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목자와의 동행
샬롬! 다윗이 쓴 시편 23편은 목가적 아름다움과 함께 인종과 문화를 초월하여 마음을 터치하는 깊은 메시지가 있기에 지금껏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시입니다. 목동이었던 다윗만큼 목자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양들이 어떤 특성을 가졌는지, 목자와 양의 관계가 어떠한 지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고백한 ‘여호와는 나의 목자’에는 일반인은 알 수 없는 숨겨진 의미들이 축약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는 목동의 경험과 생생한 삶의 체험을 담아 이 고백을 하였습니다. 특별히 다윗은 목자와 양의 관계에서 두 가지를 강조하는데 그것은 신뢰와 인격적 사귐입니다. 그는 모두에게 선한 목자가 아니라 내게 선한 목자이신 그 분을 찬양합니다. 그런 목자를 다윗은 온 마음으로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2-3절에서 그는 목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양들을 먹이는 것 (feeding)으로 정의합니다. 목자는 양들을 먹이고 마시게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고백한 선한 목자는 단순히 생존을 위한 feeding을 넘어 양들의 행복과 감정적 만족까지 살피는 세밀한 목자입니다.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다윗은 이런 선한 목자가 자기 영혼은 소생시킨다고 고백하는데, 이는 원어적으로 볼 때 ‘돌이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험한 세상에서 팍팍해진 심령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깊은 평강(Shalom)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목자와 양의 깊은 신뢰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양은 목자를 신뢰할 때 목자의 품에 안겨 진정한 평강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선한 목자는 양들을 의의 길, 즉 하나님이 의롭다 인정하실 만한 인생 길로 이끄신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양들이 의의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3절) 양들이 목자가 인도하는 길을 잘 따르는 것은 하늘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일입니다. 욥의 순전함 때문에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고, 사탄은 이를 시기하여 모략을 짜냈던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4절부터는 시의 배경이 확 바뀝니다. 목가적 분위기는 사라지고 사망의 골짜기가 주 배경이 됩니다. 사실 베들레헴은 험한 광야 지대입니다. 아름답기만 한 목초지가 아닙니다. 베들레헴 목동 출신 다윗은 이를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선한 목자를 만나도 사망의 음침한 계곡은 여전히 있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철저하게 현실에 입각한 영성으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만나도 여전히 삶의 어려움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선한 목자는 사망의 골짜기를 없애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골짜기가 있지만 그 곳을 우리와 동행하시고, 안위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다윗은 평생을 통해 이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선한 목자의 손에는 지팡이와 막대기가 있으며, 그에게는 우리에게 상을 차리시고 기름을 부으실 권위가 있으십니다. 우리의 목자는 끝까지 자신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양들을 원수가 보는 앞에서 높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결국 목자가 우리에게 주시는 마지막 약속은 원수 앞에서 높임 받는 것, 즉 ‘승리’입니다.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만 있는 삶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시는 한적한 목가적 노래가 아니라 거친 풍랑을 뚫고 승리를 쟁취하는 전장의 개선가인 것입니다. 그 승리를 경험한 다윗은 마지막 절에서 다시금 주의 임재와 평강이 있는 관계 가운데로 돌아갑니다. 그에게는 승리보다도 평강이 더 중요했습니다. 왜냐면, 그것이 그가 원했던 궁극의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영원히 그 곳에 머물겠다고 선포합니다. 그는 목자와의 동행 자체가 그의 삶의 목표였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이 시를 읽으며 한 분이 떠오릅니다. 이 시의 목자와 같은 삶을 실제 살아 내신 한 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은 다윗이 목동생활을 했던 바로 그 곳에서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의 탄생을 처음 알게 된 자들도 다윗의 후배 목동들이었습니다. 그는 친히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표현하시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그는 양들에게 자신과의 동행과 연합을 진정으로 바라셨는데 이를 나무와 가지의 관계로 표현하시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그 분은 친히 양들의 길이 되어 주셨고, 양들에게 궁극적으로 약속해 주신 것은 바로 ‘평안과 승리’ 였습니다. 천 년 전 다윗이 고백한 바로 그 목자이십니다. 그 분은 바로 우리의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윗이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처럼 우리 삶도 예수님과 평생을 동행하는 삶, 그것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는 복된 삶, 승리의 삶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나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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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감사, 천국문을 여는 열쇠
