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제자의 삶 – “성령으로 옷 입는 삶”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보는데 옷차림은 인상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옷은 그 사람의 정체성과 사회적 위치뿐 아니라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잘 나타내 줍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어떤 옷을 입는가’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을 좇는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표현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바울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것처럼 우리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의 옷을 입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직접 강조하신 말씀에 힌트가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두고 승천하실 때가 다가올 때, 마치 자녀를 두고 가는 부모의 심정으로 ‘성령을 받을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떠나가셔도 성령만 받으면 여전히 그들이 예수님이 계신 것 같이, 혹은 그 보다 더 놀라운 일을 경험하고, 궁극적으로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성령 받으셨나요? 머뭇거리시는 분들께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주로 고백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령을 이미 받은 사람들입니다. (고전 12:3)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십니까? 그러면 여러분 안에 성령님이 거하시는 것입니다. (롬 8:15-16) 마지막으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 지십니까? 여러분은 확실히 성령 받으신 분입니다. (고전 2:12) 이처럼 우리 모두는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안에 오신 성령이 내 안에서 역사하는 가장 중요한 사역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것을 깨닫게 돕는 것’입니다. 비록 희미하게 느껴지더라도 그 한 줄기 빛 붙잡고 나가다 보면 분명 견고한 확신을 받게 될 것입니다. (채산 가능성 이야기)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그 자체가 어마어마한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내 목자이시면 사실 내 모든 삶의 문제는 이미 해결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해 주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매일 매일의 삶에서 예수님을 느끼면 자유함과 평안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비결은 바로 성령 충만에 있습니다. 성령의 내주하심과 성령 충만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이것은 성령의 내주하심입니다. 성령님은 그 때부터 영원히 내 안에 계십니다. 이에 반해, 성령 충만은 내 생각과 마음이 성령님의 지배를 받고, 그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채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완전히 나를 지배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항상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특히, 우리가 죄를 짓거나 성령의 생각을 거부하면 충만함은 곧 사라집니다. 그래서 성령의 기운이 나를 통치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엡 5:18) 제자들도 예수님이 떠나신 직후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 때 그들에게는 담대함과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날 그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자 그들 속에 있던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니다. 성령 충만이 그들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충만해야 내 안에 있는 죄성을 이기고, 세상의 방식을 뛰어 넘고, 삶의 문제들을 극복하며 살 수 있습니다. 성령에는 다이나마이트 (두나미스)와 같은 권능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을까요? 성령 충만은 삼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오순절 이후 보혜사 성령은 인간에게 보낸 바 되었기에 우리는 언제든 성령 충만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이를 받는 우리의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려면 성령 충만함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마치 새끼 새들이 어미가 주는 먹이를 먹듯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 또한, 성령 충만하려면 죄를 회개하고 죄와 싸우려 노력해야 합니다. 죄된 마음에는 거룩한 영이신 성령님이 오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이 맞는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 충만을 부어 주십니다. 설교말씀 듣는 중에, 기도하는 중에, 성경말씀을 읽어가는 중에, 조용히 찬양하는 중에, 혹은 주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묵상하는 중에도 성령님은 내 심령을 터치하실 수 있으십니다. 본문말씀은 영적으로 무관심하고 세상 흘러가는 대로 사는 사람들에게 ‘잠에서 깨어나라’고 경고합니다. 그들에게 빛의 갑옷을 입을 필요성을 느끼라고 말씀합니다. 성령 충만의 필요성이죠. 그러고는 죄를 떠나라고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의 방법인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하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결과를 성경은 성령의 열매라고 부릅니다. (갈5:22-23) 보통 성령의 열매라 하면 뭔가 놀라운 권능의 것들이 떠오르는데, 말씀은 오히려 나의 내면과 인격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는 놀라운 반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성령의 열매는 나의 내면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인격적이신 성령님은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가 예수 닮은 사람, 즉, 예수 제자가 되도록 이끄십니다. 우리의 상태와 필요에 따라 필요한 격려와 권면을 주시고,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삶을 좇아 가도록 도우십니다. 여름 날 시원한 바람과 같이 우리를 찾아오는 성령님 충만히 받아 승리하는 삶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나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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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자의 삶 – “죄와 싸우는 삶”
여러분은 ‘명화 테러’라는 용어를 들어보셨나요? 보통 유럽에 기반을 둔 기후단체나 환경단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하여 유럽의 많은 박물관에 전시된 명화에 페인트나 수프 등을 뿌리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환경을 지키지 않으면 더 이상 이런 명화는 아무 소용도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런 일은 먼나라 이야기만은 아니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보 1호 숭례문은 2008년에 채종기씨라는 방화범에 의해 완전히 불에 타 전소되었었습니다. 그의 범행동기는 자기 땅을 국가가 매입 보상하는 과정에 불만이 있었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였습니다. 숭례문 복원에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인력과 재원이 투입되었습니다. 복구기간 5년 3개월간 엄청난 예산과 자원을 투입하여 2013년이 되어서야 복원된 숭례문이 일반에 공개되었습니다. 문화재청은 숭례문의 가치는 그대로 보존되었다고 강조했는데, 여러분은 이에 동의하시는지요? ‘도대체 어떤 정신나간 사람이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이런 행동을 한 조상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명품, 창조세계를 죄로 망친 아담과 하와 말입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 창조세계는 하나님께서 6번이나 ‘보시기에 좋았다’ 라고 감탄하실 만큼 완벽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후 땅은 저주를 받았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며, 궁핍과 수고가 인류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아담이 사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사건은 그저 한 번 실수했다가 돌이킬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죄로 인해 창조세계가 타락하고 사망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은 불가역적 (irreversible)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망쳐진 창조세계를 지워버리시고 다시 창조하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훨씬 더 어려운 과정인 ‘복원’을 택하셨습니다. 