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성령의 사람, 바울
본문: 행 13:4-12 지난 주 말씀에서 우리는 바울이 회심한 후 약 10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친 후에야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음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 시간동안 그의 신학과 내면이 정립되고 다듬어졌으며, 사역의 내외적 환경도 무르익었습니다. 이제 그가 안디옥 교회에서 약 1년간 사역을 한 시점이 되었을 때 성령님께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안디옥 교회는 당시 세워진 여러 교회 중에서 건강하고 복음사역의 역사가 왕성한 교회였으며, 이 교회를 통해 놀라운 복음전파 사역이 시작됩니다. 특히 안디옥 교회는 다양한 인종과 언어와 문화가 잘 어울어진 교회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안디옥 교회는 이민교회의 좋은 사례가 됩니다. 그 교회에 핵심 리더 5인이 있었는데 이들은 매우 독특한 출신과 배경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든 다름을 극복하고 성령 안에서 하나되는 연합을 이뤄냈습니다. 그들이 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주님은 그들을 이방 선교의 중심 교회로 우뚝 세웠던 것입니다. 성령님은 이들에게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서 이제 시작될 특별한 일을 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그 내용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였고,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유명한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이었습니다. 이 여행에 바울과 바나바, 바나바의 조카인 마가 요한이 이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구브로 섬 (Cyprus) 였습니다. 구브로 섬은 바나바의 고향이었으며, 당시 로마제국의 관할 아래에 그리스계 원주민들과 유대인들 이주자도 꽤 많은 곳이었습니다. 그 곳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먼저 유대인 회당들에서 복음을 전한 후, 섬 중앙부를 따라 교통과 행정의 중심지인 바보 (Paphos)에 도착합니다. 거기서 섬의 로마 총독인 서기오 바울을 만납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지혜가 있는 자로서 하나님에 대한 영적 호기심이 있었기에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 옆에는 바예수 (혹은 엘루마)라고 불리는 거짓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가 총독이 믿지 못하도록 갖가지 방해를 하였습니다. 이에 바울이 바예수를 강하게 영으로 꾸짖자 주께서 그를 쳐서 눈이 멀게 됩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총독은 예수를 주로 영접하게 됩니다. 이어 이들은 배를 타고 다음 장소인 버가로 이동하게 됩니다. 이 말씀 중에 우리가 눈 여겨 봐야 할 대단히 중요한 대목이 있는데, 이 모든 일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 결과였다는 점입니다. 먼저,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세우고 보낸 것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그들은 금식까지 하면서 기도할 때 성령의 음성을 들었고, 음성을 들은 후에도 금식하며 그들을 선교사로 세우고 파송합니다. 이처럼 성령의 음성은 (1) 전심으로 기도할 때; (2) 교회가 하나될 때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전심으로 주님께 올려 드리는 기도는 주께서 반드시 들으시고, 기억하시며, 응답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들은 각자의 다름을 뛰어 넘어 온전히 한 마음으로 똘똘 뭉쳤습니다. 교회가 하나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무나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골방 기도는 흔히 개인기도의 모범을 칭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반면, 다락방 기도는 몇몇이 연합하여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공동체 기도의 모범을 부르는 단어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골방 기도가 다락방 기도로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나뉜 곳에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지도 말씀하지도 않습니다. 이는 삼위의 하나님의 연합으로 우리를 초청하신 주님의 뜻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나와 다른 생각과 모습을 한 사람들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가 되는 것을 중요시 여기고, 항상 그럴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이들이 첫 전도여행 장소를 정하는 과정도 온전한 성령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구브로에 갔다고 기록합니다. 이들은 어떻게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을까요? 초대교회 당시는 하나님의 음성과 환상을 직접 보고 듣는, 종종 선지자로 표현되는 특별한 영적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꽤 많았습니다. 바울도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아마도 바울 일행은 성령님의 강력한 인도하심을 영적으로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비록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그 때보다는 이런 역사들이 적은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할까요? 이에 대해 옥한흠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공동체가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전심으로 기도하면 그 그룹 안에서 일부를 성령님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성령님이 새로운 지혜, 참신한 아이디어, 성경적 가치관을 넣어 주십니다. 이 말을 들으면 모든 사람이 그 말에 깊이 공감하며 좋게 여기는데 이는 우리가 다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에 추가해서, 그 제안이 성경적인지 가만히 묵상할 때 모두의 마음에 평강이 임하면 그것은 성령님께서 확신을 주시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처럼 기도하고 순종하는 공동체에게 성령님은 자신의 뜻을 밝히십니다. 바울이 거짓 선지자를 꾸짖는 장면에서도 성령의 역사임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성경은 당시 바울이 성령이 충만한 상태였음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하나님의 시각으로 사람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의 눈에는 바예수가 마귀의 자식으로 보였고, 그 위에 주의 심판의 손이 임한 것을 본 것입니다. 그는 주님이 그를 치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주의 손이 너를 맹인이 되게 하리라”고 자신 있게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시력을 잃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베푼 첫 영적 기적인데, 아이러니하게 이는 바울 자신이 약 10년전 다메섹 도상에서 직접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온전히 성령을 따른 결과 구브로의 로마 총독이 주를 믿게 됩니다. 지금도 Cyprus는 주변의 이슬람, 유대교 사이에서 기독교인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확인되듯 이제 사도 바울은 완전히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10년의 기다림의 시간은 그를 놀랍게 성령이 역사하시는 도구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후는 성령을 좇아 사는 것이 제자로 사는 방법입니다. 우리도 성령의 임재 가운데로 깊이 들어가서 삶과 사역에서 성령의 기적을 경험하는 귀한 주의 도구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나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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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울의 준비