우리는 한 해동안 주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드리는 추수감사절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감사는 감사 시즌에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평소 놓치기 쉬운 감사의 의미를 Thanksgiving을 맞아 다시금 새겨서 감사의 삶이 회복된다면 이는 복된 일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과 다윗의 감사의 모습을 통해 감사의 참된 의미를 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시면서 감사기도를 드리신 대표적인 세 경우가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역을 하시기 전에 소년이 가져온 보잘것 없는 음식을 놓고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도 많은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올려드렸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날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나누며 떡과 포도주를 받고 아버지께 감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세 감사의 사건들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위기와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감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큰 위기 앞에서 주님은 작은 것에 감사하셨습니다. 그 상황을 해결해 주셔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 가운데 아버지가 함께 하심에 감사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감사 후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5천명을 먹이시고도 남은 음식이 열 두 광주리나 되었고,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가 살아서 자기 발로 걸어 나왔으며, 성찬 때 상징하신 예수님의 몸과 피가 온 인류에게 구원을 베푸는 구원 역사가 완성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언약의 말씀이 성취되며,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이 밝혀졌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요, 부활이며, 고난 받은 메시아이심이 밝히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감사의 모습을 꼭 닮은 구약의 인물이 다윗입니다. 그는 평생토록 사울에게 쫓김 받고, 대적들에게 공격당하며, 심지어 자기 자식에게 쫓겨 다니는 고난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가 기록한 시편들은 대부분 자신이 처한 고통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끝은 항상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예, 시편 7편, 18편 등) 시를 읊는 동안 그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성령이 그의 마음을 확신으로 이끄시매 그는 그 상황에서도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고 그가 상상할 수 없었던 축복을 베푸셨습니다. 가장 좋은 예가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다윗 언약’입니다. 전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가장 먼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옵니다. 그 일을 마무리한 후 그는 전심을 다해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역대상 16장) 이후 다윗은 자신은 궁궐에 있는데, 하나님의 언약궤는 휘장(텐트)에 있는 것이 마음이 아파 언약궤를 둘 성전을 건축하기를 희망합니다. 이 때 다윗의 일개 목동인 자신을 높이신 하나님을 최고로 높이기 원하는 진정한 감사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다윗 언약’을 주시는데, 곧 다윗의 자손에게서 메시아가 나올 것이라는 놀라운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다윗의 감사는 그를 메시아의 육신의 조상이 되도록 하는 놀라운 기적을 불러옵니다. 우리는 패스워드의 홍수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패스워드를 모르면 제 아무리 은행계좌에 돈이 있어도 한 푼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천국에도 패스워드가 있다면 그것은 감사라고 믿습니다. 감사는 하늘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감사로 시작하는 우리 기도를 흠향하시고,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것으로 베풀어 주십니다. 더구나, 감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드리는 감사는 하나님의 즉각적 개입을 촉구합니다. 이런 감사는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헤세드의 마음을 터치하여 하나님의 즉각적인 개입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감사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감사는 범사에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를 인정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내 삶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일어난 것으로 이해할 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감사는 겸손해야만 가능합니다. 내가 은혜를 받을 자격이 되지 않는 사람임을 인정할 때 베풀어 주신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할 수 없는 환경에서 감사하려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야만 가능합니다. 이 환경 뒤에 계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해야 환경을 초월하는 감사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걸 종합하면, 감사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형성되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이 그 의미입니다. 종교의 자유를 갈망해서 영국을 떠나 플리머스에 도착한 청교도인들은 첫 해 겨울의 혹독함 속에서 겨우 생존하여, 그 다음에 가을 그리 보잘 것 없는 옥수수 결실을 얻게 됩니다. 그들은 그저 생존한 것에, 베푸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도와준 인디언들을 초청하여 작은 감사의 축제를 벌였던 것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감사에서 예수님과 다윗의 감사의 모습이 보입니다. 놀랍게도 이들의 감사가 지금의 미국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의 감사의 마음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주님이 베푸신 귀한 삶의 환경을 순수한 마음으로 감사하고, 주변의 부족한 사람들과 비록 작은 것이라도 함께 나누는 것. 하늘 문을 여는 감사가 될 줄 믿습니다. 이러한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눔 질문
제목: 복 있는 사람
