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소명을 감당하는 삶(2): 소망의 회복
눅 24:27-32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친히 찾아와 주셔서 그들에게 새로운 소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소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제자들의 무너진 신앙의 영역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슬픔 가운데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를 찾아가셔서 그들의 빛바랜 소망을 밝혀 주신 내용입니다.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중 한 명은 글로바입니다. 교회 전승은 그가 예수의 아버지 요셉의 동생이었다고 이해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예수의 삼촌이 됩니다. 함께 가던 다른 제자는 성경이 누구였는지 정확히 밝히지는 않지만, 여러 정황을 보았을 때 글로바의 부인이었던 마리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두 부부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엠마오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갔었고, 가까운 가족인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곁에 머물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십자가 사건까지 모두 현장에서 목격하였습니다. 특히, 예수께서 십자가 지실 때는 마리아 곁에서 그녀와 슬픔을 함께 나누며 위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아침, 그들은 여인들이 빈 무덤을 보았고 천사들이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그 후 두 제자가 직접 달려가 빈 무덤을 확인했던 내용도 전해 들었습니다. 즉, 그들은 부활의 간접 증거들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가 죽으신 십자가 사건의 슬픔 가운데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고향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십자가 사건이 너무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야 말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할 분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21). 즉, 권능의 메시아를 간절히 바랐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권능의 메시아를 원합니다. 그래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예수님께 환호성을 보냈습니다. 이런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그것은 식민 시대를 사는 그들에게는 올바른 시대정신이요, 정당한 기대였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메시아는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즉, 그들이 처한 환경 때문에 스스로가 그린 잘못된 메시아 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탄도 예수님을 시험할 때 권능의 메시아가 될 것을 시험했다는 점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 시험에서 실패했다면, 그는 순종의 메시아는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탄은 이것을 시험한 것입니다. 예수는 권능의 메시아가 되실 충분한 능력이 있으셨지만, 순종의 메시아가 되기를 택하셨습니다. 이 순종의 결과가 위대한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즉, 권능의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할 수 있었다면, 순종의 메시아는 온 인류를 사망 권세에서 구원하였습니다. 예수님만은 이 차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계셨고, 그래서 그는 자신의 권능을 포기하시고, 순종의 아이콘으로서 십자가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부활 사건은 순종의 메시아가 진정한 권능의 메시아로 높임 받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주님은 스스로를 낮추심으로 높임 받으신 권능의 왕이 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문제는 소망 없음이 아니라, 잘못된 소망을 갖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기 프레임에 갇힌 채 예수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심지어 부활의 증거들을 듣고 보면서도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를 돌아봅시다. 우리의 소망을 우리 프레임으로 제한하고 가두면 엠마오의 제자처럼 절망과 좌절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소망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이들을 친히 찾아가셔서 해 주신 특효약은 말씀과 성령이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그들의 소망이 말씀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진단하시고, 말씀 가운데 나타난 메시아를 이들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어서, 그들의 집에 들어가서 성찬을 베풀어 주셨는데, 주가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에게 해 주셨던 모습 그대로 성찬을 베푸셨습니다. 이 때, 성령이 이들에게 임하여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주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들 앞에서 사라지십니다. 이미 성령이 그들의 심령을 터치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라지신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말씀으로 풀어주실 때 마음이 뜨거워지는 성령의 역사를 서로 나눕니다. 그리고는 그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발걸음은 엠마오로 향하던 발걸음과는 전혀 다른 발걸음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소망의 능력’입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선하신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적합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꼭 맞는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점을 믿으시고, 꼭 붙잡아야 합니다. 신앙의 삶이란, 이것을 찾아가며 실현하는 여정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절망 속에 빠져 있으면 안됩니다. 소망이 회복되면 가슴이 뛰고, 새 희망이 솟아납니다. 처한 상황은 그대로인데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이것이 소망입니다. 이런 소망함이 우리 심령가운데 충만하십니까?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것 때문에 소망을 잃어버리셨습니까? 소망의 말씀으로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의 뜨겁게 하심으로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소망이 회복된 것처럼, 심령이 눌리고 답답한 모든 영혼들도 부활의 주님 만나 자유함과 기쁨을 회복하며, 새 소망으로 충만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나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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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소명을 감당하는 삶(1): 믿음의 회복
