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 7:13-14)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은 넓어 그곳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14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은 험해 그곳을 찾는 사람이 적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말씀을 거의 마무리하시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좁은 문’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산상수훈은 여러 가지 주제를 말씀하신 설교이지만 공통적인 패턴이 있습니다. 그것은 겉모습보다는 본질이 더 중요하고,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이 더 중요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뜻을 좇는 것이 참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란 점을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좁은 문과 넓은 문에 관한 말씀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생명으로 가는 사람이 적고, 멸망으로 가는 사람이 많다는 숫자적 개념만은 아닐 것입니다. ‘길’은 인생 전체를 상징하는 언어이기에, 좁은 문과 좁은 길은 신앙인이 평생 살아가는 마음 자세와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을 듣고 있는 청중의 대부분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인생에 있어 4가지의 지혜와 축복의 길이 있다고 배워왔습니다. 그것은 가족, 부, 명예, 종교입니다. Marcus Borg는 넓은 문이란 이 네 가지를 좇는 전통적인 삶을 말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들은 전통적으로 축복으로 여겨지지만, 예수님은 이 네 가지의 위험성을 경고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세상적인 삶 뿐 아니라, 비록 종교적이라 할지라도 그 본질적 동기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면 넓은 문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반해, 좁은 문이란 우리의 심령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고, 하나님의 뜻에 조율되어져 가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해석은 산상수훈의 모든 가르침과 정확하게 일맥상통하기에 대단히 올바른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겉으로 볼 때는 훌륭하고 경건해 보일지라도 우리 마음의 원 뿌리가 내 자아에 뿌리내리고 있다면 그것은 넓은 길을 가는 것이며, 그 길에는 내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길이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현대사회는 자기애를 강조하기에 우리는 우리 이성과 감정을 과신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 이성과 마음이 심히 부패하였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렘 17:9) 반면, 좁은 길을 가는 것은 그 속 마음이 하나님께 깊이 뿌리내린 삶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산상수훈의 말씀들이 실제로 살아집니다. 팔복의 말씀들이 세상의 보이는 축복보다 더 진정한 축복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사용하시고, 그들의 기도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시며, 그들의 순수한 구제와 봉사를 통해 세상의 약자들을 보호하고 먹이십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길은 찾는 자가 적은 것이 현실입니다. 사람들이 넓은 길을 더 선호하는 이유는 그 길이 넓고 찾는 이가 많아 그 길의 위험성이 잘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대세에 편승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캘빈, 웨슬레) 그런데, 성경은 세상 풍조를 따르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롬 12:2, 마 8장) 이처럼, 세상의 풍조에 길들여진 크리스챤은 ‘맛을 잃은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 쓸데없어 다만 버리어져 밟힐 뿐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서는 것은 마치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가는 것만큼 쉽지 않습니다. 비록 힘은 들더라도 그것이 생명의 길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인생은 속도보다 방향성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 신앙에도 적용할 수 있는 소중한 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정해야 합니다. 나는 세상 풍조를 따라 내 자아에 삶의 뿌리를 둘 것인가, 세상 풍조와 맞서서 하나님께 내 삶의 뿌리를 둘 것인가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뿌리내린 삶이란 세상을 볼 때도, 이웃을 볼 때도, 내 인생을 계획할 때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을 하도록 권면했던 운동이 한국교회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 뿌리내린 삶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저는 우리 Psalm 공동체가 우리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을 항상 쉬지 않고 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좁은 문은 항상 힘들고 괴롭기만 한 곳이 아닙니다. 그 곳에는 참 기쁨과 진정한 보람과 인간미 넘치는 따스함과 안식이 있습니다. 넓은 길에는 없는 교감과 공감, 인간 사이의 정이 있습니다. 또, 그 길은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며, 그 끝에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풍조를 극복하고 좁은 문, 좁은 길로 갈 수 있는 근거는, 그렇게 살아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우리를 좁은 길 여정을 완주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좁은 길의 목자이자 동반자이십니다. 또한, 우리 주변에는 그렇게 함께 가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 길은 험하지만 외로운 길이 아닙니다. 우리 함께 좁은 문으로 들어가시는 복된 인생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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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감사의 회복 (시편 139편)
