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재물을 섬길 것인가? (마 6:24)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맺은 백성들이 살아가야 하는 덕목들을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은 조금 어려운 주제인 재물, 즉, 돈에 대한 말씀들을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재물에 대해 성경은 긍정적인 말씀과 부정적인 말씀들을 함께 합니다. (신 8:18, 시 16:5, 전 5:19 vs 딤전 6:10, 막 10:25, 마 6:19-20) 이런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성경은 재물이 하나님이 주시는 분깃이자 축복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재물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이 땅에서 해 나가시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반면, 성경은 재물에 대한 탐심에 대해서는 우리가 매우 주의해야 할 것임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은 이 땅에서 부자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돈의 사용처가 있으며, 우리가 그것을 추구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본주의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란 ‘돈’으로 노동력을 구매하여 상품과 가치를 생산하는 경제체제를 말합니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모든 물질적 가치를 평가하는 기초가 돈입니다. 이러한 자본주의 속에서는 돈이 안되는 개인이나 기업은 결국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이러한 풍조가 존재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돈이 모든 가치를 정하는 세상은 결코 성경적인 세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 추수관련 율법, 소작농 비유) 사실, 자본주의가 세상의 경제 원칙이 된 것은 전 인류역사 중 굉장히 최근에야 일어난 일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불변의 진리도 아니며, 많은 문제점이 있는 제도입니다. 특히, 자본주의는 인간의 탐심을 인정한 제도입니다. 성경은 탐심을 죄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비성경적 요소들도 정확히 알고, 이에 맞서 성경적 가치관으로 싸워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빛과 소금으로 사는 방법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 재물에 관한 매우 도전적인 말씀입니다. (마 6:24) 이 본문을 보면 중요한 원리들이 나옵니다. 우선, 재물이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다른 것이 우상’ 이라는 팀 켈러의 정의대로, 재물이 우리 주인이 되면 재물이 우상이 됩니다. 그것을 맘몬이즘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본문말씀은 하나님과 재물 사이에 반드시 우선순위를 올바르게 정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려면, 우리가 재물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나야만 가능하다고 단정적으로 말씀합니다. 내가 제물의 노예가 되어 있는지는 ‘내 소유물 중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내가 포기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물어보면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재물을 섬길 것인가? 저는 이 선택에서 꼭 하나님을 선택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녀는 허락된 재물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물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이라는 진짜 축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가 갖고 있는 많은 재물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것입니다. 본문말씀의 병행구절인 눅 16:10은 ‘적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이 큰 일에도 충성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문맥상 여기서 적은 일은 재물이고, 큰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즉, 우리가 재물을 잘 통제하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의 큰 일도 감당할 수 있는 자가 될 거라고 성경은 강조합니다. 그럼, 우리가 돈을 노예로 다루는 방법들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나의 믿음의 뿌리를 돈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말은 쉬운데 위기 앞에서는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근원적인 공급자이십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아합왕에게 보내어 큰 가뭄이 올 것을 예고하라고 하신 후에, 그에게 요단 강가로 가서 숨어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엘리야의 먹고 마시는 문제부터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를 책임져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 6장) 두번째, ‘하늘나라 은행에 저축하자’ 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는 땅에 있는 은행과 하늘 나라에 있는 은행이 나옵니다. 땅에 있는 은행에는 좀먹고, 녹슬고, 도둑이 있지만 하늘 나라에 있는 은행에는 그것들이 없습니다. 재물을 땅에 쌓아 두었다는 뜻은 하나님이 쓰시려고 할 때 못 드리는 재물을 뜻합니다. 땅의 것에 굳게 엮여져 있는 재물입니다. 반면, 하늘나라 은행에 저축하는 것은 하나님 사역과 이웃에게 베푸는 재물을 말합니다. 그 방법은 여러가지 일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은 나보다 못한 자들과 함께 나누는 재물을 정말로 기뻐하십니다. 전세계가 부의 불공평으로 고통받을 때,하나님은 주의 자녀들을 통해서 가난한 자들과 소외받은 자들을 케어하시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은 가난한 자들을 향하고, 동시에 그들을 돕는 손길들에 집중하십니다. (눅 6:38) 마지막은, 온전한 십일조 생활입니다. 십일조는 이미 율법이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있었던 중요한 ‘신앙의 본’입니다. 그래서 십일조의 정신은 율법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감사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내 삶에서 ‘돈의 권세를 끊는 영적 전쟁의 시작’ 입니다. 내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또한,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축복해 주시겠다고 특별히 선언하신 독특한 헌금입니다. (말 3:10-11) 재물의 문제는 어렵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립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경적 재물관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훈련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젊은 나이부터 이를 잘 습관화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재물을 다스림으로, 주께서 큰 일을 맡기실 수 있는 귀한 주의 자녀 되시길 전심으로 축복합니다. 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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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거룩을 쫓는 삶 (출 19:1-6)
