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예수님의 사랑의 언어
요 17:11-13, 23-26 개리 채프먼이 쓴 ‘다섯가지 사랑의 언어’라는 책에 보면, 사람마다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언어가 있는데, 그것이 모두다르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직접적인 언어가, 어떤 사람에게는 특정한 행동이, 어떤 사람에게는 배려깊은 태도가 사랑을 느끼게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언어는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리들에게, 지금 우리들에게 어떻게 그 분의 사랑을 표현하셨나요?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시작점이 됩니다. 왜냐면,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려면, 먼저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시는지를 피부로 느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언어는 직접적 언어 표현은 아니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은 구약의 하나님보다도 직접적인 언어적 사랑 표현을 더 적게 하셨습니다. 이 점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이를 묵상하다 보니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철저하게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어릴 적 저는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예수님은 제게 사랑보다는 ‘순종’의 이미지가 더 강했습니다. 자기희생의 이미지가 더 강했던 것이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신 분은 예수님이신데, 정작 나의 사랑은 그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께로만 향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예수님이 의도하신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분의 깊은 마음을 느껴야만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 특별히 구원사역과 관련한 삼위 하나님간의 관계를 잘 알 수 있는 귀한 구절입니다. 특별히, 요한은 예수님의 기도를 직접 인용하여 기록함으로써 그 관계에 대한 예수님의 1인칭 고백을 듣게 하여 줍니다.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창세 전부터 이미 아버지와 함께 같은 영광을 누리신 하나님이시라는 점입니다. 그 분은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반열에 오르신 분이 아니라, 태초부터 하나님이신 분이 오셔서 순종하신 분이십니다. 다음으로, 구원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놀라운 공동작품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영혼들을 예수님께 맡기셨고,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돌보시다가, 때가 되어 아버지께 다시 맡기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증거하며, 주님의 초림과 재림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완성해 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의 언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사랑의 언어는, 첫째,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이는 철저한 중재자 역할을 자청하신 예수님의 완전한 겸손의 표현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과 권위를 동일하게 공유하셨습니다만, 끝내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에 집중합니다. 이는 삼위 하나님 간의 완전한 사랑의 연합, 상호 존중과 자발적 순종의 발로입니다. 이런 겸손은 확대되어 세례 요한과 성령님에게서도 보입니다. 이처럼 한 목적, 구원을 위해 삼위 하나님 간의 자발적 겸손과 순종을 통해 완성된 구원의 복음이 우리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따라서,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 곧 성자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표현하신 부분들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언어에는 절제함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그 분의 사랑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들어 줍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사랑의 언어는 절제함 속에서도 스며 나오는 예수님의 마음에 담겨있습니다. 주님의 행동, 태도, 말투, 표정, 눈빛에는 감출 수 없는 사랑이 베어 있었습니다. 그 분의 모든 사역의 밑바탕에는 그 분의 크신 사랑과 긍휼함이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들의 결핍과 죽음과, 연약함과 고통을 볼 때 너무나도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창조하신 피조물에 대한 사랑과, 죄로 인해 창조 원리에서 어긋난 것이 가슴 아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 분의 모든 사역의 발로였습니다. 마지막, 예수님의 사랑의 언어는 우리와의 관계 설정에 담겨 있습니다. 즉, 그분이 친히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끝까지 책임집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우리를 끝까지 책임지시는데, 마지막 날까지 책임지신다고 성경은 약속합니다. 또한, 선한 목자는 양들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 줍니다. 그 분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으시고 양들을 위해 내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십자가는 그 분 사랑의 정점입니다. 목자 되신 주님이 양들을 위해, 친히 어린 양이 되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심지어 주님은 십자가의 영광까지 아버지께로 돌리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그 분의 사랑에는 절제함이 베어 있습니다. 진실함이 담겨 있습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이신 진짜 사랑입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의 언어를 제대로 읽게 될 때, 우리도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나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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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요 21:15-17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여러 가지 모습들 중에 여러분 개인에게 가장 터치가 되는 스토리는 어떤 것인가요? 여러분은그 분의 어떤 모습을 보며 감동하고, 또, 그 분의 성품에 매료가 되시나요? 오늘은 여러 가지 예수님의 모습 중에서 두 가지 모습을 통해 주님의 진 면목을 알고, 그 분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원합니다. 그 첫번째는, 예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입니다. 