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약))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오천명을 먹이신 사건은 예수님의 사랑을 너무나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으로 혼자이기를 원하셨던 예수님은 그를 따라온 무리들을 보시고 긍휼이 여기사 그들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하지만, 저녁이 되어 그들을 돌려 보내려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오천명을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먹이시고 남은 바구니가 12개나 되었습니다. 그후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에 다시 갈릴리 호수가에서 제자들에게 물고기와 떡으로 아침을 먹이시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상기시키신 후에 베드로에게 그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지를 묻습니다. 세번째로 같은 질문을 받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명령하십니다. 육적인 배고픔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배고파하는 무리들을 향해서 그의 양을 먹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하시는 참 제자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토의 질문)) 1)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혼자 계시고 싶은 시간에 멀리서 찾아온 무리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치유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힘든 일들이 있을때 여러분에게서 도움을 얻기 위해 찾아오는 주위의 이웃들을 어떻게 대하시겠습니까? 2) 여러분은 왜 예수님께서 그의제자들이 무리들에게 음식을 줄 수 없는 줄 아시면서도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3) 여러분이 가지고 계시는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4) 여러분 주위에 계신 예수님의 양들은 누구 입니까?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먹이시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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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낮음과 높음을 분별하는 지혜
우리가 함께 묵상중인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친동생이자 초대교회의 중요한 리더인 야고보가 기록한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특별히 믿음과 행함의 균형을 잘 가르쳐주는 성경으로서 건강한 믿음이 필요한 현대에 더 주목받는 글입니다. 야고보는 그 시작을 신앙인이 받는 시험으로 출발합니다. 시험은 우리를 온전케 하는 것이므로 오히려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에서 그는 지혜를 구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시험을 잘 극복하려면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지혜는 단순히 아는 지식과는 다릅니다. 지혜는 삶에 연결된 것으로서 경험의 영역이며 신념과 가치관이자 믿음의 영역입니다. 따라서 신앙은 지식에만 머물러서는 소용이 없습니다. 지혜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야고보가 시험받을 때 지혜가 필요하다고 한 속 뜻은, 지혜가 있어야만 그 시험이 해석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신앙인은 그 시험을 인내하며, 시험 뒤에 올 축복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이 지혜는 하나님께로 오는데 하나님은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이라고 설명합니다. 지혜 없는 사람에게 지혜를 가르치는 것은 보통 정성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지혜를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어서, 시험받을 때는 믿음으로 간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하심이 너무나 간절히 필요한 때가 이 때입니다. 나를 위협하는 악한 세력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시고, 문제가 해결되도록 주께서 새 길을 열어 주셔야만 됩니다. 이를 구할 때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약속합니다. 시험을 통과할 때 가장 큰 적은 ‘의심’입니다. 시련은 보통 오래 걸리고, 해결되기 직전까지 계속 어려운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중간에 지치기가 쉽습니다. 의심이 생깁니다. 바로 이 때가 믿음을 붙잡아야 하는 때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야고보는 중간에 의심하는 자를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고 말합니다. 그의 진단은 ‘두 마음을 품은 자’입니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도 하지만, 내 방법도 따로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에게는 마음의 평안이 없고, 기도응답의 역사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신뢰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이런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두 마음의 뜻을 잘못 이해해서 기도만 하고 내 할 바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게으름입니다. 따라서, 한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바른 자세는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신뢰하고 기도한 후에, 내가 해야 하는 영역을 성실하게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혼자 힘으론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어서, 야고보는 누가 낮은 자고 누가 높은 자인가에 대해 지혜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는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말씀합니다(9). 