우리는 지난 몇 주 동안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과 독특한 언약관계를 맺으시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언약백성이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의 자격이나 선행의 결과가 아니지만, 언약백성이 된 우리에게 하나님은 거룩함을 요구하십니다. 성경적 의미의 거룩은 어떤 뜻일까요? 원어적으로 보면 거룩 (히, 카데쉬)은 구별됨, 구분됨의 의미가 가장 큽니다. 구약시대의 거룩을 보면 시간적 구분, 공간적 구분, 신분적 구분의 의미가 강합니다. 안식일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시간적 구분의 예입니다. 성막과 성소와 지성소를 엄격히 구분한 것은 공간적 구분의 예입니다. 또한, 주의 백성과 이방인, 일반백성과 레위인 혹은 제사장의 구분은 신분적 구분의 좋은 예입니다. 이처럼 거룩이란 “따로 떼어 놓은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거룩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위해서 구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왜 우리는 거룩해야 하나요? 먼저, 우리를 불러 주신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출 19장, 시내산 언약식)거룩함 이야말로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사실을 너무 부담스럽게 받기 보다는 축복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를 “구별하셨고,” 그래서 우리에게 신실하시고 성실하신 하나님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시 46:1) 다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레 11:45, 출 19:5-6)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거룩한 자녀로 부르시고, 우리 예수님께서 교회를 거룩한 아내로 부르십니다. 이는 구속이 아니요, 우리를 향한 영광스러운 초청이요 축복입니다. 거룩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느꼈다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하나님 사랑은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은혜 받으면 불경건한 생각이나 행동을 하기 싫어집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기존의 거룩의 개념을 깨시고 더욱 확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행위로서 지키는 것을 깨뜨리셨고,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이 찢어지며 공간 구분이 깨졌습니다. 더 이상 복음과 성령의 역사가 이스라엘인들 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허용되면서 신분적 분리도 깨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 언약이 맺어졌는데, 그 언약은 바로 ‘마음의 법’입니다. (히 8:8, 10) 이제 우리가 구분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되었습니다. (산상수훈, 마 5-7장) 마음을 드린다는 것은 내 마음에 “예수님이 아닌 것, 예수님과 반하는 것을 품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예수 그리스도가 적어도 51% 보다는 큰 고려요소(super majority)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내 인생의, 내 삶의 결정의 주인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시대의 거룩, 즉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거룩은 매 순간 내 마음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를 위해 ‘예수님과 독백으로 대화하는 연습’을 하시길 권면드립니다. 특별히 청년의 때는 유혹이 많은 때입니다. 먼저 ‘성’의 문제는 거룩에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이 특별히 위험한 이유는 이것이 인간의 가장 깊이 감추어진 욕망이며, 잘 제어되지 않는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넘어질 경우 죄의식과 수치심에 영향을 줘서 우리의 영혼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은, 하나님이 맺어주신 남과 여가 이루는 가정 안에서의 성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의 일관되고 반복된 메시지입니다. 이처럼 민감한 성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스스로 주의하고, ‘책임있는 행동’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결단과 믿음의 시도가 필요합니다. 만약, 조금 무너졌었다고 느껴진대도 거룩의 싸움을 포기하지 말고, 새롭게 결단하며 주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시 119:9) 기독교 커플들은 솔직하게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서로 기도하며 함께 절제하는 아름다운 사랑을 키워가시는 청년되시길 축복합니다. 두번째는 SNS 중독 문제입니다. 이는 그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우리의 관심을 유혹해서 영적 게으름과 나태, 건강하지 못한 생활습관을 만들어 내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루에 유툽 보는 만큼 성경을 보시나요? 이 질문에서 우리는 어떤 경각심을 가져야 할까요? David Zahl은 만약 technology가 여러분을 통제한다면 여러분은 기술의 노예라고 말합니다. 요즘처럼 핸드폰과 인터넷이 절대적인 시대에, 주님의 구별된 거룩한 백성답게 시대적 흐름을 초월하여 내게 주어진 시간을 주님과 함께 더욱 아름답게 채워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말씀 : 아브라함이 시험을 통과하다 (창 22:1 -14)
