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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하나님의 사람으로… (창 40:20~41:1)
하나님께서 우리 청년들에게 주신 은혜중 큰 것이 바로 열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열정의 근원과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면 이 열정은 바르지 않은 방향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조상 중 큰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요셉의 인생을 통해서, 이 열정보다 중요한 열정의 근원을 확인함으로 이 열정의 바른 방향을 확인하기를 소망합니다. 요셉은 꿈의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린시절은 사실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 야곱에게 편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특별히 자기애가 큰 사람으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많은 형들과 가족들과 함께 지내야 했으나, 잘 어울리지 못하며 자기밖에 모르는 사회성이 조금 떨어진 아이였습니다. 그러니, 요셉이 모든 형들의 미움과 시기와 질투를 독차지 하는 것은 사실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두번이나 꾸게된 자신이 모든 가족들 앞에서 높아지는 꿈을 통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꿈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견디며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으려 나름대로 노력했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형들의 큰 미움을 받아 종으로 팔려가게 되고, 이집트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의 종이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 앞에서 성실한 열정으로 살아갔기에 그는 온 집의 모든 사람들과 업무를 관리하는 자로 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모함으로 인해 성범죄 미수범이라는 죄명으로 감옥에 갖혀 죄수의 신분으로 살아가게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하고 성실한 열정으로 인해 결국 요셉은 감옥에서도 감옥의 모든 행정일과 감옥의 모든 열쇠를 관리할 정도로 큰 신임을 얻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왕을 보좌했던 두 관원이 감옥에 갖히게 되었고, 요셉을 신임했던 그들은 요셉에게 자신들의 꿈 이야기를 해주었고, 요셉은 그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창 40:12~14) 그러나, 그 때에 요셉은 꿈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자신의 능력인듯 그 관원에게 꿈해석의 조건을 걸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말씀에 기록되어 있듯이, 요셉의 해석대로 복직된 관원은 요셉이라는 존재와 요셉의 요구를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때에, 요셉은 그의 인생 중 가장 큰 시련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에게 가장 큰 시련은 외부에서 오는 고통스러운 환경보다, 그의 마음에 그의 꿈이 사라지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험한 인생에서 가장 큰 기대가 사라졌을 그 때에, 그는 지금까지 붙잡았던 꿈과 희망까지 모두 사라진 고통을 맛보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그 기간이 명확히 2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으나, 그것을 알리없던 요셉은 스스로 큰 고통과 절망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과 희망과 비젼도 무너진 그 시간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기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처절하고 가치없는 현실의 자신의 모습을 깨달았을 때에, 하나님의 크신 영광앞에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 자였는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요셉에게는 큰 고통의 터널과 같은 시간이었을지 모르나, 그는 그 시간 속에서 비로소 이기적이며 자기자신의 빛난 꿈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아닌 자기자신을 처절하게 깨닫게 된 하나님의 눈과 마음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결국 그는 그 비참한 미래가 없어 보이는 그 시간 속에서 그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가는 참 겸손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나님의 이름뒤에 감추이고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도 바로 그 아름다운 것을 요셉의 중심에 만들어 내시기 위해서, 요셉과 함께 아프셨지만 침묵하시며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비로소 참 하나님의 사람의 마음의 눈을 가지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비로소 이집트왕 바로에게 꿈을 꾸게 하십니다. (창 41:1) 그리고, 꿈 해석을 위해 바로왕 앞에 섰던 요셉의 태도는 이전과는 분명히 달랐습니다. 