요 20:24-29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오셔서 그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 소명을 주셨지만, 대부분의 제자들은 바로 소명의 자리로 나가지는 못했습니다. 소명을 감당하려면 내면의 상처와 문제가 회복되고,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부족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각각의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의 무너진 영역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도마를 찾아가셔서 그의 연약한 믿음을 바로 세워주시는 장면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때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들은 도마는 굉장히 특이하게 반응합니다. 그는 ‘자기가 직접 보고, 그 못자국과 옆구리를 직접 만져보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정황을 고려해 볼 때 그의 반응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배경에는 그의 성격적인 이유와 상황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솔직하고, 나서기 좋아하며, 모르는 건 확인해야만 하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런 그는, 자신이 없을 때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신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조금 서운한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그의 경험주의적 태도와 겹쳐지면서 불신의 마음이 더 강하게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도마의 이런 모습은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흔히 있는 모습입니다. 현대인들은 내가 본 것만 믿으려 하고, 객관적 사실보다는 내게 주는 의미만 중요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도마에게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재방송을 보여 주시듯 처음 방문 때와 동일한 방법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와 말씀을 마치신 후 이 만남이 끝이 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번에 찾아오신 목적이 도마 때문이었음을 잘 나타내 줍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그가 했던 불신의 말을 그대로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도마는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믿음 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독백까지도 다 들으시는 주님께서는, 우리가 했던 워딩을 반복하셔서 우리와 대화하십니다. 이는 우리를 책망하시기 위함보다는, 우리의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에 도마는 무너지고 맙니다. 도마처럼 이성적인 사람은, 이성을 뛰어넘는 것에 무너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진짜 부활하신 분이심을 보았고, 그 예수님이 자신의 마음을 다 읽고 계셨으며,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자신을 위해서 찾아와 주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이에 도마는 “내 주이시며 내 하나님이십니다” 라는 위대한 삼위일체적 고백을 하게 됩니다. 한 번도 넘어지지 않은 믿음과, 의심과 불신의 골짜기를 극복한 믿음 중에 어떤 믿음이 견고한 믿음인가요? 의심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믿음은 ‘신앙의 흉내’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반면, 내 마음에 드는 의심을 하나님 안에서 해결함 받으며 나간 신앙은 점점 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 믿음이 흔들릴 때, 그 믿음을 세워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은 때론 직접, 때론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흔들린 신앙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도마에게 더 높은 수준의 믿음으로 알려주시고, 그 길로 나아가도록 그를 초청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보지 않고 믿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책망의 말로 해석해 왔기에 우리는 도마를 ‘의심 많은’ 도마라는 불명예스러운 호칭으로만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사도의 사명을 감당한 자였습니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바로 이 만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주께서 그의 믿음을 한 단계 올리시려는 권면과 초청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도마에게 바로 잡아주셨던 것은 ‘믿음의 깊은 세계’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실체란 ‘밑(근간)에 서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내 생각과 마음의 근간에 든든히 서있는 것이 실체인데, 이 단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 (성부, 성자, 성령)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삼위의 하나님이 확실하게 계시듯, 믿음은 그 실체가 존재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조금 더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확실한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근데, 내 안에 믿음이 있는 지 어떻게 압니까? 만약 내 안에 간절히 바라는 소망함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는 데, 환경적으로는 도저히 그것이 이뤄질 기미가 없는데도, 내 마음 가운데 계속해서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망함이 있다면 내게 믿음이 있는 것이요, 그 믿음은 분명히 실재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생각하는 데, 성경은 보지못하는 것이 존재하며, 그것의 증거가 바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이 안 보이는 것이 존재하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39절에서는 더 위대한 믿음의 모습이 나옵니다. 어떤 경우는 믿음의 증거를 이 생에서 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40절에서 이는 하나님께서 ‘더 나은 것을 예비해 놓으셨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심지어 내 생애동안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 믿음은 반드시 일어나는 것이란 말입니다. 즉, 시공간을 초월한 것이 믿음입니다. 내 안에 믿음이 있으면 그 열매는 언젠가, 이 땅에서든 혹은 천국에서든 반드시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믿음의 놀라운 세계입니다. 그 만큼 믿음이라는 것은 깊은 세계입니다. 내 안에 믿음이 있다는 것은 현실을 초월하는 놀라운 의미가 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제시하신 ‘보지 않고 믿는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결과, 그는 인도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순교하는 소명을 감당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소명은 내 안에 무너진 부분을 주께서 세워 주신 후에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의 무너진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내 삶이 힘들어 생기는 의심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존재적 의심입니까? 내 이성에 맞지 않아서 믿지 못하는 것인가요? 신앙 여정이 너무 불확실해서 조금은 포기한 마음인가요? 도마를 찾아 와주신 주님을 만납시다. 나를 가장 잘 아시고, 나의 문제를 너무나 잘 이해해 주시는 주님을 만나고, 주님께서 세워 주실 때 그 믿음을 나의 믿음으로 받아 들입시다. 주께서 더 높은 믿음의 영역으로 우리를 초청하시면 주님과 같이 한 발짝 더 내딥시다. 그것이 오늘 도마가 한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이유입니다.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주님을 기대하고, 주 안에서 바로 세워져, 받은 소명 끝까지 이루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 질문
제목: 감격스런 재회