본문: 행9:19b-25 지난 시간 우리는 사울이 어떻게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회심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의 드라마틱한 회심만큼이나 그의 회심 이후의 행보도 특별합니다. 그는 약 3일간 일시적으로 눈이 멀어 앞을 보지 못하다가 아나니아를 통해 다시 보게 된 후, 그 즉시 다메섹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이 부분을 보면 그가 빠른 결단력과 강력한 행동력을 갖고 있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혼란스러운 모든 부분이 내면적으로 다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사울은 자신이 확신한 바 예수가 메시아임을 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를 듣는 사람들은 당혹스러워했습니다. 일부는 그가 예수 믿는 자를 잡기 위해서 트릭을 쓴다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더 자신 있게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전파합니다.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그는 그 후 아라비아에서 3년의 시간을 보냅니다. 이어서, 다메섹에 돌아왔다가 그를 죽이려는 유대인들을 피해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내려와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대적들이 그를 죽이려고 하자,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목숨만 건지고 그의 고향인 다소로 갑니다. 그 후 그는 다소에서 굉장히 오랜 시간을 보냅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안디옥 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바나바가 바울을 동역자로 부릅니다. 거기서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때가 바울이 회심하고 약 10년이 지난 때라고 말합니다. 이 기간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준비시킨 시간이었습니다. 먼저, 그의 옛 신념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완전히 바꾸신 시간이었습니다. 이 시간동안 바울은 옛 신념인 율법주의를 벗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바울은 하갈을 아라비아 시내산의 율법에 매인 종의 어머니로 묘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이러니하게 그는 아라비아에 머물면서 아라비아의 율법의 한계를 깨달은 것입니다. 만약 아라비아에서의 시간이 없었다면 그가 로마서에서 강조한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신학은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후세에 로마서에 영감을 받은 수많은 종교개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준비기간의 파급효과가 얼마나 컸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 시기는 또한 그의 내면을 준비하고 다듬는 시간이었습니다. 유대교의 유력한 차기 지도자인 바울이 회심한 이후 그의 기득권은 모두 사라지고, 오히려 지적으로는 자신과 비교가 되지 않는 사도들보다 낮은 위치에서 사역을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바울은 항상 자기 자신을 사도 중 가장 낮은 자, 모친의 배에서 8개월만에 난 자라고 겸손히 소개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겸손함은 기다림의 시간에서 나왔습니다. 그의 초기 사역이 성공적이었다면 그는 이런 겸손함을 배울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추가적으로 그는 교회를 핍박한 자였습니다. 이것은 엄연한 죄였습니다. 바울은 이 죄를 솔직히 인정하고, 피해를 입었던 자들에게 사과하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했습니다. 동시에 이 죄를 회개한 후에는 과도한 죄책감에서 벗어나야 사역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전혀 사과의 자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훗날 그의 글에는 이 죄를 그가 얼마나 부끄럽게 생각하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지만 죄책감을 건강하게 극복하고 은혜로 주신 주님의 소명을 끝까지 순종하려는 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감정적 준비는 오랜 시간을 통해서만 형성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이 기간동안 하나님은 바울의 내면도 잘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회와 외부적인 환경이 준비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워낙 주목받던 바울의 회심사건은 유대인과 기독교인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상태로 그의 사역이 열매 맺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10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교회적으로나 환경적으로 그의 사역에 우호적인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기간은 바울 자신을 위해서도, 바울의 사역 환경을 위해서도 꼭 필요했던 준비기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가장 잘 아시기 때문에 가장 적합하게 우리를 준비시키십니다.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준비하심을 잘 받으려면 다음 세 가지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첫째, 끝까지 믿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10년이라는 시간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바울은 자신이 받은 소명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기간동안 주님이 주신 소명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태도가 바울을 위대한 사도로 만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따르며 순종해야 합니다. 주도적, 거침없고, 전진하는 스타일인 바울은 전혀 예상치 않은 사람들의 태도와 사역이 막히는 일들이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 때, 바울은 나쁜 상황까지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순종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려면 때로는 나쁜 일도, 때로는 침묵도, 때로는 오랜 기다림도 하나님의 인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반전의 하나님께서 놀라운 반전을 통해 슬픔을 기쁨으로, 절망을 환희로, 패배를 기적의 승리로 바꾸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셋째,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타이밍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타이밍이 다릅니다. 크로노스는 우리가 아는 시간, 즉, 지구의 자전과 공전, 역사의 흐름과 같은 시간입니다. 반면, 카이로스는 기회, 때, 무르익은 타이밍, 즉, 하나님이 주시는 때입니다. 단어 자체가 다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카이로스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세상 사람들과는 기다림의 단위 자체가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보통 몇 십년 걸립니다. 우리의 인내심이 이 정도가 되어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위 세가지를 통해 인생 최고의 조련가이신 하나님의 준비하심을 받아 하나님이 쓰시는 귀한 일군 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질문
