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산상수훈 4 - 기도 (마 6:5-8, 7:7-11)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우리가 흔히 범하기 쉬운 잘못된 기도의 모습들을 바로잡아 주시면서 우리에게 기도의 샘플을주셨는데, 주기도문이 그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기도는 말 그대로 기본중의 기본이요, 핵심중의 핵심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요 영적인 호흡이라고 말 할 만큼 너무 중요한 요소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토록 중요한 기도에 대한 우리의 거룩한 열망이 일어나길 축복합니다. 누구를 사귄다는 것은 대화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도 더 많이 대화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더욱 잘 알아가고, 더 친밀해지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바른 길은 있어도 왕도는 없습니다. 결국, 더 자주, 더 많이 기도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기도습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존재이시며,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데이트는 대화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성경 말씀을 통해 알아갑니다. 이는 데이트 상대를 그 사람의 언행으로 알아가는 것과는 다소 차이가 나는 점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려면 말씀이 필요하고, 말씀 읽으려면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를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해보면 1) 관계 중심적 기도 (relation-centered prayer)와 2) 간구 중심적 기도 (petition-centered prayer)로 나눌 수 있습니다. 관계 중심적 기도는 하나님이 내게 어떤 분이고, 나는 그 분께 어떤 존재인지가 확인, 확신, 확정되는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의 가장 큰 유익은 마음의 안정감과 평안입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7장에서 이런 기도의 본을 많이 보여주셨습니다. 즉, 하나님과 예수님이 어떤 관계이신지를 기도를 통해서 선포하셨습니다. (요 17:5, 10) 관계 기도가 정말 기쁨이 넘치는 기도이며, 성령을 체험하는 놀라운 기쁨이 있는 기도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이를 “주관성을 뛰어넘은 이성적 신비주의 (Intelligent mysticism)”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추가적으로, 관계 기도를 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 알게 되는 나의 모습은 놀랍토록 존귀한 모습입니다. 스스로 놀라울 정도입니다. 이처럼 관계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정립되면 쌍방향 기도를 해 보시길 권면합니다. 내가 일방적으로 말하기를 멈추고, 우리의 창조주이자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도록 시간을 드리는 기도 말입니다. 이를 경험하면 전혀 새로운 기도의 맛을 느끼시게 되실 것입니다. 처음에는 기도만으로 하나님과 관계기도를 하기 어색하거나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성경말씀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내게 하신 것으로 붙잡고 기도해 보시길 권면 드립니다. (예, 습 3:17) 간구 중심적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나의 반응입니다. 즉,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말씀하신 약속들을 내가 믿고, 그대로 실천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반드시 응답해 주시겠다고 확실하게 약속하십니다. (막 11:24, 마 7:7, 마 7:11) 때론, 과장처럼 들릴 만큼 강하게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한다면, 우리는 기도할 이유와 동기를 찾게 될 것입니다. 간구기도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먼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리고 나의 개인 간구를 위해’ 입니다. (마 6:33)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란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라의 3요소는 영토, 국민, 주권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 나라가 된다는 것은 이 땅이 하나님의 영토,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나라, 직장, 학교)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 지켜지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 기독교인들은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께서 일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내 개인을 위한 기도는 나의 필요에 대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흔히 기도제목을 나누면 대부분 이 기도에 해당하는 기도제목을 나눕니다. 이 기도도 분명 필요한 데, 앞서 살펴본 기도가 먼저 선행된 후 이 기도를 하시기를 권면드립니다. 나의 필요를 위한 기도는 ‘필요’가 그 기준이 됩니다. 필요 이상으로 구하는 기도는 자칫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가 되기 쉬운데,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약 4:3) 간구 기도에도 말씀이 꼭 필요합니다. 말씀이 없으면 내 소견대로 구하는 기도가 되기 십상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이지 내 뜻을 이루기 위하여 떼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편의상 관계 기도와 간구 기도를 구분했지만, 사실 이 두 기도는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습니다. 보통, 관계가 바로 세워졌을 때 올바른 간구 기도가 나옵니다. 그래서, 순서적으로 보나 중요도 면에서 볼 때 관계 기도에 우선 집중하시고, 그 후 주님 주시는 마음과 말씀에 따라 간구 기도를 하는 습관을 키워가는 것이 영적으로 매우 유익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요 17:21) 주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도 이렇게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관계기도에 해당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등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로 세워진 사람은 하나님의 높음을 찬양하고 나의 죄를 자백합니다. 그래서 찬양과 회개는 관계기도에 더욱 연계되어 있습니다. 간구기도에 해당하는 부분은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통해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기도를 더 하려면 기도가 주는 기쁨을 맛보아야 합니다. 기도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엄청난 권위와 능력의 약속을 느껴야 합니다. 기도야말로 시대를 초월하여 한 사람이 온 세상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천국문 열쇠입니다. 이를 사용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나눔을 위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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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신앙공동체를 떠남 (창 38:1-5, 24-26)