요 20:19-23 19 그날, 곧 그 주간의 첫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을 두려워해 문들을 걸어 잠그고 모여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렇게 말씀하신 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2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23 만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면 그 죄는 사함을 받을 것이요, 용서하지 않으면 그 죄는 그대로 있을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부활 신앙이라고 부를 만큼 부활은 ‘창조’만큼이나 중요하고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교회와 기독교 역사는 시작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 전체를 이해하는 근간이 됩니다. 그 의미를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과 처음 만난 요한복음 20장의 말씀을 통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은 부활의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기록합니다. 그녀는 이전에 일곱귀신 들렸던 갈릴리 지방 여인이었습니다. 일곱 귀신들린 삶은 아마도 죽음보다도 못한 삶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그녀를 예수께서 고쳐 주셨고, 그 때부터 그녀는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여 예수님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랐습니다. 심지어 주님께서 죽으시던 날 골고다 언덕에도 있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장사할 때도, 그녀는 예수님의 묘지를 확인하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몇몇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보다 잘 처리하고 싶어서 정성껏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였고, 안식일이 끝난 다음날 새벽 미명에 이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습니다. 거기서 그녀들은 깜짝 놀랍니다. 무덤의 돌 문이 굴려져 있었고, 그 곳을 지키던 로마 군병들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들은 조심스레 무덤 안쪽을 살펴보았는데 예수의 시신이 없어졌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 사실을 지체 없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전합니다. 두 제자도 무덤에 헐레벌떡 뛰어와서는 예수의 무덤이 빈 사실을 직접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갑니다. 성경은 이들이 부활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합니다. 다만, 막달라 마리아는 그 곳을 떠날 수 없어 울며 그 곳에 남았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두 천사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녀가 부활의 첫 증인이 된 것은 예수님에 대한 순전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 후 그녀는 자신이 본 것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제자들에게 전달합니다. 마리아의 말을 전해 들은 제자들은 여전히 ‘두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예수님 시신을 가져간 자들로 몰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내적으로는, 제자들은 여전히 며칠 전 일어난 예수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혼란스러운 상태였을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심적 상태가 ‘문들을 다 걸어 잠그고’ 라고 표현된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주님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부활체의 모습으로 이들 가운데 서 계셨습니다. (부활 상징) 두려움과 실패감에 있던 제자들에게 주님이 하신 첫 마디는 “평강”이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말씀하신 ‘샬롬’은 정말 큰 의미가 있습니다. 샬롬을 이야기하는 분이 직접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도 평안을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평안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완성된 평안입니다. 이처럼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이 우리에게 옵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신 자에게서 나오는 평강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하는 첫번째 이유입니다. 이어서 부활의 주님은 제자들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자신의 손과 옆구리의 못자국을 보여주시면서 당신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요,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가장 고민했던 부분을 예수께서 친히 확증해 준 것입니다. 비로서 제자들은 기쁨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이 기쁨은 단순한 재회의 기쁨을 뛰어 넘어, 무너진 믿음과 삶이 회복되는 놀라운 기쁨이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복잡한 문제들이 단순해지고 정리가 됩니다. 그래서 기쁨과 소망이 회복되고, 삶의 방향성이 생깁니다. 이것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하는 두번째 이유입니다. 그 후에,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시며 이들에게 새로운 소명을 주십니다. 이처럼 주님은 항상 구원과 회복을 주신 이후에는 ‘소명’의 자리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이는 우리의 소명을 통해서 세상을 다스리시기 위함도 있지만, 소명을 감당하는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 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소명과 주실 때 제자들에게 두 가지를 함께 주시는데, 성령과 권위입니다. 먼저, 주께서는 이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명령하십니다. 마찬가지로 부활하시기 전에 말씀하신 것은 성령을 받으리라는 약속이었지만, 이제는 그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시대에 사는 우리도 이처럼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권능이 임합니다. 이 권능이 있어야만 우리가 능히 주님 주신 소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권위를 주십니다. 23절 말씀은 그 의미를 잘 해석해야 하는 구절입니다. 이는 앞서 말씀하신 ‘사명’과 함께 연계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죄사함의 권세는 오직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세상에 파송하는 제자들에게 ‘천국열쇠’를 주십니다. (마16장) 사명자는 이 열쇠를 사용해서 많은 사람들을 죄사함의 자리로 이끌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권위를 주시는 진짜 이유입니다. 따라서, 소명을 받은 자는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을 사죄의 복음으로 초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열매는 주께서 직접 맺어 가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럼,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요? 우리의 소명지는 먼 미래, 먼 땅이 아니라, 바로 내가 속한 삶의 현장입니다. “오늘 내게 열려 있는 곳이 곧 나의 소명지입니다.” 즉, 내 선교지는 내 직장, 내 학교, 내 교회, 내 목장, 내 소그룹입니다. 사탄은 “나중에, 나중에”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성령의 권능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 곳에서,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차이를 기억하십시요. 진정한 부활의 의미는 내 삶의 현장에서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주님의 움직이는 교회가 되어 가는 곳마다 예배를 세우고, 여러분 선 땅을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주의 나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귀한 청년들 모두가 부활의 능력을 발휘하는 진정한 제자들 되시길 진심을 담아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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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청년부 예배오후 2시 (청년부 예배실) Archives
October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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