그는 세상 권세를 쥐고 있던 애굽 왕 앞에서 요셉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능력을 가졌는지 어필함을 통해 자신이 이익을 가지려는 기회로 삼지 않고, 그는 자신을 감추이고 오직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참된 겸손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창 41:16) 이후,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당시의 강대국 애굽의 총리로 세우셨고, 또한 가나안에 살던 아버지와 형제들 모두를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분명 자신에게 끔찍한 유년시절을 선물했던 형들에게 끔찍한 복수를 할 수 있는 이유와 힘을 가지고 있던 요셉이었으나, 그는 그의 형들 앞에서도 당신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빚으셨고 준비시키셨다는 믿음의 선포를 함을 통해, 우리는 그가 분명히 참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청년들에게 주신 열정은 참 좋은 것이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열정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다면, 그리고 열정의 목표가 자신을 감추이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돌려야 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그 열정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열정이라는 은혜를 주신, 모든것의 근원이시며 목적이시며 내용이신 하나님만 높이고, 찬양하는 참 하나님의 사람이된 여러분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전 인생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고, 나의 모든 것과 나의 열정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 뒤로 감추는 참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예배하고, 찬양하고, 일하고, 살아내고 숨쉼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여러분 모두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나눔질문 - 하나님의 은혜만을 높이고 나를 감추인다는 의미에 대해 깨달은대로 나누어 주세요. - 나의 삶속에 새겨진 생각과 가치관과 태도들 속에서 혹 나 자신을 드러내기를 기뻐하는 모습이나 성향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지 나누어 주세요.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겸손이라는 것이 무엇일지에 대해 당신의 생각을 나누어 주세요. - 그러한 참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교회와 지역과 세상에 넘쳐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기대하며 당신의 생각을 나누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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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발을 씻기시는 사랑
본문: 요 13:1-11 오늘부터 저희는 요한복음 13장에서 17장까지 기록된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의 기록을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그 시기의 중요도와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예수님의 복잡한 심정을 고려할 때 이 가르침에 제자들과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깊은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 첫번째 시간으로서 오늘은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신 세족식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이 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저녁 식사를 하시다가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후, 친히 대야에 물을 받아와서 제자들의 발을 한 명씩 닦아 주셨습니다. 베드로의 차례가 다가오자 베드로는 완강히 거부하였습니다. 그는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자기 발을 닦아 주신 다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의미를 잘 설명해 주시자 그도 세족에 참여하였습니다. 세족식이 모두 끝난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내가 본을 보인 것처럼 행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떠나가신 후 제자들은 세족의 경험을 두고 두고 생각했지만 그 깊은 의미를 깨닫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가장 먼저는 ‘어떻게 스승이신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셨나’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당시 문화로 보자면 이 행동은 그 집의 종들이 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족식 이야말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서로 관계가 맺어져 있다는 상징으로 설명을 하셨습니다. 즉, 이 관계는 예수께서 제자들의 가장 더러운 죄를 씻어 주시는 관계라는 말씀입니다. 세족은 예수님과 우리의 연합의 상징이며, 그 연합의 핵심은 죄 씻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갈 때 건강하고 깨끗한 모습만 보이려 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더러운 죄의 부분에 먼저 주목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죄 씻음을 받아야만 우리가 온전히 회복되고 죄의 사슬에서 해방된 온전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더더욱 이해하지 못한 부분은 그 자리에 예수를 판 가룟유다까지 초청받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그 자가 잠시 후 자신을 유대인들에게 넘길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은 그의 발도 씻기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영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 비밀은 성찬에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세족식만 기록하고 있는데, 다른 복음서들은 성찬식만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식사 자리에서 성찬을 하신 후 이어서 세족식을 집례하셨습니다. 그래서 성찬식과 세족식은 연결된 의미로 봐야 합니다. 성찬의 가장 큰 의미는 연합입니다. 먼저는 예수님과의 연합이요, 다음은 성찬 받은 성도 간의 연합입니다 (고전10:16-17). 마치 부부를 한 몸으로 칭하셨듯이 성경은 성찬 공동체도 한 몸으로 칭합니다. 