이 말씀은 이사야 40장 말씀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사야 40장의 배경은 유다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기를 거의 끝낼 무렵입니다. 따라서, 낮은 형제는 유다 백성이요, 부한 자는 바벨론의 통치자들이 됩니다. 그는 바벨론의 포로인 이스라엘에게 높음을 자랑하라고 합니다. 여전히 노예 신분이 그들에게 높음이 있을까요? 그 해석의 실마리는 이사야 40장 3-5절의 메시야 예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노예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높은 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그 안에 거하시는 자는 비록 종이라 할지라도 높은 자입니다. 예수님 스스로 종과 같이 낮아지셨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모든 만물 위에 높이신 것처럼, 그 안에 예수님이 거하시는 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회복과 존귀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각이요, 성경의 약속입니다. 심지어 그들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다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높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보다 바벨론의 포로인 이스라엘을, 로마보다 로마의 억압 속에 있는 초대교인들을 높게 보셨습니다. 반대로, 지금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부와 권력은 하나님 보시기엔 그저 잠시 피었다 지는 풀의 꽃과 같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그들 안에는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통치하는 통치자라 할 지라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눈에는 그들은 철저히 역사 속의 조연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주의 백성에게만 있습니다. 청년의 시기에 이 진리를 가슴 속에 새길 수만 있다면 여러분 인생은 정말 존귀하고 높임 받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세상의 부와 권력은 실제로는 낮은 자요, 세상에선 낮을 지라도 그 안에 그리스도가 거하시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인생은 높은 자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은 예수님의 가치가 그 사람의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았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황제의 폭정에 시달린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편지를 읽으며 그리스도가 오시면 골짜기는 메워지고 산들은 낮아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익투스). 이 영성이 초대교회의 영성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축복관은 세상적 축복관을 닮아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런 지혜를 가진 사람은 삶을 무한 경쟁으로 살지 않습니다. 성실하되 삶의 균형을 지키고, 바쁘지만 신앙과 일의 균형을 지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자, 그 분 자체가 안식이십니다(마11:28). 하나님 안에 거하고 허락하신 환경에 자족할 줄 알며, 무한경쟁을 멈추고 자신과 주변을 볼 수 있는 삶을 삽니다. 안식과 사색이 있고 자아 성찰이 있으며 기쁨을 주변과 나눌 수 있는 삶입니다. 성취와 업적보다 신앙의 온전함이 삶의 목표가 되는 삶입니다. 야고보가 권하는 삶, 이런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 질문 1. 지혜를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지금 내가 구해야 할 지혜는 무엇일까요? 2. 나의 기도는 야고보가 강조하는 믿음의 간구에 가까운가요? (두 마음 vs 한 마음) 3. 성경의 높음과 낮음에 대한 가치관과 세상의 가치관 속에서 나는 어디쯤 와 있다고 느끼시나요?
제목: 야고보서 1, 인내와 지혜
본문: 야보고서 1:1-8 예수님에게 육신의 동생들이 계셨습니다.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 태어난 동생들입니다. 그들 중 야고보는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리더였으며 야고보서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도 부모님의 좋은 신앙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을 것입니다. (눅2장) 그러나, 야고보는 자기 형 예수를 구약이 예언한 메시아로 여기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가 비범한 능력이 있는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구약성경이 예언한 메시아로 믿지는 않았습니다. 얼마 후 야고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사건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친히 그를 찾아 가신 것입니다. (고전15:5-8) 베드로나 바울과 같이 부활의 주님을 개별적으로 만난 자들은 모두 부활의 증인이자 교회의 리더로 헌신하였습니다. 예수의 부활하신 모습을 만난 후에야 야고보는 형 예수를 그리스도로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승천하신 이후에도 그는 예루살렘에 머물다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경험합니다. 그 이후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됩니다. 부활의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면 삶이 변합니다. 