자비란 어려운 사람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며, 긍휼은 가엾게 여겨서 돕는 것입니다. 특별히, 기독교의 긍휼(Mercy)은 죄있는 자를 가엾게 여겨 죄를 사해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주 대상은 세상에서 소외받고, 불쌍하고, 연약한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이 하듯 가끔 그들 필요 챙겨주는 식이 아니라, 예수님은 그들의 진정한 필요를 공급하시고, 더 나아가 그들의 영혼까지 풍성해지도록 도우셨습니다. 이런 분은 우리 주님 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소위, ‘메이저’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감사합시다. 그런데, 그 반대라면 더더욱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낮추시면 축복입니다. 왜냐면,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인물들은 이 마음을 다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낮은 곳에 임하시는 예수님, 낮은 자를 들어 쓰시는 예수님” 이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4장은 예수님께서 수가성의 여인을 찾아가신 장면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앗수르의 혼혈정책으로 만들어진 혼혈족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들을 경멸의 눈초리로 보았습니다. 당시 여성의 인권은 밑바닥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여인은 이미 다섯 번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인이었습니다. 당시 사회 기준으로 봐도 가장 심각한 경멸과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일부러 찾아 가십니다. 주님은 물을 기는 그녀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녀가 관심을 보이자, 그녀의 평생 수치인 ‘남편’의 문제를 언급하십니다. 정죄하심이 아니라 공감하신 것입니다. 동시에, 그녀에게 “영과 진리로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가 되라”고 격려하십니다. 이 말을 전하는 내가 바로 메시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대화를 통해 그녀는 평생의 무거운 굴레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사람 눈초리를 피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예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공관복음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나병환자가 있습니다. 나병은 발병 즉시 제사장에 의해 진단받습니다. 나병으로 진단받으면 자연치유되기 전에는 평생 격리되어 살아야합니다. 상상할 수 없는 수치와 괴로움의 삶입니다. 의사였던 누가는 그의 나병이 온 몸에 있었다고 의학적으로 기록합니다. 그는 죽음이 임박한 자였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나오기까지는 돌 맞아 죽을 것을 각오해야 가능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나지막하게, “주여, 원하시면 저를 낫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원하니 깨끗함 받으라” 라고 말하셨고, 그 순간 그는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씀 이전에, 그에게 손을 내밀어 문둥병 환자의 몸에 손을 대십니다. 그 손길은 병에 대한 치료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그가 겪었던 외로움과 서러움에 대한 공감과 위로의 손길이었습니다. 그는 나병에 걸린 이후로 어느 누구로부터도 자기 몸을 터치해 준 경험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평생 예수님의 그 따스한 손길을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비과 긍휼이 여러분께는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 여러분의 가장 깊은 상처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따스한 손길을 내미시는 주님. 함께 가자고 말씀하시는 주님. 이 분이 우리 예수님입니다. 다음으로 보기 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용서입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 자리에 예수님을 팔 가룟유다도 함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의 발까지 닦아주셨는지 궁금해집니다. 이어서, 주님은 가룟유다를 생각하시며 그 심령이 너무 괴로워하셨다고 나옵니다. 왜 그렇게 괴로우셨을까요? 단지, 그가 자신을 팔 것 때문이라면, 굳이 예수님은 그의 발을 닦아줄 필요는 없으셨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마음이 아니니까요. 예수님은 가룟유다까지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관심의 초점은 가룟유다였습니다. 계속해서 그가 깨달을 수 있도록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마음을 사탄에게 열어 두었습니다. 결국, 그가 죄의 길을 택할 것과, 어떻게 그 생을 마감할 지를 아신 예수님은 그 마음이 너무나 괴로우셨던 것입니다. 이 마음은 마태복음 26:24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십자가 지는 것은 정해진 것이지만, 그 화를 받는 유다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면 좋았을 걸!” 탄식하시는 주님의 관심은 자신의 십자가가 아니라, 유다의 영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가룟유다와는 다른 종류의 실망감을 예수님께 안겨 주었습니다. 그는 수제자였고, 리더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연약함 때문에 신앙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베드로를 찾아 가셨을 때 모습을 보면, 오직 베드로를 세우시는 것에만 관심이 있으심을 알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도 베드로에게 섭섭하실 수 있는 상황인데도 말입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어떠한 죄도 용서하시는 초월적 용서입니다. 아무리 부끄럽고 큰 죄를 지은 사람일지라도, 그가 돌이키기만 하면 주님의 용서와 긍휼은 열려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받았고, 가룟유다는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초월적 용서를 할 수 없습니다. 저도 자신 없습니다. 다만 닮고 싶습니다. 너무나 고결한 모습입니다. 이 분께 나아가시기 원하십니까? 이 분을 진정으로 사랑하시기 원하십니까? 용서와 긍휼의 두 팔을 벌리고 계시는 주님께 나아갑시다. 세상에 다시 없는 멋진 분, 예수님께 나아갑시다. 나눔묵상
제목: 순종과 사랑
