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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당신의 마음에도 예수님이 오셨나요? (요 1:1~18)
어제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었습니다. 성탄절은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며 기쁨과, 소망과, 감격과 감사로 충만한 날입니다. 근데, 그 예수님이 여러분 마음에도 오셨습니까? 예수님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진짜로 예수님을 만나면 삶이 바뀝니다. 그런 예는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이 질문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분들에게는 별 관심 없는 질문이겠지만, 만약 성경의 주장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질문은 모두에게 너무나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인류는 그 분을 통해 정말 많은 것을 깨닫고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18절은 신약의 창세기 1장이라 불릴 만큼 심오한 부분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누구시고, 어떤 분이신 지에 관한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20:31에서 이 글을 쓴 목적을 첫째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둘째는, 그 분을 믿어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밝힙니다. 1절은 ‘태초에’로 시작되는데 이는 창세기 1: 1의 시작과 동일합니다. 요한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말하려고 태초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말씀’은 ‘로고스’ 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모든 창조의 신비는 말씀 안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그는 태초부터 계신 분이셨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예수에 대한 모순적인 설명이 이어집니다.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어떤 존재가 함께 있기도 하고, 그 자체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이 모순적 표현이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을 뿐만 아니라, 곧 하나님이셨습니다. 요한이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또 다른 이유는 당시 철학과 이성을 숭상하는 헬라 문화권에 이 복음서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요한은 예수님이 창조주라고 말합니다. (3절) 이 말은 창세기를 뒤집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 말씀이 예수님이시며,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창조주이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릴 지으신 분이십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창 1:26) 두번째 예수님에 대한 키워드는 ‘생명’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생명’을 반복적으로 사용됩니다. 그만큼 요한은 생명 되신 예수님을 크게 본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 되시는 이유는 그 분이 우리의 창조주이시기 때문도 있지만, 동시에 그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첫 생명도, 새 생명도 모두 예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 다음 중요한 개념이 ‘빛과 어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으로 오셨다고 요한은 강조합니다. 어둠은 별도의 창조물이 아니라 빛이 없는 것입니다. (창 1:2-3) 본문은 빛과 어둠의 관계를 부정적으로 설명합니다. (5절) 즉, 분명히 빛이 비추고 있는데도 어둠이 계속 어둠 가운데 머문다는 것입니다. 이 빛은 예수님을, 어둠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9-11절) 따라서, 우리가 빛으로 나아가려면 어둠을 박차고 나오는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12절은 그것이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영역만큼은 영적 결단과 선택의 영역에 두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믿을 때, 비로소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새 생명을 누리고, 빛으로 나아가며, 로고스 되신 주님을 깨달아 갈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우리 안에 평안함과 기쁨, 소망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불안한 것은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불확실성은 어둠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빛으로 오셨습니다. 이 빛이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예수님 진짜로 만나면, 둘째, 지혜로워집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로고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만나면, 세상 이치도 깊이 깨닫게 되고, 지혜도 계속 생겨나게 됩니다. 특히, 하나님과 관련된 지혜가 생겨납니다.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깨달아 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 만나면, 사람 살리는 일에 더욱 관심이 생깁니다. 이는 예수님 자체가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나 혼자 이 험한 세상 버텨내는데 급급했는데, 언젠가부터 내 마음에 여유가 생깁니다. 주변에 힘들어 하는 분들 있으면 함께 위로하고 돕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베푸시는 새 생명을 다른 사람들도 함께 누리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래서, 선교도 하고 싶어지고, 전도 훈련도 받고, 봉사하고 베풀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진짜로 만나셨습니까? 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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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오실 예수님을 준비하는 마음( 눅 3:1-14, 봉독 3:1-6)
오늘은 우리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입니다. 대림(待臨)은 “임하시기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물리적 탄생을 기다리는 것 뿐 아니라, 우리 마음 가운데 예수님이 다시금 임하시기를 기다리는 모든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떤 마음이 예수님을 맞이하는 마음이라고 가르쳐 주시는 지 함께 살펴보고, 우리 마음을 잘 준비하여, 성탄 시즌에 예수님의 찾아오심을 경험하는 축복을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눅 1-3장은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의 시작까지 일어난 기적적이고 놀라운 일들을 담고 있는 특별한 부분입니다. 이 모든 스토리들은 성경에서 오로지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었습니다. 만약 누가가 복음서를 기록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크리스마스에는 목자들도, 마리아도, 베들레헴 구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 ‘누가’ 이야기: 그는 누구이며, 어떻게 누가복음을 기록했을까? 그럼 어떤 마음이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일까요? 이에 대해 본문은 세 가지를 강조합니다. 첫째, 굽어진 마음을 곧게 하는 것입니다. 눅 3:4b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분의 길을 곧게 하라.’” (사 40:3 인용) 성경은 굽은 마음에 대해서 계속 경고합니다. (잠 11:20, 시 125:5a) 굽은 마음은 모든 것을 꼬아서 보는 편협한 마음입니다. 뭔가 비뚤게 생각하고 쉽게 오해하는 마음입니다. 너무 재고, 과도하게 따지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 가지신 분은 자신 뿐 아니라 주변도 참 어렵게 만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크신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를 헌신의 길로 초청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 재고, 너무 따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들을 맡기시기가 참 힘드십니다. * 사례: 발런티어 권면, 굽은 길 이야기 우리 마음이 굽으면 주님을 기쁘게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사람도 기쁘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좀 시원시원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사람을 충성되다고 합니다. 