오늘 함께 묵상할 본문말씀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유대인들도 너무 사랑하는 말씀인데, 유대인들은 이 장면을 ‘아키다’라고 부르는데, 이는 묶임(binding)이란 뜻입니다. 바로, 이삭의 묶임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아키다 사건의 개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75세때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같이 많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정작 그 약속은 그가 100세가 되었을 때에야 이루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이름을 이삭 (웃음)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려가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3일 길을 가서 주님 명령대로 그를 묶어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 순간 천사가 급히 그를 막아서서 이삭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그 옆에는 숫양 한 마리가 덤불에 걸려 준비되어 있었고, 아브라함은 이삭 대신 그 숫양을 번제물로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우선, 이 사건의 외형적 내용을 통해 배울 영적 지혜들을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이삭’이라는 특별한 희생제물을 요구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 얻은 이삭은 아브라함의 전부였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은 번제로 요구하셨습니다. 때론,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를 요구하시기도 합니다.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 때조차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우리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신뢰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데에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고, 그것을 우리가 깨닫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나를 누구보다 끔찍하게 사랑하시는 나의 진정한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마 7:9-10) 두번째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 시험을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아키다 사건이 주는 가장 어려운 시험은 하나님의 명령이 하나님의 언약 (별과 같이 많은 후손)을 스스로 파기하는 것과 같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전부인 이삭을 드리라는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인가 하는 감정적 시험도 굉장히 컸을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를 믿음으로 잘 극복하였습니다. 믿음이 진정한 빛을 발하는 때는 그것이 비이성적이거나 불가능할 때입니다. 그 때 믿음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져옵니다. 이처럼, 참된 믿음은 반드시 온전한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끝으로, 하나님이 친히 대속 제물을 제공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번제 드릴 번제물과, 언약을 이룰 씨앗을 모두 제공해 주셨습니다. 여호와 이레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심’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은 반드시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있습니다. 이를 신뢰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지금부턴 아키다 사건의 보다 깊은 영적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 사건을 계획하셨을까요? 이 사건이 하나님께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이를 위해서 먼저 ‘하필 왜 이 때였나’를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이제야 아브라함이 진정으로 완전히 순종할 준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의 “제가 여기 있습니다.” (‘hineni’)는 단순한 문자적 뜻을 넘어서,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요, 순중하겠습니다.” 라는 뉘앙스가 담긴 히브리어입니다.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이런 순종의 단계에 있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창 15-17장) 이 시간이 영적으로는 ‘힘 빼는 시간’입니다. 자기 생각이 죽고, 온전히 하나님께만 항복하고 두 손을 들고 부복하는 마음으로 나아가게 훈련받은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때가 될 때 사용하십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백세에 아들을 낳고, 그제서야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철저히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때까지 아브라함을 오랜 인내와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서 만져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후에야 하나님은 그에게 아키다 시험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험은 아브라함 인생에 가장 중요한 순간인 것입니다. 그럼, 왜 사랑하는 이삭을 바치도록 하셨을까요? 이삭은 누구인가요? 역대하 3:1은 예루살렘 성이 모리아 산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산이 이삭이 제물로 바쳐진 그 산입니다. 창 22:6은 이삭이 나무를 등에 지고 모리아산을 오르는 모습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2천년 후 모리아산을 나무 십자가를 지고 오르셨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결박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로마 군병에게 결박당하십니다. 이삭은 죽음 직전 주가 보내신 천사에 의해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우리 예수님이 죽으실 때 하나님은 애써 그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셨습니다. 아키다에는 숫양이 번제물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스스로가 그 번제물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비밀입니다. (창 15장) 아브라함은, 아키다 사건은 언약백성인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가슴 뜨거운 사랑의 약속입니다. 독생자를 제물로 주시겠다는 위대한 사랑의 선언입니다. 이를 우리 믿음의 조상을 통해서 밝히 보이심으로 우리와 하나님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를 깊이 깨닫고, 우리 삶의 아키다가 올 때, 우리도 우리 조상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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