그 연합은 아름다운 영역뿐 아니라 죄와 허물까지 모두 포함해서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함께 성찬을 나눈 열 두 제자는 예수님과 연합되었을 뿐 아니라 제자들끼리도 한 몸으로 연합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시고 세족식의 자리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찬 공동체의 놀라운 비밀입니다. 성찬 공동체인 우리가 한 몸이 되었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남의 죄를 탓하거나, 정죄할 수 없는 관계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모두가 내 몸이 지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찬 공동체의 놀라운 비밀을 깨달은 자는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죄와 허물에 대해 영적 책임감을 갖게 됩니다. 열 두 제자는 모두 세족식에 초청받아 각자의 발이 씻김 받는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그리하여 공동체 전체가 새롭게 회복되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물론, 가룟유다는 끝끝내 사탄의 마음을 쫓았지만, 그에게조차 성찬과 세례의 기회가 제공되었다는 점은 성찬 공동체를 이해하는데 굉장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공동체임을 깨닫는다면, 서로에 대한 무관심이 사라질 것입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더욱 더 솔직하고 깊은 나눔을 할 수 있는 가족이요 한 몸이 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세족을 통해 교회 리더십의 표본도 정하셨습니다. 그것은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타파하고 섬김의 리더십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스스로 종이 되어 섬김의 리더십을 보이셨기에 우리도 그런 리더십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 섬김의 핵심은 서로의 죄와 허물을 씻어주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세족식에서 보여준 리더십입니다. 당시 베드로는 이러한 리더십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훗날 초대교회의 리더가 되어 스스로도 섬김의 리더십의 본을 보일 뿐 아니라, 교회 리더십에게도 이러한 섬김의 리더십을 권면하는 예수님 닮은 리더가 되었습니다 (벧전5:2-4). 우리도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닦으신 리더십을 교회에서 먼저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세상에도 이를 적용해야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에게 놀라운 상급이 준비될 것이며 여러분을 통해 주변이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찬과 세족은 이와 같이 놀라운 신비가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이 있기에 엄숙하고 감동적이며 진지해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죄가 씻김 받고 우리 공동체가 한 몸이 되며 공동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기쁨이 있는 자리입니다. 이 기쁨의 바탕에는 예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이 내 마음을 변화시키고, 공동체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놀라운 은혜가 우리 공동체 안에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 질문 1. 세족식에 대한 평소의 생각과 오늘 말씀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점이 있다면 나눠보세요. 2.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섬기실 때 예수님이 보이신 세족의 의미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나눠보세요. 3. 성찬 공동체는 한 몸이 되었다는 점이 여러분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요? 4. 나의 리더십 스타일과 예수님의 리더십 스타일을 비교한다면 어떻게 말하고 싶으신가요? ![]()
제목: 행함 “4” 인내와 기도
본문: 야고보서 5:7-20 오늘로서 야고보서의 말씀을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야고보의 실천적인 말씀을 통해서 21세기에 사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돌아봐야 하는 구체적인 교훈들을 살펴보았는데요, 오늘은 “인내와 기도”라는 주제로 그 대미를 장식하게 되었습니다. 인내와 기도는 둘 다 쉽지 않은 주제입니다. 특히, 청년의 시기에는 감성이 앞서고, 판단도 빠르고, 행동도 빠른 시기라 일을 추진하는 데에는 큰 힘을 받지만, 원치 않는 돌발상황이나 반대에 부딪히고 불확실성이 늘어갈 때 쉽게 지치고 포기도 빠르기 쉽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그 본질이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잘 받으려면 가장 중요한 덕목이 인내입니다. 야고보의 때나 지금이나 기다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기다림과 짝을 이루어 같이 가는 한 가지를 가지라고 강조합니다. 그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소망이 있어야 오랜 기다림을 참을 수 있습니다. 마치 농부가 추수를 소망하며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듯 장차 하나님이 하실 놀라운 일들을 소망함으로 인내를 이뤄야 합니다. 우리가 겪는 어려움들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졸업이 다가오는데 직장이 안될 때, 논문 마무리해야 하는데 여전히 원하는 데이터가 안 나올 때, 비자와 영주권 신청을 해 놓았는데 여전히 소식이 없을 때, 오랜 시간 배우자, 가족 구원, 더 나은 커리어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데 아무 소식도 없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바로 그 때가 하나님의 은혜를 바랄 때입니다. 소망으로 인내할 때입니다. 농부가 추수 때 귀한 열매를 바라듯, 좋은 열매를 상상하며 인내할 때입니다. 여러분이 원하시는 것이 귀하면 귀할수록 더 오래 인내해야 합니다. 