꼬불길 한시간 달리지 말고 20분만에 터널로 다니는 그런 사람들 되길 축복합니다. 둘째, 높아지고, 낮아진 마음을 평탄케 하는 것입니다. 눅 3:5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모든 산과 언덕은 낮아질 것이며 굽은 길은 곧아지고 험한 길은 평탄해질 것이다. 높아진 마음은 교만하고, 자고한 마음을 말합니다. 이는 건강한 자신감의 수준을 넘어서, 자신에 대한 과도한 신뢰의 마음입니다. 성경은 이를 산과 언덕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려면 이런 마음이 낮아져야 합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반면, 골짜기는 메워질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자기비하나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는 자들에게 대한 성경의 교훈입니다. 겸손이 지나쳐서 자신을 과하게 낮추는 것이 이에 해당합니다. 성경은 이것도 죄라고 말합니다. 우리 마음이 골짜기 같으면 그 마음을 메꾸어야 합니다. 낮아진 계곡 같은 내 자존감을 세워서 평탄하게 해야 합니다. 가장 성경적인 방법은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영적 자존감을 갖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도 이 땅에 오셨을 분입니다. 나의 가치는 바로 예수님의 가치입니다. 비교의식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비교가 없습니다. 그곳에는 절대적 가치만 있습니다. 결코 남과 비교해서 자신의 위치를 정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비교의식은 교만과 낮은 자존감의 이유가 됩니다. 셋째, 회개의 마음입니다. 눅 3:7-8b 세례를 받으려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요한이 말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다가올 진로를 피하라고 하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으라. 독사는 창세기 3장에 나온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뱀을 떠올리게 하는, 죄의 대표적 상징입니다. 우리는 이미 태생부터 죄의 굴레에 얽매여 있습니다. (시 51:5) 기독교 교부들은 인간의 타고난 죄성을 원죄라고, 자신이 지은 죄는 자범죄로 구별해서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마음으로 지은 죄도 동일한 죄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는 예외 없이 모두 죄의 굴레에 얽매여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 신앙이 죄를 강조하는 것은,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사함의 은혜가 큼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본문은 이에 더하여 한 가지를 강조합니다. 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음으로만 회개하지 말고, 행동으로 그것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회개는 죄된 길을 완전히 떠나 올바른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잘 준비하여 예수님을 맞이할 상태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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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전도자의 깨달음, 일상의 기쁨과 지혜( 전3:11-14, 9:9, 12:13)
전도서는 솔로몬의 말씀인데, 대명사 솔로몬은 하나님의 지혜를 갖고 평생을 살아본 결과, 이 세상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되다고 전도서를 시작합니다. 출세도, 재물도, 쾌락도, 수고함도, 심지어는 그가 그렇게 중요하게 강조해왔던 지혜조차도 헛되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은 영원히 흐르는 시간앞에서 다 사라질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죽음이라는 the great equalizer 앞에서 우리 모두는 평등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헛됨은 전도서의 모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솔로몬이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기 위한 배경일 뿐입니다. 오늘은 그 진짜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 세상에 대한 이해를 좀 더 바로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솔로몬이 강조한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허무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헛됨만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물입니다. 여전히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질서와 공의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가치이신 하나님도 함께 공존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을 너무 허무하게만 보는 것은 세상의 한 쪽면만 강조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귀한 가치들이 굉장히 많이 남아있습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혼재된 세상을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이해해 보려 했지만, 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전3:11b) 솔로몬은 세상이 복잡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에게는 또 하나의 고민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미스터리한 이 세상 가운데 계속 살게 하시나?’ 입니다. 솔로몬은 여기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그는 두 가지 지혜를 깨닫는데, 하나는 세상이 미스터리한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과, 또 하나는 그렇게 하신 이유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전3:14b) 그렇다면, 이처럼 복잡한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가치일까를 그는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두 가지 지혜를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전도서, 더 나아가 지혜서의 핵심중의 핵심입니다. 그 첫번째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이 가장 의미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솔로몬은 지혜조차도 헛되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지혜조차도 죽음과 세상의 불의를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나중에 그래도 지혜를 추구하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가치있다고 고백합니다. (7장, 8장, 10장) 그런데, 지혜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잠언과 확연히 달라집니다. 그는 잠언에서는, 지혜를 얻으면 이 세상에서 형통하고 잘 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전도서에는 지혜가 곧 하나님이요, 지혜를 따르는 것이 피조물의 본분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전12:13) 즉, 전도서에서의 솔로몬은 하나님을 하나님 자체로 경외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Q:우리는 왜 신앙을 갖는가? 세상의 잘 됨? 하나님을 사랑해서?) 두번째로 솔로몬은 ‘일상을 소중히 여기라’고 외칩니다. 세상의 헛됨을 깊게 느낀 솔로몬이 찾은 이 세상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일상’ 이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유일한 날입니다. 지금 내가 속한 곳은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내 삶의 기업입니다. 이것만이 이세상에서 가치있는 것이라고 솔로몬은 강조합니다. (전9:9) 내가 매일 마주하는 사람들, 내가 처리해야하는 일들, 함께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예배하는 이 자리, 소셜로 만나서 함께 나누는 일상들, 이 소소한 모든것들이야말로 이 세상의 진정한 가치라고 솔로몬은 말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크리스챤은 일상을 승리해야 합니다. 나의 24시간을 승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더욱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일상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시고, 하나님의 시야로 살도록 노력합시다. 어려운 상황이있다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생각해 보시기바랍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처럼, 우리도 일상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 전도사님 이야기 묵상과나눔을위한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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