오늘 우리가 묵상할 본문은 창세기 38장입니다. 창세기 37장과 39장은 요셉 이야기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사이에 있는 38장은 갑자기 ‘유다 가정’이야기를 합니다. 근데, 그 내용이 참 민망하고 아름답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깊이 숨겨진 하나님의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를 발견하는 복된 공동체 되길 축원합니다. 유다는 요셉을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아 넘길 때 주도적 역할을 합니다. 그 일 때문에 아버지 야곱은 너무나도 슬퍼했습니다. 그 일 후 유다는 가족 형제를 떠나 아둘람이라는 이방지역으로 가서 오랜 시간 혼자 살아갑니다. 요셉의 일이 그에게 큰 트라우마가 된 것입니다. 그는 단 하루라도 이 집안에 있느니 혼자 사는게 낫다고 판단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가정 공동체를 떠난 건 매우 잘못된 결정이었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어떤 행동을 해도 아무런 제약도 없게 되었습니다.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환경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입니다. 악한 길로 안내를 맡은 ‘히라’라는 친구가 그와 함께했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이런 친구를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유다는 히라와 거하는 중에 한 이방 여인을 만나 동침하여 아들 셋을 낳습니다. 그는 큰 아들 엘(에르)이 장성하자 친히 이방여인 다말을 며느리로 데리고 옵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이어진 신앙교육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신앙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엘은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악했고, 하나님은 그를 데려가셨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둘째 아들에게 형수를 취하라고 명합니다. (형사취수제, 신 25:5-6) 그러나, 둘째 아들 오난은 이 일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는 완전한 동침을 하지 않았고, 이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악하였습니다. 결국 이 일로 말미암아 오난마저 죽게 됩니다. 유다의 셋째아들 셀라는 아직 나이가 어렸습니다. 유다는 행여나 그마저 죽을까 걱정하여, 다말에게 친정집에 가서 수절하고 있으라고 명합니다. 이는 당시 문화나 제도상 옳지 않은 명령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유다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가족의 셋이나 운명을 달리했다면 유다는 이 문제를 영적으로 볼 필요가 있었는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유다가 아내의 장례를 치르자, 친구 ‘히라’는 그를 데리고 딤나라는 곳의 양털깎는 축제장소로 위로 여행을 떠납니다. 이 소식을 며느리 다말이 듣게 됩니다. 그녀는 베일로 얼굴을 가린 채 시아버지에게 접근합니다. 유다는 그녀를 창녀로 오인하여 그녀와 잠자리를 갖습니다. 다말은 이 일로 인해 임신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 다말이 임신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유다는 불같이 화를 냅니다. 그녀를 화형시키라고 분노의 명을 내립니다. 이 때, 다말은 유다와 잠자리를 갖을 때 받았던 물건들을 보이며, ‘이 물건의 주인이 아이의 아버지’라고 밝힙니다. 유다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잠시 후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이렇게 해서,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의 씨를 통해 쌍둥이를 낳게 됩니다. 그들의 이름은 베레스와 세라였는데, 큰 아들 베레스의 계보에서 다윗과 메시아가 나오게 됩니다. 메시아 계보에 다말도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마 1:1-3) 훗날 룻기는 룻을 다말에 비유하며, ‘베레스의 집’이 복된 집이라고 말합니다. (룻 4:12) 이 일 후 유다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먼 훗날, 요셉이 형들을 시험할 때, 유다는 자기 목숨을 걸고 베냐민과 아버지 야곱을 위해 희생을 자처합니다. 그가 이렇게 변한 것은 오늘 말씀의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의 문제는 그가 가족 공동체를 떠난 이유였습니다. 이제 그는 그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38장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아주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아무리 한심해 보여도, 아무리 실망스러워도, 아무리 상처가 되도, 신앙 공동체를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정교회 말고, 교회 공동체를 의미) 신앙 공동체를 떠나는 것은 오늘 유다에게서 본 것처럼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가정적으로 완전히 자멸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계속 돌아오라는 사인을 주실 것입니다. 그 사랑의 권면을 받으시고, 너무 늦기 전에 돌아오시길 축원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실수보다 크다는 사실입니다. 메시아가 부도덕한 유다의 자손에서 태어난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는 돌이키지 못할 죄인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에 더하여, 하나님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의 상처까지 완전히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이런 회복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눔을 위한 질문
