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왜 제자인가?
오늘부터 우리는 약 한달동안 제자도에 대한 시리즈 설교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제자는 누구이고, 제자로 사는 삶은 어떤 것인지 함께 알아 감으로써 저와 여러분이 모두 제자의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제자’라는 단어의 뉘앙스는 단순한 학생의 의미를 뛰어 넘습니다. 학생은 스승에게서 지식을 배운다면, 제자는 그의 삶을 배우고 그대로 따르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제자는 꽤나 무게감이 느껴지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개인적인 구주로 믿으면 그때부터 신앙생활이 시작됩니다. 이 상태를 우리는 ‘신자 (기독교인, Christian)’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신자의 길을 어느 정도 걷다 보면, ‘신자로 살 것이냐, 제자로 살 것이냐’ 를 결정해야 하는 시기를 마주하게 됩니다. 신자는 믿음을 고백한 사람입니다. 제자는 순종을 고백한 사람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을(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제자는 예수님이 전부인 사람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이(도) 그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제자는 예수님만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든 제자는 신자이지만, 모든 신자가 제자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반드시 제자로 살아야만 하는 것인가요? 현대인들은 은혜로 얻는 신자의 자리는 사모하나 어려운 제자의 길은 외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대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신자는 많은데 제자는 양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Dallas Willard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가 되지 않고도 크리스쳔(신자)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현대 기독교의 가장 잘못된 신화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는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 순종을 면제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꼬집습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제자의 삶은 선택이 아닌 당위의 문제가 됩니다. 그럼 예수를 믿은 우리는 왜 반드시 제자의 길을 가야 할까요? 이에 대한 가장 명확한 이유는, 우리가 따르려는 예수님 자신이 순종의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제자에게 요구되는 삶의 덕목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면 그 분의 순종의 삶을 따르는 것이고, 이것은 곧 제자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순종의 모습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 곳은 십자가였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지시기 직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것은 그 분이 자신의 원과 뜻을 버리고 순종을 택하신 것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순종은 그냥 순종이 아니라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순종의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말씀은 우리의 부르심의 자리가 제자의 자리임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한편, 오늘 본문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죽기까지 순종’하기를 가르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정확하게 당신께서 보이신 순종의 본을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둘째, 부르신 자의 가치를 알면 제자로 살게 됩니다. 우리를 부르신 주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분이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며, 다스리시는 왕이라고 성경은 고백합니다. 이런 주님이 오히려 가장 친근하고 인격적인 목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예수님이 얼마나 고귀한 분이신지 잊곤 합니다. 만약, 부르신 자의 가치를 알아볼 줄 안다면 그 분께 순종하는 것이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재벌가의 자녀가 여러분에게 청혼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기분이겠습니까? 예수님의 가치를 제대로 깨닫는 자는 예수님께 올인할 수 있습니다. 셋째, 부름받은 나의 가치를 알면 제자로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나의 가치는 곧 예수님의 가치가 됩니다. 이것을 성경은 대속(값을 치름), 혼인, 내주(indwelling) 등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 분은 우리 안에 항상 거하시며 동행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할 수 있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요14:12). 하나님은 부르심에 반응하는 사람과 동역해서 주의 일을 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능력이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인간의 순종만 필요합니다. 순종하는 자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권능을 발휘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그 분을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의 가치를 갖고, 예수님의 권능이 나타나는 자가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비입니다. 이 신비를 안다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청년 여러분, 제자의 삶은 비록 좁은 문으로 가는 힘든 길이지만, 그 길에는 진정한 감격과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절대 줄 수 없는 수준의 것입니다.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삶은 고되지만 짜릿합니다. 내가 왜 이 땅에 존재하는지, 내 삶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이 신앙 안에서 해결되면 놀라운 희열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잘 나가던 사업가, 의사, 재력가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선교지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기쁨을 맛본 자는 세상이 주는 기쁨에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진짜는 가짜로 대체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제자의 길을 포기한 신자는 자신도, 주변도, 세상도 절대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생명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살아있으나 죽은 신앙입니다. 오늘 이 시간,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솔직하게 묻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요? 신자입니까, 제자입니까? 나눔 질문 1. 나는 신자에 가깝습니까? 제자에 가깝습니까?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신자로서 세상에서 마음껏 잘 누리며 살고 죽어서 구원받는 것이 그 동안 우리의 마음이었다면, 오늘 말씀은 이것이 어떤 문제가 있다고 말씀합니까? 여러분에게 가장 와 닿은 부분을 통해 나누어 보세요. 3. 나는 제자로 살고 싶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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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목장사역, 새로운 시작을 축복하며
