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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지혜서의 기반, 잠언 1 (잠 1:1-7)
성경에서 욥기, 잠언, 전도서를 지혜서라고 합니다. 잠언의 뜻은 영어로 Proverbs 격언, 속담, 금언, 교훈이란 뜻입니다. Proverb는 pro(앞) + verb(동사, 말) 로서, ‘미리하는 말’을 뜻합니다. 히브리어 의미에는 Proverb 외에도, comparison의 의미가 더 있습니다. 한문에서, 잠언의 잠(箴)은 바늘, 침을 말합니다. 즉, 잠언은 찌르는 말, 무감각해진 우리 마음을 찔러 일깨우는 말이란 뜻입니다. 잠언의 특징을 보면, 우선, 이야기(서사구조)가 없고, 꿰뚫는 맥락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둘째, Proverb가 앞서 하는 말이라는 뜻은, 나쁜 의미로 너무 당연한 이야기, 즉, 잔소리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셋째, 잠언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깨달은 지식, 즉 실천적이고 개인적 지식을 다룹니다. 어쨌든, 잠언은 수많은 인생들을 바로잡아준 귀한 지혜의 글입니다. 잠언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잠언은 사람들간의 관계 속에서 생성되어진 책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어떤 일을 하든 항상 하나님을 인식하는 백성들이었기 때문에, 잠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학적 성찰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수천년간 하나님과 관계하면서 쌓여진 보석 같은 지혜들이 담겨있는 책입니다. 따라서, 잠언은 단순한 지혜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관련된 지혜집입니다. 잠언의 저자는 솔로몬 뿐 아니라 지혜있는 자(들), 아굴, 르무엘 등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 솔로몬이 잠언 전체를 꿰는 중요한 인물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왕상 4: 29-34은 솔로몬이 얼마나 특별한 지혜를 받은 사람인지를 잘 드러내 줍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특별한 지혜를 주신 것은, 솔로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본문 말씀인 잠 1:1-7은 잠언 전체의 아웃라인을 잡아주는 중요한 서두 부분입니다. 1절에서 솔로몬이 다윗의 아들임을 강조하는데, 이는 다윗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대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삼하 7:12-16) 따라서 잠언은 작게는 이스라엘 공동체, 크게는 하나님의 백성된 모든 공동체에게 주시는 지혜의 말씀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잠언이 비록 솔로몬때 쓰였지만, 그 기틀은 다윗이 닦았음을 고려할 때, 잠언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더 크게는 인류 전체의 역사를 통해서 보편적으로 전수된 지혜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이란 표현에서는, 이스라엘의 참 왕이신 하나님에 관한 지혜의 글이 잠언이라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잠언이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온 말은 맞지만, 인간의 이성을 부정하는 글은 아닙니다. 합리적 판단과 추론, 상상을 가능케하는 이성도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잠언을 읽는 우리도 이성도 배제하지 말고, 적극 사용해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잠언의 목적은 2-3절에 나와 있습니다. 지혜(호크마)는 앎과 관련있는 지식과는 다르게, 실용적인 지혜를 말합니다. 특히, 잠언의 지혜는 하나님이 지으신 근원적 질서와 관련된 지혜를 다룹니다. 훈계는 책망하는 것, 꾸짖는 것을 말하는 데 그 목적은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기 위함입니다. (훈계를 싫어하는 현시대 이야기) 명철은 사물이나 어떤 현상의 핵심을 간파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오징어게임, 박해수 사례). ‘지혜롭게’로 표현된 원어적 뜻은 분별력 있다는 것입니다. 분별력은 ‘때를 구별하는 것’ 입니다. (일상에서 분별력의 중요성 예화) 전체상황을 파악하는 능력과 내가 처한 상태를 인지하는 자아인식능력이 동시에 요구됩니다. ‘공의(right)롭게’는 누군가의 고통을 보고 함께 마음 아파하는 공감능력과, 평등에 입각한 정의를 바라는 마음을 말합니다. ‘정의(just)롭게’는 저울을 올바로 재듯이 도덕과 규범적으로 바른 판단을 말합니다. ‘정직한 삶’이란 곧은 길을 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소중한 지혜들을 주시기 위해서 잠언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말씀이다. 잠언의 결론이 본문 7절에 나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는 대목입니다. 경외함은 ‘하나님의 크심을 알고, 나의 작음을 깨달아 겸손해져서, 외경스럽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경외심이야 말로 사람을 사람되게 만듭니다. 경외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신비를 보게 만듭니다. (밥 한 숟가락 예) 경외심이 있는 사람은 열린 마음으로 모든 지혜를 받아들입니다. 배움에 대한 유연한 마음이 지혜를 쫓는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배움은 낯선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잠언을 공부하는 것은 그런 세계를 조금이나마 맛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여호와의 경륜과 섭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반면,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합니다. 이 차이는 내 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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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아들에게 위임된 권위 (마 21:33-44)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3년 가까운 공생애를 마무리하시고, 드디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지시는 시기가 가까워 올수록 유대인들과 첨예하게 갈등하셨습니다. 그 분은 마치 죽기 위해서 작정하신 분같이 그들과 대립하셨습니다. 때론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날이 서서, 마치 정치권에서 서로 싸우는 듯한 말들이 떠오를 정도입니다. 마태복음 21장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그 분은 초라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하며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렇게 들어오신 예수님이 처음으로 한 행동은, 그 곳 성전에서 장사하고 돈 바꿔 주는 사람들을 쫓아 내신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 지도자들이 승인해 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 행동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분노를 샀습니다. 다음 날 아침 예수께서 다시 성에 들어오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자, 그들이 예수께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들은 단순히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라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라고 되물으셨습니다. 그들이 “모르겠다.” 고 하자, 예수께서도 자신이 무슨 권세로 이 일들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의 말씀을 연속해서 해 주시고, 오늘 본문은 그 중 두 번째 비유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우회적 답변입니다. 이 비유는 특별히 예수님께서 유대 지도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신 것이 확실합니다. 그것은 이 비유의 곳곳에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성경 말씀을 포함하셨기 때문입니다. 먼저,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사 5:1-7) 근데, 한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그럼 과연 이 악한 소작인들이 누구냐 하는 문제입니다. 