시편1편은 시편 23편과 함께 많은 기독교인들의 사랑을 받는 참 아름답고 귀한 시입니다. 저도 여러분과 같은 젊은 나이에 이 시편을 묵상하면서 받았던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시편1편을 통해 성경에서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어떻게 복 있는 사람이 될 지 묵상하는 의미있는 시간 되시길 소망합니다. 먼저, 시편은 복 있는 사람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가장 먼저 악을 떠나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1절)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는 표현은 점층적으로 악으로 치닫는 모습을 잘 나타내 줍니다. 죄를 따르는 길은 처음에는 호기심에 미혹되다가 결국에는 돌이키기 어려운 자리에 주저 앉는 것으로 끝나고 맙니다. 시편은 분명히 악인들에게도 꾀가 있고, 죄인들이 가는 길도 따로 있으며, 오만한 자가 앉는 자리도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은 그 자리를 피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기 때문입니다. (2절) 말씀이 즐거워지면 세상이 말하는 꾀나 지혜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됩니다. 묵상하는 것은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는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이 그 입을 떠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편 기자는 묵상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지 않고, 복 있는 사람이 묵상한다고 표현합니다. 즉, 그 순서는 복받기 위해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복 있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말씀을 묵상한다는 뜻입니다. 그 내면이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진 상태, 성령 충만한 상태가 복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물과 햇빛을 통해 영양분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아 생명력을 유지하고 철을 따라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열매는 열매 맺을 때가 되었을 때 맺는 것입니다. 그것을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 과정에는 열매 맺기 위한 기다림도 있고, 험궂은 날도 보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때가 되면 어김없이 열매를 맺습니다. 그것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의 특징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다고 말씀합니다. 형통과 성공은 조금 다른 개념입니다. 성경은 요셉이 종으로 있을 때, 옥에 갇혔을 때도 형통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처한 상황이 어떻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철을 따라 선한 열매들을 맺는 삶이 곧 성경이 말하는 형통한 삶입니다. 이제 시편기자는 반대로 악인을 묘사하는 데, ‘바람에 나는 겨’로 비유합니다. (4절) 겨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의 반대 개념입니다. 이 둘의 가장 큰 차이는 뿌리에 있습니다. 뿌리가 냇가에 있으면 생명력 있는 나무가 되고, 뿌리가 없으면 말라버린 겨가 됩니다. 시편 1편의 시냇가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말씀(logos)을 상징합니다. 복 있는 사람이 주야로 율법을 읊조린 것처럼 하나님이 그 속에 있느냐가 시냇가의 나무와 바람에 나는 겨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지, 이 세상은 어떻게 창조되었고 그 후에는 무엇이 있는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고 죄인인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는지, 구원받은 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즉, 존재와 생명에 관한 기반을 닦아줍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깨달은 자는 시냇가의 나무처럼 삶과 가치관의 뿌리가 든든히 내려집니다. 겨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바람 부는 대로 이리 저리 흩날리는 존재가 됩니다. 마치 유행 따라 이리 저리 움직이는 세상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겨가 더 형통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영안을 가진 사람들은 이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겨와 생명 나무가 확연히 구분되는 때는 심판의 때입니다. (5절) 심판 때에는 생명력이 없는 겨들은 사그러 들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겨도 존재합니다. 예수님도 추수 때까지 가라지를 함께 자라게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심판 이전까지는 세상에 알곡과 함께 가라지도 있음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길은 오직 의인의 길뿐입니다. (6절)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인정하는 삶을 사는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반대로, 주께서 카운트하지 않는 삶을 살면 그처럼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 때는 후회해도 더 이상 기회가 없습니다. (눅16장) 예수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하신 포도나무 비유를 시편 1편과 같은 맥락에서 보는 것은 의미있는 깨달음을 줍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시냇가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죄를 떠나고,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순종하심으로 가장 훌륭한 시냇가의 나무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그 분의 가지로 초청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님께 붙어만 있으면 됩니다. 일상의 삶에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 바로 그 삶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삶이요, 신구약이 공통으로 말하는 복 있는 삶입니다. 이런 삶 살아내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묵상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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