이 복원과정에 핵심 역할을 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류의 유전자 속에는 ‘죄성’이 뿌리깊게 박혀 그 모든 생각하는 것과 계획하는 것이 항상 악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창6:5). 성경은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모든 인류가 죄악에 빠졌음을 반복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를 성경은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 상실한 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 (롬1:28-32). 이처럼 전 인류는 죄에 빠졌는데, 문제는 죄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죄값이 우리가 치를 수도 없는 것이라는 점이 문제입니다. 다름 아닌, 우리에게 단 하나씩만 주어진 ‘생명’입니다 (롬3:23). 따라서, 모든 인류는 자신의 죄값을 치르고 나면 더 이상 남는 게 아무것도 없는 절망적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이 준비하신 복원방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죄인들의 죄값을 대신 지고 대신 죄값을 치른다는 것” 어찌 보면 참으로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고, 심지어 자기 파괴적이기까지한 그 결정을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대한 사랑때문에 정하셨고, 예수님은 그 계획을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완성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소망이 없는 인류에게 다시 살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한마디로 죄를 이기신 것, 사망을 이기신 것입니다. 이렇듯 죄의 문제는 사망과 생명이 결부된 문제이다 보니 성경에서는 항상 피가 튀기고, 치열한 전투적 이미지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즉, 죄의 본질은 사망이기에 항상 처절합니다. 죄사함은 그저 아름답고 고상한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죄에 대해서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죄와 싸우는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죄 문제 해결하려고 오신 분이시고, 죄 문제 해결하시려 죽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죽기까지 죄와 싸우고 있습니까? 혹시, 죄에는 스스로 관대하고 죄사함의 은혜만 구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Dallas Willard 교수는 이런 부류의 기독교인에게 ‘뱀파이어 크리스천’ 이란 다소 원색적인 표현까지 사용하며 경고하였습니다. 죄와 싸우지는 않고 보혈의 은혜만 찾는다는 뜻입니다. 죄사함 받은 후 다시 짓는 죄에 대해서 성경은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연약해서 어쩔 수 없이 짓는 죄이고, 다른 하나는 의도적이고 반복적으로 짓는 죄입니다. 연약하여 짓는 죄에 대해서는 용서와 권면을 하지만, 의도적이고 반복적인 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죄사함이 없고 맹렬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있을 것을 경고합니다 (히10:26-27). 은혜가 내 책임을 면해주지 않습니다. 자기 변명이 언제나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죄를 이기는 것이란 내가 자꾸만 넘어지는 죄를 과감히 끊어 내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가 유혹에 안넘어가면 이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를 이겨냈을 때만 맛볼 수 있는 엄청난 영적 기쁨과 만족감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함’입니다. 본문에서 사도바울도 우리에게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여기라”고 권면합니다. 의지를 사용해서 그렇게 살라는 말입니다. 비록 그 결심이 오래가지 못하더라도, 며칠 내에 또 결심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죄와의 싸움을 포기해선 안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로 결심한 사람이 해야 할 첫 번째 순종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다시금 죄에 대한 경각심을 세우고, 죄와 싸우는 결단을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응원합니다. 나눔 질문 1. 어떤 교회는 죄와 회개의 메시지를 ‘억압’으로 생각하여 의도적으로 회피합니다. 여러분은 죄와 회개의 메시지를 은혜와 사랑의 메시지만큼 소중히 여기시나요? 2. 예수님을 믿어 죄씻음을 받은 후에도 반복적으로 짓는 죄에 대한 평소의 내 생각은 어떠했나요? 3.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내 안에 죄와 싸우겠다는 결단의 마음이나 용기가 생긴 부분이 있다면 나눠보세요.
주일설교 산책 | 하나님 나라의 원리
샬롬! 성경에는 하나님 나라, 천국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대화입니다. 예수님에게 부정적이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묻고,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미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며,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가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골1:13,14)’ 사도 바울도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같지만, 우리의 신분은 이미 변화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고단하고 힘들어도 우리가 이미 구원받고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것만으로도 감사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의 삶에서 풍성히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 우리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살아 갑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대화 후 제자들에게 재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지만, 그 완성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새 예루살렘이 임할 때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 임하실지 아무도 모르고, 사람들은 일상적인 삶을 살고 있을 때에 갑작스럽게 임한다고 예수님은 말씀 주십니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완벽하게 완성되어 집니다. 신학적 용어로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원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고,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완성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며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성화의 과정을 이뤄가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또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부활의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땅에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재림을 기다리는 자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17:32)’ 롯의 아내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돌아 봄으로 인해 소금 기둥이 된 것을 예수님은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함을 지적합니다. 세상의 가치관,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감으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오늘이라는 시간에 반응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시작되었고,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완성되며,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는 나라입니다. 우리 삶 속에 이미 이뤄진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오직 말씀 앞에서 믿음의 반응으로 작은 예수의 삶을 살아가는 귀한 청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Amen! 나눔 질문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완성될 것입니다.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기 위한 나의 결단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눠봅시다. 응답 찬양: 말씀 앞에서 말씀 앞에서 경외함으로 주께 홀로 섭니다 생명의 말씀 읽고 순종해 주를 예배합니다 기록 된 말씀 힘이 있어서 진리로 우릴 거룩케하며 거룩한 말씀 세세 영원히 복음이 되어 말씀하시네 하나님 말씀에 두려워 떠는 자 그 말씀에 생명을 거는 자 한 사람 찾으시는 주님의 약속을 믿어 하나님 말씀에 운명을 거는 자 순종하며 주 따라가는 자 영원한 하나님 나라 이뤄갈 주의 교회여 일어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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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청년부 예배오후 2시 (청년부 예배실) Archives
September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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