요 14:12-24 지난 주에 우리는 마태복음 7장 말씀을 통해서 올바른 믿음과 순종의 관계에 대한 살펴보았습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 좋은 믿음은 반드시 순종을 맺습니다. 오늘은 요한복음 14장 말씀을 통해 사랑과 순종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에서 주님은 계명을 지키는 것, 즉 순종과 ‘사랑’을 특별히 연관짓고 계십니다. 15절에서 주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주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 였습니다. 주님이 요약하신 구약 율법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이처럼 순종은 사랑 없이는 설명이 안 될 정도로 사랑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구약의 율법은 언약, 계약적 뉘앙스가 강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의 근원에 있는 정신은 바로 ‘사랑’ 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께 진정으로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상대방을 위해서 내 행동을 바꿉니다. 스스로의 행동을 제약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은 부끄러움도, 수고도 감수하게 해 줍니다. 우리가 ‘순종’ 이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이 질문을 해 봐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십니까?” 저는 우리 기독교인들 중 꽤 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구원사역도 알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도 아는데 예수님을 사랑할 만큼 친근하지는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어떻게 사귈 수 있을까요?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는 2천년이라는 시간적 갭과, 수만 마일이라는 공간적, 문화적 갭이 가로 막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그 분의 카리스마뿐만 아니라, 차분하고, 깊이 있고, 배려심 있는 모습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그 분께 삶을 내어 드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과 친밀한 사귐을 하려면 ‘말씀과 묵상’의 방법을 통해야 합니다. 특히, 복음서를 깊이 있게 묵상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오감과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하여 예수님의 행적과 그 속 마음을 깊이 읽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묵상하다보면 예수님의 성품이 느껴집니다. 그 분의 마음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성령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된 예수님과 사귐을 갖는 것입니다. 만약, 성경에서 예수님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에게 대하신 태도나 방법이 깨달아졌으면, 오늘 비슷한 상황에 있는 내게도 반드시 그렇게 대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말씀을 내 삶에 접목하는 근거입니다. 성경은 단순한 역사기록이 아니라, 신자들이 삶에서 살아 내도록 기록된 글입니다.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할 때 삶이 변합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예수님 사랑하기’ 프로젝트 설교를 진행하려 합니다. 복음서에 나온 예수님의 대표적인 모습들을 뽑아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를 깊이 있게 묵상하면서, 그 분을 우리가 사랑하도록 나아가려 합니다. 오늘 다룰 주제는 ‘예수님의 평온함’ 입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예수님이 주도하신 일이 아니라, 제자들의 조급함으로 시작된 사건이었습니다. 주께서 빈 들에 가시자 여러 고을에서 많은 무리가 예수를 보러 나왔는데, 이미 저녁이 되었습니다. 이들을 뭔가 먹여야 할 책임이 있는 제자들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들을 마을로 보내어 각자 먹을 것을 사먹게 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 한 어린아이 도시락이었던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가져오자 주께서 축사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무리들에게 나눠졌는데 놀라운 배가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이 상황 가운데에서 평안하셨을까요? 이 평온함이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 예수님은 광풍이 바다를 삼키려 할 때도 배 뒤편에서 베게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저는 고등학생 시절, 파도치는 바다에서 배를 타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 때를 생각해 볼 때, 이 상황에서 잠을 주무셨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제자들은 예수께 자신들이 죽게 되었는데 주무시기만 하실 거냐고 따지듯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없음을 책망하시고 바다와 바람을 꾸짖어 고요하게 하셨습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평온함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 중에 인생의 폭풍우 앞에 계신 분 계십니까?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직 예수님이 주무시고 계십니까? 그럼 괜찮습니다. 여러분도 주님 곁에서 주무셔도 됩니다. 여러분과 예수님은 공동 운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위험해지면 주께서 깨어나셔서 여러분을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지키시는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잡혀 갈 때조차 고요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 섰을 때도 당당하면서도 평안함을 유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도, 비록 육체적으로는 극한의 고통으로 떨림이 있으셨지만 그 내면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삶을 살면서 이런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이토록 온유하면서 대범하고 흔들림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우리는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성경은 이러한 분이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신다고 약속합니다. 우리는 이런 든든한 목자를 둔 양들입니다. 예수님의 평온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을 여러분께 하시는 말씀으로 그대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 심령이 새롭게 살아날 것입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위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스스로 가장 어려운 길을 걸으셨기에 그 분의 위로는 우리를 살리는 새 힘이 있습니다. 주님의 평온함에는 든든함이 있습니다! 새 힘이 있습니다! 위로함이 있습니다! 이 주님 깊이 깊이 사랑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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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청년부 예배오후 2시 (청년부 예배실) Archives
September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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