당시 그토록 중요한 인물이 남긴 야고보서는 오히려 무게감이 다소 떨어진다고 느낄 수 있는데, 이는 야고보서에 담긴 신학에 대한 편견과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예로,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의 가르침이 믿음을 강조하는 바울신학과 대치한다고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편견은 오해입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핵심은, 바른 믿음은 반드시 바른 행함을 가져오기 마련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는 결코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날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야고보서가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건강한 실천적 믿음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마이클 크루거는, “바울이 율법주의와 싸웠다면, 야고보는 반율법주의와 싸웠다”고 강조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문제 중 하나는 믿음은 좋은데 행함이 약한 것입니다. 우리는 야고보서를 통해 그 부분을 배워 나아가야 합니다. 야고보는 예수의 친동생이란 신분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예수의 종이라고 인사합니다(1절). 짧은 인사를 마친 야고보는 곧바로 첫 권면을 하는데 바로 시험에 관한 권면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이 편지의 수신자인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많은 환란과 시험 가운데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저자는 여러 가지 시험이 겹쳐서 오는 일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강조합니다(2절). 진짜 어려움은 항상 겹쳐서 옵니다. 이런 시련은 우연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힘들지만 그 일들을 다 통과하면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소망하며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그 세부내용이 3절에 나옵니다. 시련은 인내를 만들어 냅니다. 시련의 원어적 뜻에는 ‘진정성을 시험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진짜 시험을 만나면 사람의 본심이 여과없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시련을 주실 땐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떠나지 말고, 내가 해결책을 찾으려 스스로 애쓰지도 말고, 인내하며 끝까지 이겨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내가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 것입니다(4절). 이것이 인내의 목적입니다. 시련을 당할 때 인내하기란 정말로 어려운데, 야고보는 어떻게 인내할 수 있는지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욥이었습니다(5:11) 그는 하루 아침에 자식과 재산, 아내와 건강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럴만한 어떠한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이런 큰 시련도 믿음으로 잘 이겨낸 욥이었지만 세 친구의 지속되는 정죄함에 결국 무너져 “하나님 저한테 왜 이러세요? 제가 정직하게 살아온 것 아시잖아요? 하나님 정말 살아 계세요?” 라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동문서답 하십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하나님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피조물과 창조주의 넘을 수 없는 선을 묻고 계십니다. 절대 주권을 갖고 계신 하나님은 자신을 따르려는 자들에게 ‘이해’가 아닌 ‘순복’을 요구하십니다. 순복이란 순종과 복종입니다. 이해가 되던 되지 않던 따르는 것입니다. 이해를 구한 욥에게 하나님은 “네가 나를 다 알 수 있느냐?”라고 되물으신 것입니다. 그 대답은 당연히 “아닙니다”이죠. 그래서 순복하려면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선하심을 신뢰해야만 가능합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대부분 순복을 잘 한 사람들입니다. 이어서 야고보는 지혜를 말합니다. 시련을 잘 인내하려면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깨달음을 주셔서 내가 받는 시련이 영적으로 해석이 되면 우리는 시련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회복과 축복도 소망할 수 있습니다. 시련의 해석은 오직 여호와의 지혜가 임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혜의 근원됩니다. 우리가 지혜를 구하면 후히 주십니다. 꾸짖지 아니하십니다. 야고보는 구할 자에게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강조합니다(6). 시련을 통과할 때 가장 큰 적은 ‘의심’입니다. 그는 의심하는 자를 두 마음을 품은 자, 그래서 마음에 정함(고요함)이 없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구하면서 의심하는 자는 하나님을 보험이나 복권으로 전락시키는 자입니다. 이런 자가 얻을 상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믿음은 자기 신념이 아닙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으로 구한다는 뜻은, 내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청년 여러분! 인내도 하나님이 도우셔야만 할 수 있습니다. 내 힘과 의지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인내하다가 넘어진 자녀를 일으켜 세우시고 새 힘을 주셔서 끝까지 인내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인내도 불가능합니다. 인내도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앞에 닥친 시련을 ‘순복함’과 ‘인내’로 극복하여 주님 보시기에 온전한 자들로 바로 세움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 질문 1. 야고보가 예수님을 믿기 어려웠던 것처럼 당신도 종교적 가정에서 자라 예수를 인격적으로 믿기 어렵지는 않았나요? 2. 여러분에게 겹겹이 어려움이 온 경우가 있었나요? 어떤 어려움이었는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나누어 보세요. 3. ‘시련을 기뻐하라’는 권면은 참 어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시련을 기뻐할 수 있을까요? 4. ‘순복’과 ‘인내’가 시련을 극복하는 열쇠인데, 이 중 내가 부족한 부분은 무엇이며, 어떻게 보완할 수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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