오늘부터 청년부 Psalm 삶 공동체는 앞으로 1년 동안 함께 신앙 공동체를 이뤄갈 목장모임을 시작하게 됩니다. 오늘은 우리 청년부가 목장사역을 왜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그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럼 우리는 어떻게 목장모임을 가져가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교회는 그 태동기부터 소그룹으로 모였습니다. 구약의 족장시대는 가족공동체란 소그룹이 있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부장이란 소그룹 기본단위로 이뤄진 공동체였습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은 열 두 제자와 함께 소그룹 사역을 메인사역으로 하셨습니다. 그 본을 이어받은 초대교회도 소그룹, 가정교회 형태로 운영되었습니다. 소그룹의 유익은 이미 연구가 끝난 분야입니다. 20세기 후반부터 교회뿐 아니라 일반사회에서도 교육학, 사회학, 심리학적으로 소그룹 시스템은 많은 연구가 있었고, 이미 현장에서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열 명 내외의 사람들이 수평적 관계를 이룬 소그룹이 갖는 놀라운 효율성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소그룹 모임에는 어떤 장점이 있을까요? 먼저, 소그룹은 인격적 상호작용이 가능합니다. 이 관계에서는 대중 속에서는 불가능한 유대관계 형성이 가능합니다. 탄탄한 유대관계 속에서만 상처의 고백과,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다음으로, 소그룹은 멘토링과 상호 모방을 통해 함께 배워갑니다. 소그룹이 함께 모이면 비록 전문가가 없더라도 그룹 안에서 옳은 방향을 찾아가는 놀라운 자생력이 있습니다. 그 중 일부가 영적 모범이 되면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선한 자극이 되어 함께 배우려 합니다. 이것을 상호 모방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좋은 목장은 끝날 때가 되면 많은 목원의 삶의 수준이 함께 올라가는 일이 일어납니다. 엄청난 축복인 것이죠. 더구나 권위주의가 해체되고, 수평적 관계성이 더욱 중시되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시대 가운데 목장모임은 현대인의 영적, 사회적 필요를 채워주는 가장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이렇게 유익한 목장모임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흔히 소그룹 모임의 3요소를 꼽으라면, 말씀, 교제, 식탁을 말합니다.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것은 말씀을 상고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들은 말씀이 내 속에서 내면화되게 됩니다. 그리고 멘토링과 상호 모방과정을 통해서 실천적 말씀이 됩니다. 즉, 지식적 말씀이 삶의 말씀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매번 나눈 것을 삶에서 살지 못하더라도 계속해서 이 모임을 통해 결단하고 실천해 가다 보면 어느 새에 우리 삶의 수준이 몰라보게 성장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삶을 진솔하게 나눠야 합니다. 초대교인들은 경제 공동체를 이뤄서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모였습니다. 개인적 부의 축적을 포기한 이들이 모여서 나눈 것은 털끝 하나 숨길 것 없는 진솔한 삶의 나눔이었습니다. 삶을 나누기만 해도 치유가 시작되는데, 이것을 “일반화의 유익” 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구성원 모두가 서로의 삶을 오픈할 마음의 준비가 되고, 함께 나눈 것을 끝까지 비밀을 지켜주며 마음으로 함께 해 준다는 신뢰가 형성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 모두가 아주 민감하고 면밀하게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목장모임은 식탁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식탁 공동체는 곧 섬김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잡히시는 밤까지 식탁 교제를 중단하지 않으셨습니다. 초대교회도 그 본을 따랐습니다. 특히, 성전에서 말씀과 삶을 나누고, 가정을 개방해서 식탁 교제를 이어갔습니다. 초대교회가 이런 소그룹 모임이 활성화되었기에 그토록 짧은 시간에 폭발적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오늘부터 시작되는 목장모임에 임하실 모든 분들께 당부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 첫번째는 관계적 challenge를 회피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목장 안에 불편한 사람이 섞여 있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 들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불편한 관계를 우리의 성장 도구로 활용하십니다. 어려운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은 자기 부인의 마음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인데,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는 자라야 나를 따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음으로, 원래 좋은 목장보다, 서로 만들어가는 좋은 목장이 되도록 노력하십시요. 이전에 좋았던 목장과 비교하는것은 이를 해치는 주된 원인입니다. 처음에 어색하고 다소 실망스러워도, 함께 마음만 합치면 분명히 좋은 목장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목원 모두가 해야 할 부분이 있고, 특히, 내가 해야 할 역할이 있을 겁니다. 그것을 찾아 실천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하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목장모임은 그 자리를 지켜주는 분들 때문에 유지되고 발전됩니다. 가장 훌륭한 목원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그 자리를 지켜주는 목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목장모임을 끈끈하게 하다보면, 내년 이맘 때에는 우리 공동체가 서로 구원을 이뤄가는 아름다운 공동체로 한 단계 성장해 있을 것입니다. 이런 공동체가 있는 교회,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런 교회를 우리 손으로 함께 만들어가고 싶지 않은가요? 우리 함께 해 나갑시다. 목장의 머리 되신 주께서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반드시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시작되는 열 한 개 목장 모두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눔 질문 1. 내가 목장모임에서 바라는 가장 소중한 것은? 2. 좋은 목장을 만들기 위해서 모두에게 바라고 싶은 한가지는? 3. 좋은 목장을 만들기 위해 내가 실천하기로 결심하는 한가지는?