제목: 바울의 회심
본문: 행9:1-7 여러분은 혹시 생일날 아무도 안 알아줘서 섭섭했다가 나중에 서프라이즈 축하받아서 눈물나게 고마운 적 있었나요? 우리는 왜 생일을 이렇게 소중하게 생각할까요?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나온 뜻깊은 날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영적 생일은 언제입니까?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 날이 바로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날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바울 개인에게뿐만 아니라 교회사적으로 봐도 큰 획을 긋는 기념비적인 사건이 됩니다. 사울(바울)은 다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최고의 교육 도시에서 지성을 키웠습니다. 후에 그의 부모님은 그를 예루살렘으로 데려가서 가말리엘이라는 당대 최고의 랍비 밑에서 율법을 배우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그는 유대교와 헬레니즘과 라틴문화에 정통하고,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라틴어에 능통한 유능한 젊은이로 자랐습니다. 이런 배경은 오히려 그가 기독교를 반대하고 예수를 적대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의 제한된 율법적 지식으로 볼 때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며, 기독교는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해치는 이단으로 오해되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 사건 이후 교인들이 핍박에 못 이겨 흩어졌는데, 오히려 이것을 계기로 더 넓은 곳에 기독교가 전파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울은 이것에 분노하여,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원하여 기독교인들을 체포하기로 결심하고 이를 위해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서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 떄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은 이미 완전한 하나님의 영광을 입으신 상태셨기 때문에, 태양빛보다도 더 밝은 빛과 함께 나타나셨습니다. 그 빛에 사울은 땅에 고꾸라졌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26장에 보면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는 저항할수록 자기만 고생스럽다는 뜻입니다. 이어 주님은 사울에게 다메섹의 직가라는 거리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거기서 그는 주님이 예비하신 아나니아를 만나게 됩니다. 아나니아는 다메섹의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한 자를 죽이러 오던 인물이 사울인데, 하나님은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안수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동시에 사울에게도 아나니아라는 자가 와서 안수하면 다시 보게 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일은 둘 다 기도하는 중에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신뢰하지 못하였지만, 주님이 그를 택한 그릇이라고 말씀하시자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순종합니다. 그래서 그는 사울에게 가서 안수와 세례를 베풀고 형제로서 그를 대합니다. 순종의 사람을 통해 사울은 새 사람이 됩니다. 다메섹 사건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세 가지 중요한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이 사건에서 바울이 한 역할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울을 찾아왔습니다. 아나니아를 준비시키신 것도 주님이셨습니다. 예수 믿는 자를 죽이려 가고 있는 사울을 주께서 찾아 오신 것은 “은혜”가 아니고서는 그 어떤 말로도 설명이 불가합니다. 이것을 너무 잘 알고 있던 바울은 ‘모든 것이 은혜’임을 반복해서 고백했던 것입니다. (엡3:8, 갈1:15, 고전15:10) 이처럼 바울은 다메섹 사건을 기억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깊이 깊이 침잠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둘째, 사도 바울은 이날을 계기로 완전한 변화를 받았고, 초지일관 변화된 삶을 살아냈다는 점입니다. 그날 이후 그는 180도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극적인 변화를 받을 수 있었던 건 다메섹 사건 자체가 워낙 센세이셔널한 것도 있지만, 그가 이 사건을 굉장히 겸손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그가 열린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평생의 신념과 철학을 바꾸도록 도전하셨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기적을 경험해도 평생의 신념은 잘 안바뀝니다. 하지만 사울은 겸손하게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평생의 신념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채 오직 하나님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그 때, 아나니아를 통해 주께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고, 앞으로 많은 고난을 받게 될 것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평생의 소명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태도가 그를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혁시켰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초지일관 그 마음과 태도를 평생 유지했다는 점입니다. 그에게 다메섹 사건은 영적 삶의 출발점(Ground Zero)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힘들고, 핍박받고, 흔들릴 때마다 바울은 다메섹 사건을 회상하며 다시금 영적인 중심을 잡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은 닻을 내린 배와 같이 파도에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셋째, 바울은 이 사건을 감격과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이 사건을 언급할 때마다 감격스러워했습니다. 그 날이 그의 ‘인생 사명 받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내 삶의 목적을 깨달은 자가 가장 행복한 자입니다. 인생 최대의 기쁨은 내 소명 끝까지 감당했을 때 느껴지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많은 고난 속에서도 다메섹을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진정한 기쁨이 있는 삶, 세상이 줄 수도 없는 진정한 소망이 있는 삶, 이런 진짜 승리자의 삶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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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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