추수감사절은 한 해 동안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고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우리는 모두 신앙생활에서 감사가 끊이지 않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만, 그것이 우리 마음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감사가 사라지는 것은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는 영적 빨간불이 켜진 것과 같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영적 연합이 흔들리고 단절된 것처럼 느껴질 때 발생합니다. 즉, 본질적인 관계의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단순히 환경이 바뀌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이 전제되어야 가능합니다. 시편 139편은 다윗이 대적들에게 쫓길 때 기록한 시입니다. 감사하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를 통해서 우리의 감사도 회복되는 놀라운 축복의 역사가 있길 소망합니다. “주께서 나를 아신다.” (1-4절) ‘주께서 나를 아신다’는 표현은 문자적 의미를 넘어서 많은 영적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는 주께서 여전히 나를 살피시고 주목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런 주님만이 나를 완전하게 아시는 분이시며, 나의 모든 상황과 상한 감정까지도 다 아신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내 모든 행위, 내 말과 생각, 내 길을 아시는 분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주께서 내 모든 것을 아시고 여전히 나를 살피신다는 것을 깨달으면, 감사를 잃을 때 느꼈던 하나님과의 단절이 잘못된 나의 감정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를 완벽히 알고 계심을 기억하고, 또 그것을 신뢰하는 것이 감사 회복의 첫 단계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하나임을 기억합니다.” (5-16절)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내가 하나로 연합되었다는 것 자체가 풀리지 않은 신앙의 신비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우리가 창조된 목적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혜의 근본이며,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이 모든 것 되심’을 가르치는 책이 성경입니다. 모든 것 되신 하나님과 내가 하나됨을 다시 기억할 때, 우리 영혼은 모든 것 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소성되며, 우리 안에 감사와 기쁨이 되살아 납니다. 다윗은 이 연합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시작되었다고 고백합니다. (5) 그는 이 연합이 공간과 환경을 초월하는 연합이라고 고백합니다. (7-12) 이어서, 다윗은 이 연합이 영원한 것이며, 자기가 모태에서 조성되기 전부터 이미 계획되었던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13-16) 이 지혜가 어찌나 기이하고 높은 지 자기는 다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깨달음이 다윗에게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과 평강과 소속감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어 마치 고아와 같은 존재인 줄 알았던 우리는, 실제로는 세상 어느 것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띠로 하나님과 연합된 존재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관계를 제대로만 깨닫게 되면, 잊었던 감사가 우리 속에서 다시금 살아납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깨진 적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오해가 새롭게 교정되고 회복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요, 딸임을 실감하면, 내 안에서 감사의 삶을 망치는 ‘포도밭의 여우’는 도망가고 맙니다. 다윗의 감사 (17-18절) 이어서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향해 갖고 계시는 생각들과 계획들이 너무나 보배롭다고 찬양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수가 너무나 다양하고, 자기의 생각을 초월하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일하심을 경험할수록 더욱 그 분을 신뢰하게 되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 분은 진정으로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분이십니다. 이보다 더 멋진 표현을 할 수 없을 만큼 그 분은 우리가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참 좋으신 분이십니다. 다윗에게 감사가 회복되자 더 이상 그 앞의 원수와 대적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19-22절) 다윗은 굳이 원수를 쳐 달라고 간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께서 자기 원수들을 치시고 자신을 보호하실 분이심을 이미 영적으로 실감했습니다. 환경은 하나도 안 변했지만, 이미 그 마음에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감사의 능력입니다. 감사는 내 감정뿐만 아니라 내 환경, 내 문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먼저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신 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누가 감사할 수 있느냐? 주 앞에서 겸손한 자가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알몸으로 왔다가 알몸으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잊지 맙시다. 비교의식과 교만한 마음에서는 감사가 나올 수 없습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땡스기빙의 유래에서 보듯,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에 그저 겸손히 감사하는 자가 진정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자입니다. 성경은 감사를 잃는 것을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라고 진단합니다. (시 50:22-23) 여러분 가운데 감사가 충만하십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오늘 다윗과 같이 하나님과의 관계부터 재진단해 봅시다. 우리 삶에 감사가 회복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우리 영혼이 소생했음을 보여주는 척도입니다. 한 해를 감사하는 시즌을 지내며, 우리 마음 속에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샘솟음 치는 놀라운 축복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나눔 질문
“올 한 해 너무나 수고 많으셨습니다. 베푸신 은혜를 풍성히 누리는 Thanksgiving 시간 되시길 축복합니다~”