렘 35:15에 보면, 구약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돌이키시기 위해 자신의 예언자들을 끊임없이 보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잔혹하게 죽여왔습니다. 그 행동들이 악한 소작인들의 행동과 너무나 똑같습니다. (35절) 예수님은 그들이 이 악한 소작인들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직 이 비유를 해석하는 가장 큰 난관이 남아 있습니다. 바로, 그 주인의 ‘아들’이 누구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 아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그 아들은 이 포도밭에 대한 상속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38절) 아들은 이 주인의 전부였습니다. 주인은 이 포도밭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걸었습니다. 따라서, 이 아들은 주인의 화해의 마지막 수단이었습니다. 만약, 아들마저 그들이 죽인다면 그들에게는 화해의 마지막 기회가 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갖고 계신 성품이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영원히 참기만 하는 분은 아니십니다. (벧후 3:9-10) 둘째, 아들의 처음 모습과 나중 모습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처음 이 아들은 악한 소작인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조금은 무기력해 보이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나중 모습은 이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42b, 44절) 이 말씀은 구약 시편 118:22-23과 이사야 8:14-15, 다니엘 2:44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그 아들의 마지막은 그를 대적하는 모든 자들을 깨뜨리고 부숴 멸망시키는 공의의 심판자의 모습입니다. 이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어마 어마한 도전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수님이 진짜 권위자고, 그들은 그 권위를 훔치려는 거짓 권위자들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유대인들 마음 속에 예수님을 죽이려는 생각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께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이 될 것이라고 예수님이 강조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도 아직 회개로의 기회는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이 니고데모입니다. 예수님께서 책망의 말씀을 해 주고 계시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심판의 길을 선택합니다. 왜냐면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지위를 버릴 마음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메시아에 대한 해석도 재고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대접받기 좋아하고, 이중적이었고, 이스라엘에 대해 권위자 행세를 해 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내가 누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들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위탁받은 청지기들일 뿐입니다. 이 마음 간직하시는 겸손한 청지기의 사명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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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욥의 이야기 3 (욥 38~42장)
오늘은 욥기 시리즈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오랫동안 침묵하시던 하나님이 드디어 그 모습을 나타내시고 욥에게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답변은 38장에서 41장까지 걸쳐서 나오는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지를 강조하십니다. (38-39장)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는 도저히 극복되지 않는 인식적 차이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알수도, 그 범위를 이해할수도 없다고 하나님은 강조합니다. * 번개 이야기, 바다 이야기, 별자리 이야기, 동물 이야기 두번째로 하나님은 ‘공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40-41장) 하나님은 세상의 ‘공의’를 유지하려면 공의를 집행할 수 있는 권위가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 세상의 공의를 유지하려면 정의를 유지하고, 부정의를 심판할 힘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 권위가 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만 있다고 말하십니다. (욥 40:8-9)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런 힘이 없습니다. 그런 우리가 권위자에게 정의를 따지는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한 가지 감사한 것은 ‘공의’가 우리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속성 중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공의로우시고, 그 공의를 온 우주 가운데 집행하실 수 있는 권위를 갖추신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의의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태도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 리워야단 이야기 (41장) 그러자, 욥이 하나님께 반응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크심을 말로만 듣다가 이제 직접 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게 됩니다. 그리고 욥은 하나님의 공의를 믿고 주님에 대한 신뢰가 회복됩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작은 생각으로 하나님을 판단한 것에 대해 전심으로 회개합니다. 그러자 바로 하나님은 욥을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세 친구와의 관계를 회복시키십니다. 두번째로 욥의 모든 소유, 지위, 자녀, 가정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욥의 모든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욥기는 끝이 납니다만, 우리에게는 두 가지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첫째, 과연 욥은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한것인가 입니다.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 독자들에게 맡기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욥의 말년에 주신 복은 욥이 고생한 것, 시험을 통과한 것에 대한 보상인가요? 이 질문 역시 대답하기 쉽지 않은 대답입니다. 욥이 아무 이유없이 고난당한 것을 기억한다면, 그가 복을 받은 것도 특별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닐까요? 여기서 욥기의 핵심적인 지혜가 나옵니다. 인생의 생사화복이 꼭 우리의 믿음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신자는 모든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고 욥기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은 끝까지 자기를 두고 벌어졌던 천상회의에 대해서 알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가 배운 것은 고난과 환란의 원인이 뭔지가 아니라, 어떠한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이 일을 겪고 난 욥은 분명히 인생의 어떤 고난과 축복 앞에서도 그것을 베푸시는 궁극적인 하나님을 더욱 더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욥기가 우리에게 주는 귀한 지혜입니다. 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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