내가 소망하는 것이 나의 탐욕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바라보며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인내의 시간을 이겨내기 위해선 그 일에만 몰두하기 보다 일상을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자세가 지혜롭습니다. 무언가를 간절히 소망할수록 그 소망에만 함몰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일상의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오랜 기도에 응답할 것입니다. 야고보가 인내와 함께 강조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기도에서 나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엘리야는 놀라운 능력을 베푼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도 하였고, 3년반 동안 안 오던 비를 오게도 하였으며, 사르밧 과부의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도 하였고, 그의 죽은 아들을 살려 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까마귀가 날라 준 음식으로 연명하였으며,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갔습니다. 이런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음을 야고보는 강조합니다. 이 말은 우리도 엘리야와 같이 놀라운 일들을 경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수단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서 이처럼 강하게 역사하셨을까요? 야고보가 주목하는 것은 그의 기도가 “의인의 기도”였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16) 따라서, 우리의 기도가 역사하는 힘이 큰 기도가 되기 위해선 먼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의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성경에 의로 번역된 단어는 “관계적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가 올바른 상태, 창조 목적에 부합한 상태에 있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의인입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의인인지를 주께서 가늠하신다는 말이 됩니다. 노아는 당대 의인으로 평가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홍수가 올 가능성이 전혀 안보여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일이니 그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방주를 짓고 모든 생명체를 방주에 보존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인이 되는 것은 다음 세 가지가 핵심입니다: 1) 하나님의 관점 2) 믿음 3) 순종. 인간 간의 관계에서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십계명), 타인을 사랑으로 대하고 (예수님), 어렵고 고통받는 이웃을 보호하고 그 필요를 채우는 자가 의인 (율법)입니다. 이 두 관계가 의로운 상태가 되면 우리 기도가 놀라운 역사를 불러 일으키는 기도가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기도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첫째, 나의 원대로 하는 기도에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하는 기도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기도를 할 때는 나의 원대로 기도하게 되지만, 기도가 점점 깊어지고 기도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에 맞게 기도하는 것이 바른 기도입니다. (사도바울 사례) 둘째, 내가 간구한 바를 확실히 믿는 기도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가장 아름답게 바라보시는 인간의 행위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내가 구한 바를 주께서 이뤄 주실 것을 확실히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기도를 제대로 하고 나면 근심이 사라지고 평강이 찾아옵니다. 다만, 이것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확신이나 긍정의 힘과는 구분됩니다. 가장 큰 차이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였는가입니다. 능력있는 기도의 마지막은 셋째, 순종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의 마음이 있는지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을 때 하나님은 그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순종이 파워풀한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이 순종을 통해 온전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결코 반응적, 비적극적 자세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와 권능을 신뢰하기에 그 능력이 내 삶에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가장 적극적이 기도입니다. 이러한 능력의 기도를 경험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나눔 질문 1. 나는 오래 참는 것을 잘 하는 사람입니까? 최근에 겪은 경험을 나눠보세요. 2. 인내를 위해 소망을 갖고 일상의 소소한 기쁨을 누리라는 권면이 내게 어떻게 다가오는지 나눠보세요. 3. 내 기도는 나의 관점으로 하는 기도와 하나님의 관점으로 하는 기도 중 어디에 더 가깝나요? 4. 나는 나의 기도를 하나님이 듣고 계시고, 응답해 주실 것을 확신하나요? 5. 내 기도한 방향과 다른 길로 응답해 주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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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청년부 예배오후 2시 (청년부 예배실) Archives
July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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