말씀: 예수님이 가르치신 재물관 (마 6:19-25)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진짜 복, 빛과 소금된 삶, 율법의 완성, 기도의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어서, 오늘은 조금 까다롭고, 쉽지만은 않은 주제인 돈, 재물에 대한 가르침을 함께 듣도록 하겠습니다. 돈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포함하셔야 하셨을 만큼 우리들이 일상을 살아가는데 너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세상에서 돈의 위력은 실로 막강합니다. (탈무드 예화) 성경은 돈과 재물 자체를 악하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재물의 축복을 주시는 분으로 성경은 말씀합니다.(대상 29:11-12, 창 26:12-13) 그러나, 이 말씀이 우리가 보는 세상의 모든 부자들이 다 하나님께 부의 축복을 받은 것이란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죄된 세상, 즉 사탄도 재물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눅 4:6-7, 마 21장 소작인 비유) 이 때, 사탄이 주는 재물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입니다. 이는 탐심으로 받은 것인데, 돈 자체는 죄가 아니나 돈을 사랑하는 탐심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딤전 6:10) 때론, 하나님께서 연단의 목적을 위해 우리를 궁핍에 처하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이처럼, 돈의 많고 적음과 신앙의 관계는 단순한 함수관계로 해석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본문에서 하시고자 하시는 메시지는 우리에게 돈을 모으지 말라거나, 부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 보다는, 우리가 돈을 어떤 마음으로 모으고, 그 모은 돈을 어떻게 지혜롭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주님의 관심이 더욱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 핵심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돈에 노예가 되지 말고, 돈을 다스리라! 입니다 돈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탐심의 노예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탐심은 사탄이 준 마음입니다. 돈에대한 탐심의 마음은 끝이 없기에 영원히 채울 수 없는 깨진 항아리와 같습니다. 성경은 탐심의 끝은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골 3:5, 약 1:15) 하나님이 베푸시는 재물과, 인간이 탐심으로 추구하는 재물은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왕상 17:4) 인자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보다 넉넉하게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빌 4:19)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탐심까지 충족시키도록 과하게 채우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따라서, 재물에 대해 우리가 기도할 때 가장 기준이 되는 것은‘필요’입니다. 예수님도 주기도문에서“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라고 필요를 간구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그럼에도 인자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필요보다 넉넉하게 우리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그런데, 땅에 쌓아 둔 보물은 필요를 넘어 탐심으로 재물을 구하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재물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재물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마음에 품는 재물이기에 우상숭배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이런 재물을 쌓지 말라고 우리에게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돈보다 더 가치있는 것을 추구하라. 그 가치를 위해 돈을 사용하라’ 입니다. 성경적 재물관은 돈이 인생목적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막강한 힘을 갖고 있더라도 천국과 영생의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 가치를 알기에, 재물만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물질과 재물에 집착한다면 우리는 비교할 수 없이 귀한 가치를 놓치는 것입니다. 성경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 하늘에 쌓아둔 보물이란 영원한 가치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재물을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세계 선교를 위하여 나의 보물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재물의 헌신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을 채우시고 공급해 가십니다. (보아스 사례) 하늘에 보물을 쌓기 위해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생명, 사랑, 건강, 가족 등 재물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값진 것들을 주심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것들을 잠시 맡아 사용하는 청지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신 재화들은 시간적, 양적 제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보물을 어디에 쓸 지 우선순위를 정하게 됩니다. 이 우선순위가 바로 나의 마음이 있는 곳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 6:21) 나의 지출명세서는 곧 나의 마음의 지도입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가 이 땅을 떠나 하늘에 가면, 그 곳에는 하늘에 쌓은 보물만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물을 하늘에 쌓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요, 복받는 사람이요, 존귀한 사람입니다. 영원한 가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없이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만물의 주인되신 예수님이 이 땅에서 청빈한 삶을 사신 이유는, 무엇을 추구하는 삶이 진짜 복된 삶인지 가르치고 본을 보이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님을 좇아 우리도 탐심을 극복하고 감사하며 살도록 자족하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딤후 6:7-8, 빌 4:11-12) 이처럼 재물의 문제는 단순히 돈에 대한 생각의 문제를 넘어서, 우리의 세계관과 신앙관, 믿음의 문제입니다. 재물관이 이렇게 중요하기에, 예수님은 돈과 재물에 대해서 강하게 경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영원한 가치를 깨달아 하늘에 보물을 쌓는 지혜로운 자들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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