말씀: 산상수훈 3 - 예수님은 율법을 없애시는가? (마 5:17-48)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분명 구약 율법을 계승하시면서 동시에 구약 율법과는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새 계명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은 6개의 구약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시고 선포하신 예수님의 새 계명입니다. 기왕이면 더 쉬워졌으면 좋겠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기존 율법보다 지키기가 훨씬 더 어려워집니다. 기존 율법이 단순히 행위만 요구했다면 (실제는 아님), 새 율법은 마음과 동기까지 요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첫번째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입니다. 예수님은 이 율법을 ‘형제에게 분노하는 사람도 심판을 받을 것이다. 또 형제에게 라가 (미련한 놈),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22) 그 속 뜻을 예수님께서는 형제 간에 진정으로 화해하고 화목하게 사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다고 설명하십니다. 인류의 첫 살인인 가인의 살인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두번째는 간음의 문제입니다. 그 근원은 우리 내면에 있는 음욕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으로 음욕만 품었다면 이미 마음으로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음욕은 우리의 은밀하고 뿌리 깊은 욕구여서 다스리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어떤 종교적, 법률적 요구보다 높은 수준의 정결함을 요구하십니다. 추가로, 죄 짓는 눈과 오른손을 잘라내는 것이 온전한 몸으로 지옥불에 떨어지는 것보다 낫다면서 죄에 대해서 강한 경계심을 가져야 함을 말씀합니다. 다음은 이혼에 관한 율법입니다. 구약에서는 아내와 이혼하면 이혼 증서를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 24:1) 이는 이혼당하는 여인을 보호하기 위한 율법이지, 남자가 이혼증서만 주면 마음대로 이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오로지 율법의 문자적 의미에만 집중한 나머지, 이를 자신들 편한대로 해석했습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의 한계입니다.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합니다. 그 다음은 맹세에 관한 율법입니다. 율법의 가르침은 ‘맹세를 어기지 말고, 특히 주께 한 맹세는 꼭 지키라’ 입니다. 당시 유대사회는 맹세가 난무하였습니다. 이는 그 사회가 신뢰가 약하고, 맹세가 깨질 가능성이 많은 사회임을 반증합니다. 맹세할 때 우리는 쉽게 과장하게 됩니다. 이에 예수님은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람 간의 관계에서 솔직하고, 투명할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도 솔직하고 정직하게 나가기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복수와 관련된 율법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과 구약에 함께 기록되었으며, 흔히 동해동형법 (해를 입힌 대로 똑같은 벌로써 상응한다)이라고 부릅니다. 이 법이 생긴 배경은 사람들이 과도하게 복수를 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복수할 때 잘 절제하지 못합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정면으로 반박하십니다. 예수님의 새 계명은,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 대고, 속옷을 가져가면 겉옷까지 주고,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주라’는 것입니다. 사실, 구약성경도 원수를 갚지 말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예, 레 19:18) 또한, 성경은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임을 반복적으로 말합니다. (시 3:7, 롬 12:19) 예수님은 사람들이 율법의 하나만 알던 것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이제 정말 어려운 새 율법을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 입니다. 여러분은 원수를 사랑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를 위해 예수님이 주신 힌트는 ‘하나님이 그러신 분’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45) 어느 목사님은 우리 진짜 원수는 사탄이지, 사탄에게 사로잡힌 자들이 아니기에 우리는 그들은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고 설명하기도 하셨습니다. 이제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까지 지키기 어려운 새 율법을 주셨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진짜로 이렇게 높은 수준으로 사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기독교 역사 중에, 또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이런 높은 기준으로 사시는 크리스챤 들이 계십니다. 존경받아 마땅한 성인의 경지에 이르신 분들입니다. 두번째 해석은, “율법주의를 타파하는 것이야 말로 율법의 완성임”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잘 지키는 게 자기의 자랑이자 상급이요, 권력의 근원이었습니다. 이를 율법주의라고 부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율법 뒤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까지 알려주면서 진짜 율법을 지키려면 이 마음까지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살아낼 수 있는 바리새인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주의적으로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제자는 구약율법과 새 율법을 다 지켜서 되는 게 아니라 “성령 받고, 변화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따르려 하는 마음자세, 이것이 이웃에게 확대되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마음자세가 생긴 자가 바로 제자입니다. 진정한 제자로 산다는 것은 꼭 성인군자가 되어야 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사랑으로 든든히 세워지고, 나와 이웃 간의 관계가 긍휼과 사랑으로 바로 세워지면 이미 제자인 것입니다. 이런 분들 중 일부는 예수님이 오늘 제시한 기준에 도달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 못한 자들도 여전히 제자입니다. 지금은 모자라도 계속해서 제자로 살아가면 주님이 감동주시고 힘주셔서 언젠가 우리도 그렇게 변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자와 제자의 차이점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과 저를 제자로 초청하십니다. 나눔을 위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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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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