를 따르는 역설의 삶’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반전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역설적 삶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1:1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시작이라”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메시아 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은 1장부터 8장까지에서 왕이신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왕이심을 보여주는 절정의 사건이 8장의 ‘7병 2어 기적’ 다음에 등장하는데, 그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왕으로 고백합니다. (이것은 막 1:1의 선언과 같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 반전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당할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왕으로 인정받은 그 절정의 순간에,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막 9장부터 왕이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십자가로 가는 길)을 걸으십니다. 반전의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심지어 제자들에게도 충격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반전의 길을 걸으실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해방을 주기 위함이고(상황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자기 자신(죄)으로부터의 해방), 또한 우리에게 참된 삶의 모범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십자가를 지는 것에서 얻는 참된 기쁨). 반전의 예수님은 그 분을 따르는 제자들 안에 역설적 삶을 일으킵니다. 더 이상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일시적 쾌락을 따라 살지 않고,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며 영원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제자의 역설적 삶을 깨닫지 못합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직전에, 예수님은 한 맹인을 치유하십니다. 그는 한 번에 시력을 온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두단계에 걸친 예수님의 치유로 온전히 시력을 회복합니다(막 8:22-25 참고). 이 사건은 상징적인 사건일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은 마가복음 8장까지 예수님을 따랐지만 - 예수님이 왕이신 것을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지만 - 이들의 영적 시력은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온전한 회복을 위해 맹인에게 한 번 더 주님의 치유가 필요했듯이, 온전한 영적 회복을 위해 제자들에게는 마가복음의 후반부(막 9-16장, 왕으로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는예수님)이 필요한 겁니다. 반전의 예수닝을 따르는 역설적 제자의 삶을 잘 보여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맹인 거지 바디매오입니다(막 10:46-52). 그는 길에서 예수님 이야기를 듣고 소리칩니다. 예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칩니다. 그리고 걸음을 멈춰선 예수님의 긍휼을 입고 치유 받습니다. 그런데, 치유 받은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걷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예수님이 걸으시는 길을 따라 걷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반전의 왕 예수님을 따라 역설적 제자의 삶을 사는 겁니다. 역설적 제자의 삶을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이 삶을 환영하지 않고 조롱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삶이 생명의 삶인 줄 알기에 이 삶을 기꺼이, 기쁨과 자원함으로, 살아갑니다. 반전의 왕 예수를 따르는 역설적 제자의 삶, 이것이 은혜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삶입니다. 오늘도 역설적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청년 형제, 자매들을 주님께서 격려하시고 힘주시를 소망합니다. 왕이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세상을 향해 역설적 제자의 삶을 살아내는 Psalm 청년 공동체 되기를 축복합니다. Amen! 나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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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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