제목: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 자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세워진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곧 일어날 일로 믿었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믿었는지, 그 결과는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2천년 후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큰 의미가 있겠습니다. 초대교인들, 심지어 주님과 3년간 삶을 함께 한 사도들도 예수님의 재림을 곧 일어날 일로 생각했던 것은 나름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과 천사들의 증언들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만한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요14:2-3, 행1:11, 계22:7, 12 등) 여기에 그들의 억압받는 삶의 환경이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게 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들은 로마와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핍박을 받으며 신앙을 지켜갔고, 참담한 현실을 뛰어넘는 소망이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재림의 때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분명 예수님은 ‘그 때를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13:32-33, 마25:13 등) 그러나 가혹한 현실을 살던 초대교인들은 재림의 때를 기약없이 기다릴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속히 오리라”는 말이 그들에게 훨씬 더 큰 위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그들에게 종말신앙은, 곧 일어날 일을 바라는 실재적(實在的) 믿음이 되었습니다. 비록 때는 틀렸지만 이 신앙은 그들에게 영적으로 신앙을 지켜온 큰 유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인의 경우는 조금 달랐습니다. 그들은 주로 헬라인들로서, 경건하게 주님의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재림이 늦어지면서 먼저 죽은 자들에 대한 문제와 재림의 때에 대해 궁금증이 생겨 바울에게 묻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첫번째 서신에서, 예수 안에서 잠자는 자들(죽은 자들)이 예수님의 재림 때 먼저 일어날 것을 말해줍니다. 때에 관하여는, 오직 하나님께만 달린 문제이지만 그 날이 도적같이 임박하여 올 것이라고 답변합니다. 이것을 들은 성도들은 바울의 진의를 오해합니다. 헬라철학이 가르친 이원론적으로 종말을 오해해서, 곧 예수님이 오신다면 이 세상은 아무 소용없는 것이고, 따라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영적 향유만 하면서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려는 모습이 생겨났습니다. 전형적인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태도입니다. 이처럼 종말신앙에 관해 두 가지 대표적인 잘못된 형태는 시한부 종말론자와 종말 무관심론자입니다. 이에 바울이 재차 권면의 편지를 쓴 것이 데살로니가 후서입니다. 여기서 그는 성도들에게, 사람의 소리에 현혹되거나 미혹받지 말고, 오직 성경에 입각해서 종말을 이해하며, 특별히, 성실하게 오늘을 살아갈 것을 강조합니다. 바울이 말한 것이야말로 시한부 종말론에 빠지지 말고, 종말 무관심론에도 빠지지 말며, 건강한 종말신앙을 가질 것을 권면한 말이라고 할 것입니다. 종말론은 지금도 어려운 주제입니다. 적그리스도, 환란, 재림, 휴거, 천년왕국, 최후심판의 순서가 무엇인지, 또 그것들이 실제 일어날 것인지 상징인지에 따라 해석이 크게 다른 분야입니다. 저는 종말론이 어려운 이유는 하나님께서 흐릿하게만 보여주셨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흐릿하게 계시해 주신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럼 우리가 흐릿한 계시를 선명하게 해석하려는 노력이 의미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의 권면처럼 건강한 종말신앙을 갖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건강한 종말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종말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이유를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가장 주된 이유는 재림하실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은 약자를 보호하시고, 고난당하는 자를 위로하시며, 스스로가 겸허하게 오셔서 모진 고난을 감당하시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이제 그 분이 만물 위에 높고 존귀한 영광의 모습으로 오셔서 악을 심판하시고, 깨어진 세상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뱀에 의해 빼앗긴 에덴을 새 에덴으로 회복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종말입니다. 이것을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우리 신자들도 주님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부활을 경험하고, 모든 애통과 질병과 사망이 종식되며, 하나님의 환희의 사랑의 세계에서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창조세계를 깨뜨린 장본인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심판을 어린양을 통해 받게 됩니다. 이 때, 신자도 정결케 하는 사랑의 불을 통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 심판자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시요, 그 심판은 자비의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종말신앙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큰 유익이 있습니다. 먼저, 환란과 역경이 와도 믿음으로 극복할 힘을 줍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끝이 아니요,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공의를 실현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종말신앙은 다른 사람을 부요케하고, 고통받는 자들 편에 서며, 깨어진 창조세계의 회복을 대변하게 됩니다. 그것이 종말 때 일어날 일들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카운트되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부족해도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1세기 사람들은 ‘성도’ 라고 불렀습니다. 마지막으로, 건강한 종말신앙을 가진 사람은 오늘을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오심을 진짜로 기다리는 자들은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켜냅니다. 이런 사람들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초대교인들처럼 이러한 실천적 재림신앙을 가진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묵상 질문 1. 그 동안 나의 모습은 시한부 종말론자에 가까웠나요, 종말 무관심론자에 가까웠나요? 왜 그랬다고 생각되나요? 2. 최근 학계에서도 ‘종말론’ 이란 명칭 대신 ‘소망’ 이란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재림이 내게 ‘소망’이 되나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은 부분이 있으신가요? 3. 예수님 재림을 소망하는 내가 오늘 내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적용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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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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